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17화

거룩한 길(3)

델에 말에 따르면, 내 이름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중이란다. 아무래도 저번 글라스 기브넨 사건 때문인 것 같은데 따로 단속을 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알고들 있는 건지….

다행히도 소문에 빠삭한 사람이 아니라면 평범한 민간인들은 관심이 없어보였다. 생계를 꾸려나가는게 더 바쁜 이들에겐 오래된 신화나 전설은 와닿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실 좀 떨떠름했는데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팔라딘이 되려했으니 영주 쯤되면 이 일을 공로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영주성으로 향하던 나는 성 앞에서 뜻밖의 인물을 보았다.

바로 아까 팔라딘 훈련장에서 훈련생들을 지도하던 기사였다. 섬세하게 수공된 갑옷을 입은 것만해도 꽤 위치가 높아보였던 그는 다른 젊은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훔쳐들을 생각은 없지만 들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에스라스 님께 이번 던전 파견 결과를 보고하러 왔는데 안 계신 모양이더군.”

“돌아오시면 훈련장으로 따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아닐세, 내가 다시 한 번 오면 되니까 말이야.”

다행히 대화의 막바지였는지 팔라딘 측 기사는 경례를 하고 멀어졌다. 나는 어설프게 서있다 본래 목적을 상기하고 영주성 입구로 걸어갔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성 입구를 지키는 근위기사였는지 젊은 기사가 내 앞 길을 막고 용건을 물었다. 막상 기세좋게 왔지만 생각해보니 영주를 만나는게 쉬운 일일 것 같지는 않다는 걸 직감했다.

“영주님을 뵙고 싶어서요.”

솔직한 답에 기사는 곤란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답을 한 나조차도 민망함에 낯이 뜨거워졌다. 하기야 뭘 믿고 대뜸 낯선 사람을 영주와 대면시키겠는가?

“죄송합니다만, 영주님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거절할 필요 없습니다, 근위대장.”

내 뒤에서 뚜렷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예복 차림의 여성이 나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총명한 은색 눈동자는 나를 뚫을 듯이 강렬했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인상이었다.

“밀레시안 솔라 씨죠? 당신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게 용건이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내가 묻자 여성과 함께 왔던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일순 불편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은 듯 여성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이멘마하의 재상, 에스라스입니다. 소개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했다시피 전 당신을…잘 알고 있으니까요.”

묘한 어조였다. 나는 에스라스를 살피다가 용건을 꺼내었다.

“팔라딘이 되고자 왔습니다.”

“흐음…. 본래 팔라딘이 되고자 할 땐 영주님에 대한 충성심과 정의를 보이기 위한 절차가 있습니다. 시정잡배와도 같은 자들은 신의 대리인으로 세울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솔라 씨의 공로를 인정하여 제가 특별히 영주님께 요청해보도록 하죠.”

에스라스는 내게 따라오라고 하고는 우아하게 영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수확을 얻은 나도 놓칠세라 따라 들어갔다.

영주성은 이멘마하라는 도시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평온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곳곳에 붉은 카펫이 깔린 내부를 거닐다보면 한눈을 팔 만큼 아름다운 조각이나 그림들이 걸려져 있었다.

그리고 어떤 초상화도 있었다. 붉은 머리의 잘생겼지만, 어딘가 병약해보이는 남자아이가 그려진.

내가 초상화에 눈길을 준 걸 귀신같이 알았는지 에스라스가 설명했다.

“저희 영주님이십니다. 몸이 좋지 않아 제가 영주 대리로 일하고 있지만요….”

“상당히 어리시네요.”

에스라스가 내 발언에 묘한 눈을 했다. 그제야 내 발언이 영주를 폄하하는 것이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에스라스는 그에 대해 별다른 첨언을 하지는 않았다.

응접실에서 나는 초상화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리안이라는 이름의 영주는 초상화로 봤던 것보다 더 병색이 짙었다. 붉은 머리는 강렬했지만 색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리안의 눈길이 내게 닿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꾸벅인 것 외에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가 나를 잘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초점이라곤 없이 흐리멍텅한 눈이었으니.

“이런, 영주님께서 많이 피곤하신가봅니다.”

그렇게 말한 에스라스는 리안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 팔라딘 추천 건에 대한 귓속말인듯 싶었다. 리안이 주억거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라스는 시종을 시켜 그 자리에서 추천장을 써내렸다. 직인이 찍힌 추천장이 내게로 주어지자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당신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지요. 솔라 경.”

그렇게 나는 손쉽게 팔라딘 소속이 되었다.

