15화
거룩한 길(1)
“드디어 돌아왔군.”
바리 던전에서 나오니 깜깜한 밤이었다. 시간을 셈했지만 감각이 엉망이라 지금이 낮을 기다리는 새벽인지, 밤이 막 시작된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반호르는 평소의 망치질 소리도, 노가 작동하며 내뿜는 빛도 없이 평온하고 적막했다.
우리는 그 고요함을 벗삼아 말 없이 걸었다. 등에 매인 마우러스의 시체는 갈수록 무거워졌지만 나는 그것이 옅은 죄책감에서 온 착각이라 여겼다. 시드스넷타에 도착해서야 알았는데, 나는 매우 지친 상태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더 이상 걸을 힘조차 없다. 그래도 사력을 다해 타르라크에게로 갔다. 엔더와 블래시는 이미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내 곁에는 도우갈 뿐이었다.
“솔라 씨!”
“타르라크.”
타르라크는 나를 보고 반색하다, 내가 업고 있는 시체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아…. 스승님.”
나에게서 마우러스를 받아간 타르라크가 이미 딱딱하게 굳은 몸을 붙들고 허망하게 읊조렸다. 얼마 안 되는 삶동안 그에겐 상실이 얼마나 많았을까. 유독 타르라크에겐 이름만 남기고 떠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타르라크. 이걸….”
나는 품에서 로켓을 꺼냈다. 타르라크는 본래 자신의 것인 로켓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던바튼의 스튜어트가 보관 중이었어요. 원래는 저번에 주려 했지만 잊어버렸네요.”
“…솔라 씨에겐 감사할 일만 잔뜩 있군요.”
잠시 로켓 안의 그림을 보며 누이를 그리워하던 타르라크는 기운을 좀 차렸는지 내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우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보다, 손님이 또 있었군요. 추태를 보여드려 미안합니다.”
“…추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지금까지의 사건과 저 세상의 주민인 도우갈에 대해 간단히 타르라크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는 내 설명을 듣더니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솔라 씨에게 에디드 소울 현상을 건 원리에 대해 아십니까?”
“원리라기보단,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실 돌아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타르라크는 좀 주저하다가 말했다.
“애초에 이계에서 강제로 끌려온 당신에게는 귀소본능이란 게 영혼에 새겨있을 겁니다. 비슷한 사례인 밀레시안의 경우, 소울스트림을 통하기도 했고 본인에게 의지가 있으니 해당사항이 아니지만요.”
“그건 마치 원래의 세상을 기준으로 한 에디드 소울 현상과 비슷한 느낌이군요.”
“네. 그러니 당신의 영혼이 현재의 몸과 결합한 끈을 끊어내고 그 현상을 적절히 이용하면 영혼은 저절로 이계로 돌아갈 겁니다.”
나는 입을 벌렸다. 지금 타르라크가 하는 말은 마치….
“답은 간단하군요…. 이 육체의 죽음.”
놀란 나에 비해 정작 도우갈은 본인의 죽음을 말하는 타르라크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입매를 끌어올려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물론 그의 쉽지 않은 성격답게 비틀려 보였지만.
“잠깐만요. 그게 실패하면요?”
“가능성은 꽤 높습니다. 실패의 경우, 저희는 그 결과를 알지 못하겠지만요.”
타르라크는 갈수록 충격적인 말만 했다. 도우갈은 그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내 정신을 쏙 빼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도우갈의 옷 소매를 붙잡아 이 대화를 멈추어야만 했다.
“돌아갈 마음이 절실한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무모해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찾는 게….”
“누가 돌아간다고 했습니까?”
“네?”
도우갈이 내 손을 떨치고 지팡이를 다시 짚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런 리스크를 지고 시도할 만큼 절박한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 정체를 모르고 살아왔기도 했고.”
도우갈의 눈이 내게 향했다. 본인이 매일같이 둘러보았을 잿빛의 세상을 닮은 그 눈. 그 눈은 체념도, 원망도 담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뭐, 계속 그곳에 있는 것보다야 이쪽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보이니까요.”
“….”
“우리는 처지가 언뜻 비슷하군요. 이계에서 온 자들끼리 잘 해봅시다, 그럼.”
이계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원래 세상이라 칭하던 고향을 간단히 포기한 도우갈은 내게 악수를 건네었다. 나는 홀린듯 그 손을 잡았다.
완벽히 같은 처지는 아니지만, 동지가 생긴 묘한 기분이었다.
마우러스의 시신은 던컨 촌장님을 통해 부인인 시라의 옆에 묻혔다. 이제껏 아무도 찾지 않는 묘 옆에 또 다른 묘비가 세워졌고, 비석은 둘이 합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졌다.
[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리 ]
타르라크는 종종 밤 시간이 되면 부부의 무덤을 찾아가 꽃을 놓고 왔다. 나는 진작에 타르라크에게 나오가 된 마리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몇가지 주술을 연구한 끝에 영혼의 포션을 통해 나오를 만났다. 그 둘의 만남을 내가 지켜본 건 아니지만, 눈에 그리듯 선명했다.
나오는 내가 이곳에 도달한 순간, 처음으로 본 존재니까. 그녀는 아마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제 친구를 맞이했을 것이다. 모든 밀레시안들에게 그랬듯 상냥하게….
그리고 도우갈은…,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내 낭만농장에서 생활했다.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공간을 꾸미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아마 마땅한 거처가 정해지기까지 한동안은 자주 만날 것이다.
일이 얼추 해결되고 여유로워지자, 나는 엔더와 블래시를 찾아가 따로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어쩐지 머쓱해하던 둘과 함께 아브네아 호수쪽에서 캠핑을 즐기기도 했다. 사실 네이드가 나타나진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블래시는 오히려 바라던 바라며 호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결국 보진 못 했다.
