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변하지 않는 것(3)
“알베이 던전 입구.”
나는 먼지가 붙고 낡아서 바스라져 가는 표지판을 읽었다. 바위 틈에 숨겨진 던전은 알비 던전과 정말로 흡사했다. 그렇다면 여기는 우리의 추측대로 정말 티르 코네일의 다른 모습일 확률이 높다.
“들어가 볼까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던전 내부는 알비 던전과는 사뭇 달랐다. 가운데에 여신의 제단이 있는 건 그대로지만 주변은 돌벽 대신 짙은 어둠과 절벽으로 갈라져 있는 땅이 차지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서 공허한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풍경이다.
이따금 메마른 바람 한 줄기가 절벽 아래에서 불어왔다. 나는 최대한 끄트머리에 가지 않게 조심하며 제단을 살폈다. 엔더가 의문점을 제시했다.
“그나저나 이곳에도 여신의 제단이 있네요. 여신상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던전을 분리하는 여신의 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도 여신이 지킬 인간이 있었다는 뜻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엔더가 여신상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에 관리되지 않은 석상의 돌가루가 잔뜩 묻어나왔다.
“뭐가?”
“여러가지로요. 일단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다는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한 명만 남기고 모두 멸망했죠. 이유는 마족들의 침략…, 이라고 가정하면 모순이 생겨요. 가령 침략에 성공한 마족들은 왜 이 세계의 주민으로 살고있지 않은가, 같은.”
“그럼 멸망의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건가요?”
“지금으로서는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마족들이 기를 써서 에린을 침략하려 해왔던 역사를 본다면 이 세상은 필시 마족들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땅일 겁니다.”
이런 곳을 티르 나 노이…, 낙원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뭘까요?
엔더가 던진 질문은 내 가슴 속에 작은 의문으로 남았다. 하지만 일단 당장의 일을 해결하는게 먼저였으므로, 우리는 곧 여신을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솔라 씨의 꿈 속에서 여신은 자신을 봉인하는 다섯 개의 마석을 부수라고 했죠? 흐음…, 대충 여신의 위치는 알 것 같아요. 던전은 보통 마족들의 아지트니 여신이 봉인되어있다면 이 알베이 던전 어딘가에 있겠죠.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가느냐 인데.”
“아무거나 떨어뜨려보면 되지 않을까?”
“후후…, 블래시. 그랬다간 이상한 곳으로…,”
블래시를 타박하던 엔더는 말을 멈추고 제 품을 뒤졌다. 그의 손에는 녹색 구슬이 들려있었다.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몰라요. 여신은 봉인되어 있지만 여신상은 작동하니까.”
“여신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대충 결론이 나왔다. 백문이 불여일견. 우리는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구슬을 떨어뜨리니 보이던 광경이 깨어지고 마법처럼 던전 내부가 드러났다.
“자, 가봅시다.”
알베이 던전은 수준이 꽤 높았다. 덕분에 꽤 어렵사리 몬스터를 쓰러뜨렸다. 그래도 블래시와 엔더는 그간 쌓은 우정이 헛되지 않게 손발이 척척 맞았고, 여유가 생길 때는 나를 도왔기 때문에 힘든 것에 비해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던전의 끝에서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이게 마석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여신을 봉인한 마석이라고 하기엔 별다른 점은 없어보이거든요.”
“뭐야, 그럼 네 추측은 틀린거잖아.”
“추측이니까 틀릴 수도 있는 거죠.”
나는 뻗어나온 검은 가지 위에서 구슬을 떼어냈다. 온통 검어서 안이 보이지 않는 구슬…. 엔더는 내게서 구슬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흠. 이것도 여신상에 바쳐볼까요? 평범한 던전 방과 다르게 변수가 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던전의 길을 조정한 힘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여신상을 짚고 다시 던전 입구로 온 우리는 이번에는 검은 구슬을 바쳤다. 그러자 생성된 던전은… .
“칙칙하네.”
녹색 빛이 감돌던 아까와는 달리 온통 사방이 검은빛이었다. 확실히 뭔가 있긴 하겠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던전을 돌파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속도는 더뎠다. 특히 블래시는 활을 쏘느라 스태미나가 많이 떨어졌는지 포션을 마시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포션중독에 걸릴 수 있으니까.”
“흐…, 하지만 마시지 않으면 힘이 빠져서 공격 못할 것 같은 걸!”
나는 방심한 틈을 타 블래시의 뒤를 노리는 마족에게 스매시를 꽂아넣었다.
“위험했어요!”
“아, 고마워!”
이런식이다 보니 다사다난한 방을 지나 다음 방으로 향할 쯤에는 우린 꽤 많이 지쳐있었다. 다들 자리에 털썩 앉아 재정비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할까.”