* * *

그 후 나는 팔라딘이 되기 위한 훈련에 동참했다. 검을 몇 번이나 휘두르고, 대련하고, 혹은 휴식을 취하며 여러 소문들을 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르나의 꿈을 꾸게 되었다.

글라스 기브넨 건 이후로 꾸지 않아서 어쩌면 다시는 느끼지 못 할거라 생각했던 꿈 속의 감각. 타인과 동화하여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이 기묘한 위화감.

르나를 둘러싼 주위는 던전 내부처럼 보였다. 던전에는 르나 혼자만이 아닌, 팔라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함께였다. 아니, 정확히는 수련생들이다.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나와 함께 수련하던 자들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그들은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빛의 기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우르르 쫓고 있는 건 고작, 10대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 마족이다! 잡아라! ]

마족이라고? 인간과 비슷한 외형의 마족들도 있는 건 알고 있지만….

[ 아…. 싸우고 싶지 않아요…! 조용히 돌아가겠어요. 저를 놓아 주세요! ]

막다른 길에 다다른 여자아이는 결국 울상인 얼굴로 간청했다. 하지만 마족이라는 생각에 그 부탁이 진심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여자아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여자아이는 결국 무자비한 검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잔혹하다. 꿈인 걸 알면서도 몸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정작 르나는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나, 당신은 이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왜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야!

그때였다.

[ 트리아나! ]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나는 순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자의 얼굴이 리안 영주와 몹시 닮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쪽이 좀 더 키가 크고 건장해보였지만, 둘은 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 붉디 붉은 머리카락도, 그와 같은 색의 눈도.

그걸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술렁였다.

[ 헉!! 저, 저건…! 도플갱어…. 영주님의 도플갱어다! 저렇게까지 닮다니…. ]

그를 도플갱어라고 판단한 팔라딘 수련생들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합심해도 남자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 했다. 그나마 뒤늦게 달려든 르나와는 호각으로 싸웠으나 어쩐 일인지 르나는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상황은 에스라스와 리안 영주가 나타나면서 묘하게 바뀌었다. 남자는 자신이 리안의 형이라 주장했고, 에스라스는 마족 여자아이를 인질로 삼고 남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위기일발의 상황에, 남자를 구한 건….

[ 모르간트! ]

저세상에서 보았던 검은 갑옷의 마족이었다.

눈을 뜬 나는 지금이 새벽임을 깨달았다. 낭만 농장에 있는 나의 집 안. 숨을 고르다가 자고 있을 도우갈이 깨지 않게 문을 살며시 열었다.

농장은 꾸민 티가 확연하게 나서, 이제 황량한 공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밭에는 농작물이 자라고 있고, 곳곳에 심은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져 평온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나는 주섬주섬 장갑을 손에 끼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자란 허브나 캐내고 있으려니,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우갈이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작업을 계속하며 답하려했다.

“별 일….”

“없다고 하기엔 못쓰게 된 허브가 너무 많은데요.”

도우갈이 지적한 건 내가 캐내다 실패한 허브다발이었다. 본래의 색과 효과를 잃고 시들시들해진 허브는 과장없이, 캐낸 허브의 절반 이상이었다.

“윽…. 전 원래 약초학 스킬이 미숙하다고요.”

“변명이라도 해서 마음이 편해진다면야 뭐, 상관은 않겠습니다만. 곱게 키운 허브를 괜히 망치진 마시죠.”

나는 결국 장갑을 벗었다.

“혹시, 음. 저쪽 세상에서 살 때 검은 갑옷의 마족을 본 적 있나요?”

“아니요. 제가 살던 곳 근처에는 마족이 별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저 같은 절름발이가 아니니까요.”

“꼭 말을 해도….”

그를 흘겨보았지만 도우갈의 표정은 뻔뻔했다.

“아니면 됐어요. 그냥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런가 꿈이 뒤숭숭했어요.”

나는 그걸로 화제를 끊었다. 도우갈도 더는 묻지 않았고, 우리는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각자의 일정에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나는 오늘도 팔라딘이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

마음에 얹힌 게 많았다. 꿈 속에서 보았던 훈련생들의 거침없는 칼 끝. 그 끝이 향한 것은 마족이지만 어릴 뿐인 평범한 여자아이였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려 했다.

도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그 자가 모르간트라고 불렀던 검은 갑옷의 마족과는 무슨 사이고?

고민은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까지 확장되었다.

팔라딘은 정의를 추구하는 기사가 아니었나? 단지 마족이라는 이유로 한 마디의 변명조차 듣지 않고 약자를 공격하는게 그들의 정의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있나?

끝없는 의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슥거렸다. 나는 결국 훈련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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