블래시는 그 이후로 여러 던전을 다닌다며 통 모습을 못 봤지만 엔더는 종종 던바튼에서 볼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엔더에게 마법을 배우게 되었고, 나도 몰랐던 내 마법적 소질을 발견했다….
“그게 아니에요. 좀 더 빨리 볼의 구를 회전시켜야 대미지가 커지죠.”
“앗.”
하지만 엔더는 혹독하게 가르쳤다. 현재 볼트 마법을 모두 9랭크까지 올린 나는 다음 단계인 중급마법을 차징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파이어 볼트와는 달리 파이어 볼은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다. 구를 빠르게 회전시키면서도 터지지 않게 해야하고, 그러면서 조준을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불발되었군요. 솔라 씨는 유독 파이어 볼의 회전력을 가속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네요. 아이스 스피어와 썬더는 모두 습득하셨는데.”
“집중력이 부족하단 소리죠…?”
엔더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젠 이 미소가 할 말이 없을 때 나온다는 걸 알고도 남았다.
“흠. 그럼 이렇게 하죠. 원래 보통 마법사들이 배우는 차례를 차근차근 걷는 거예요. 혹시 메디테이션 스킬을 알고 계신가요?”
“아, 네.”
“랭크는요?”
“…F랭크요.”
자신없이 답하니 엔더는 책 한 권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주었다.
“메디테이션의 경우, 그저 스킬을 수련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얻는게 더 중요해요.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메디테이션 스킬에 대해 더 깊숙이 공부하고, 그 후 마나 리커버리에 대해서 배워 보도록 하죠.”
그가 준 [ 명상으로의 한 걸음 ]을 받았다. 책을 촤르륵 펼치니 생각보다 내용은 많지 않았다. 이 정도면 금방 읽겠지만, 엔더가 말한 깊숙이 공부하라는 건 그저 읽기만 하라는 건 아닐 테다.
“그건 이번 과제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은…, 마침 알반 아르후안이 시작되는 날이군요. 아르후안의 첫째 날에 던바튼에서 보죠.”
“네. 오늘도 신세를 졌습니다….”
엔더와 헤어지고 나는 타르라크를 찾아갔다. 요즘 타르라크는 행방불명된 친구, 루에리를 수소문하는 중이었다. 마나를 제어할 수 없게된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는 방법도 함께 말이다.
시드스넷타에서 하루의 반절을 곰으로 지내는 그의 생활에 있어 의욕을 불어넣은 계기는 아마 크리스텔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텔의 노력은 가상했다. 사제의 일을 겸하면서 나보다도 자주 시드 스넷타를 찾아와 타르라크를 설득하고 위로했으니.
타르라크는 스승과 누이를 잃었지만, 그의 삶에 이제 새로운 의미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입장 때문에 이루어질 일은 요원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통한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니.
“타르라크.”
“왔습니까?”
이제는 익숙하게 나를 맞이한 타르라크는 무언가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길쭉한 지팡이 같은 그건…, 분명 스태프였다.
스태프는 발명된 지 얼마 안된 무기로, 굉장히 비쌌다. 엔더가 들고 있는 것도 내가 처음 본 스태프였으니 말이다. 스태프는 주인의 마나와 공명하는 원드와는 달리 마나가 깃들어있어 더 높은 경지의 마법, 즉 상급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메이븐 님과 던컨 촌장 님의 도움으로 얻은 스태프입니다. 이거라면 제 엉킨 마나 신경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 효과가 있나요?”
타르라크는 고개를 저었다.
“애매합니다. 아주 간단한 마법정도는 가능할 것 같지만 애초에 제게 없는 마나를 스태프에 의존하기엔 담겨있는 양이 적어서요.”
“그럼 마나가 많이 담긴 스태프가 있다면….”
“네, 그 경우라면 이론상 가능하겠네요. 물론 그런 스태프를 구하기란 영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요.”
나는 낙심하는 타르라크를 위해 주제를 돌렸다. 마침 타르라크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티르 코네일은 날씨가 벌써 많이 추워졌어요. 시드스넷타에 비해선 덜하지만…. 알반 아르후안을 기념한 축제도 벌써 준비하고 있고요.”
나는 캠프 파이어를 위한 장작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재료를 꺼내어 간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아브네아에서 낚은 잉어와 쌀이 주재료고 간을 하기 위한 조미료도 있었다.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타르라크가 재료 손질을 돕겠다고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쌀을 물에 씻어달라고 부탁하며,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은 수월하게 붙어 이내 주위의 눈을 녹이는 열을 발산했다.
화기가 돌자 공기도 훈훈해졌다. 손질한 재료를 넣은 냄비에서 아브네아 잉어 스튜가 끓는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났다며 타르라크가 물었다.
“요새 꿈을 꾼 적은 없습니까?”
순간 르나에 대한 질문인 줄 알고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그에게 르나의 존재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여신이라면…, 아직 전언은 없어요.”
“그렇군요. 마족이 드나드는 통로에는 아직까지 변화가 없다는 뜻일 테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역시 시간 문제겠죠.”
나는 곰곰이 모리안 여신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에린을 수호하는 빛으로 둘러싸인 거룩한 기사.
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여신의 말을 의심하고 있다. 나는 그런 거창한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좀 더 고결하고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길에 어울리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일전엔 마족의 땅이 근거지였지만, 이곳에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같이 싸울 사람들이 많으니….”
타르라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의아하게 그를 보자 그가 내게 물었다.
“미리 팔라딘과 접촉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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