“글쎄요. 던전에 지도가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말 없이 장작을 쌓고 불을 지폈다. 불 앞에서 휴식을 취하면 더 회복력이 좋아지는건 유용한 상식이다.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자 나를 따라 다른 둘도 말이 없어졌다. 전투 중에서도 말이 많던 파티가 조용해지자 던전의 음울한 기운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걸 막아내는 건 우리 가운데 있는 캠프파이어의 불빛이었다.
난 생각의 늪에 조금씩 잠겨갔다. 여신을 구출한다 해도, 여신에게 모든 걸 맡길 생각은 없기 때문에 마우러스를 만나서 그가 글라스 기브넨을 소환하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하지만 막상 닥쳐오니 알겠다. 나에게 마우러스를 따로 만날 방법이 없다.
던전은 우리가 구조를 알지 못하는 미로고, 아마 마우러스도 던전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데…. 마족들의 감시를 피해 마우러스를 만난다?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좋을까. 이대로 갔다간 르나가 겪은 일이 그대로 벌어질지도 몰라.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
깊은 상념을 깬 건 블래시였다.
“이제 가자. 충분해졌어.”
그의 말에 나와 엔더도 주섬주섬 일어났다. 고갯짓을 가볍게 해 안 좋은 생각을 떨쳐내고 나는 두 자루의 검을 꾸욱 쥐어잡았다.
보스룸까지는 의외로 얼마가지 않았다. 거대한 열쇠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자 문이 드르륵 열렸다. 지긋지긋한 고스트 아머들이 우리를 인식하고 달려온다. 나는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가 검을 휘둘렀다.
하나, 둘. 베어 넘어뜨린 숫자가 한 손을 다 채우고, 마지막 마족이 블래시의 화살에 꿰뚫릴 때.
여신이 보란듯이 나타났다.
눈을 감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녀에게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모리안 여신은 우리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감사해요…. 당신들의 용기로 긴 세월의 벽을 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여신의 부탁이었다.
“글라스 기브넨의 부활이 임박해왔습니다. 글라스 기브넨은 의지를 박탈당한 파괴의 화신…. 그것은 소환자의 의지대로 에린을, 티르 나 노이를 불태울 것입니다….”
비장함이 깃들 순간임에도 엔더가 끼어들어 여신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티르 나 노이는 어딘가요?”
그는 궁금증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신은 엔더의 의문에 일말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 듯 나만을 향해 말해왔다.
“글라스 기브넨의 분리된 의지를 찾아주세요. 그는 인간의 육신을 빌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이…, 펜던트를 가져다 주세요. 글라스 기브넨의 부활을 막는 걸 도와달라하면…, 그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설마 도우갈이…? 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 땅에 사는 인간이란 도우갈 밖에 없으니 모리안 여신이 말한 글라스 기브넨의 의지, 그러니까 영혼은 도우갈에게 빙의되었다는 것.
엔더가 느낀 묘한 기운이 그 점 때문일지도 몰랐다.
모리안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건네고 사라졌다.
정신없이 알베이 던전을 나온 우리에게 새로운 지침이 생겼다. 도우갈을 찾아가는 것. 하지만 나는 바로 도우갈을 찾아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소름 돋을 만큼 기묘한 감상이 내 몸을 감싸왔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이 땅과는 다르게 아직 청명하다. 푸르고 밝은 하늘….
“뭐해? 안 갈 거야?”
블래시가 나를 재촉했다. 그럼에도 나는 멍하니 타르라크가 줬던 글라스 기브넨의 자료 한 구절을 속으로 읊고 있었다. 글라스 기브넨이 소환되면, 하늘이 검게 물든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아직 글라스 기브넨은 소환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가 이 땅에 온 직후부터 지금까지는. 하늘에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고민 끝에 나는 엔더와 블래시에게 입을 열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둘에게 고마웠다.
“엔더, 블래시. 둘은 일단 모리안 여신이 말한대로 도우갈에게 가주세요.”
“그럼 당신은요?”
“저는 여기서…, 한 번 확인해볼 게 있어서요. 제가 돌아가기 전까지 기다려주시면 좋겠어요. 엇갈리면 안 되니까.”
내 결정은 그럴듯한 이유도, 그렇다고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형편없는 주장인 판국이니, 둘에겐 얼마나 황당한 말일까?
아니나 다를까 엔더는 내게 적절한 이유를 요구했다.
“솔라 씨. 지금 한 시가 급한 상황이고, 또 홀로 행동하기 힘든 장소예요. 적어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해주셔야 저희가 납득합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금방 다녀올테고…. 알다시피 저는 행동불능이 되어도 도우갈에게 돌아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담을 덜려는 내 말이 트리거가 되었을까.
“…너는 그럼.”
늘 여유롭게 굴었던 블래시가 돌연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힘이 실린 악력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속에는 침착함과 회의감. 그리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목숨을 버려도 된다고 생각해?”
미약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