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변하지 않는 것(6)
“오…. 이게 누구야. 모리안 여신이로군.”
“제 모습을 빌어서 거짓된 행동으로 인간의 세상을 교란시킨 것... 복수의 여신으로 그 댓가를 요구합니다.”
키홀과 모리안이 대치했다. 까만 날개를 단 흰 여신과 흰 날개를 가진 까만 속내의 신. 그 대비되는 색은 두 신의 갈등을 그대로 드러낸 듯 강렬했다.
그동안 나는 쓰러진 마우러스를 살폈다. 뛰지 않는 맥박. 호흡도 없었다. 마우러스는 인간, 그러니까 밀레시안이 아닌 보통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목숨은 하나로 끝이다.
끝.
단어가 주는 충격은 강렬하다기보단 얼떨떨했다. 마우러스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니 이 자에게 나눌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연민이 다일 것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내 계획에 마우러스의 죽음은 없었다. 내가 그린 미래에는…르나와 달리…진실을 깨달은 마우러스와 타르라크의 상봉이 있었고….
거기에는 죽음도, 누군가의 상실도…. 아무것도 없었다.
왜일까, 매우 허망한 기분이 되었다. 슬픔과 분노마저 퇴색되어버려 나는 모든 기운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대로 놓아버리지 않은 건, 내 옆의 블래시가 상처를 부여잡고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감고 있기 때문이었다.
‘변하지 않았어.’
나는 르나와 다른 행보를 걸어왔지만 결국 달라진 건 없다. 글라스 기브넨은 부활했다가 소멸하여 키홀의 계략대로 에르그 붕괴가 일어났고 마우러스는 신에게 맞서다 죽음을 맞이했으며 나는 반쯤 실패의 책임을 떠안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바꾸려고 했던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이건 운명인가? 정해져, 벗어날 수 없는, 아직 벌어지지 않을 뿐인 역사의 나열.
르나의 꿈은 그저 내게 ‘이대로 똑같이 흘러갈 거야’ 라는 지독한 암시를 줄 뿐인가?
하지만….
“괜찮아?”
블래시가 내게 물었다. 엔더도 비척비척 다가와 나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그 둘을 보았다. 엉망진창이 된 꼴로 나를 걱정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르나와 나의 차이점을 하나 찾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없었던…, 동료 말이다.
적어도 나는 이 실패의 아픔과 과정의 기억을 나눌 동료가 있다. 그건 너무나도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네…. 괜찮아요.”
“상황은 일단락 된 것 같네요. 키홀이 노리던 건 글라스 기브넨이 아닌 에르그 붕괴였다는 점이 놀랍긴 했지만….”
엔더가 글라스 기브넨이 쓰러진 자리에 생긴 거대한 암흑의 통로를 쳐다보았다. 근처로 불길한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한편 모리안 여신의 복수전은 키홀이 자리를 피하면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모리안 여신이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급하게 왔습니다만…. 좀 늦었군요. 다치신 곳은 없는지요…. 글라스 기브넨도 쓰러뜨려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여신의 시선이 엔더와 같은 곳에 머물렀다.
“글라스 기브넨이 쓰러지긴 했지만 이것으로 끝난 건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글라스 기브넨이 파괴되어 방출된 사악한 마나는 에린과 다른 세계를 잇는 통로를 만들어낸답니다. 키홀의 목적은 수족인 다크로드들이 던전을 통하지 않고 에린에 나타나게 하는 것….”
그리고 이내 나를 향해 또 한가지 길을 세웠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돌아가 마족의 침입에 대비해주세요. 그들은 다시 한번 에린을 침략해 올 것예요. 다시 한번 마우러스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포워르와 키홀이 에린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힘을 길러주세요.”
그것이 소울스트림의 인도자 마리오타…, 바로 마리로 하여금 당신을 소울스트림으로 불러온 이유니까요.
여신에 입에서 흘러나온 예상치 못한 진실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잠깐, 그렇다면 나오는 마리라는 건가요?”
“…네. 이미 한번 죽은 그녀를 인도한 것은 저, 모리안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잃어 마리였을 적의 본인의 기억만을 가졌을 뿐입니다.”
내 충격에는 아랑곳않고 모리안 여신은 내게 가호를 내려주었다. 가호를 내려준 여신의 몸은 할 일을 다 했다는듯 흐려졌다. 그리고 결국엔 검은 깃털을 흩날리며 사라진 여신의 마지막 전언만이 허공에 아스라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전언을 곱씹었다.
‘에린을 수호하는…빛으로 둘러싸인 거룩한 기사, 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흐름이 나를 휘말리게 할 거라는 사실이 무겁고 두렵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는데.
“휘몰아쳐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블래시가 투덜거렸다. 그의 상처부위는 어느새 붕대로 단단하게 매어져있고 피도 멎었다. 다만 포션중독인지 얼굴색이 묘하게 나빴다. 엔더도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 마우러스의 시신을 수습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도록 하죠. 오래있어 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그리고 시신은….”
“제가 타르라크에게 전해줄게요.”
마우러스의 시신을 등 위에 올리고 우리는 던전을 되짚어 돌아갔다. 마을 중간에 다다라 도우갈이 보였다. 아직 미처 검은 기운이 빠지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던 도우갈이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했다.
“살아 돌아오신 걸 보아하니 성공은 하셨군요.”
“당신이야말로 돌아가지 않았네요? 글라스 기브넨이 파괴되었는데.”
엔더가 대꾸하자 도우갈은 입매를 비틀었다.
“영혼이 몸에 정착한 시간이 너무 길어 떠날 수 없게 된 모양입니다.”
그럼 결국 도우갈이 우리를 도운 건 헛고생이 된 셈이다. 이 삭막한 곳에 홀로 남아 있는 사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체를 몰랐던 시간과 알고 난 후의 시간은 어떤 차이로 흐를까.
나는 그래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그야…. 달라지는 건 없죠. 저는 이곳에 있을테고…. 당신과 같은 자들이 오면, 이 땅에 남은 단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맞이할 겁니다.”
“글라스 기브넨은 파괴되었고, 도우갈 씨는 이제 이 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을 텐데요.”
도우갈이 뜻밖의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입을 작게 벌렸다. 사실 그가 보인 모든 표정 중 제일 바보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로, 실제로는 그렇게 얼빠져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내 소리가 그렇게 황당하게 받아들일 말인가?
그가 미소지었다. 이전보다 조금은 냉기가 빠진,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보였다.
“당신은 정말 바보같은 사람이군요. 물론 이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요. 새삼 더….”
“아니, 배려해주는걸 뭐 그렇게 꼬아서 받아들이나!?”
듣다못한 블래시가 으르렁거리자 도우갈은 칭찬입니다, 라며 일축했다. 칭찬이라니까 더 기분이 이상하다는 걸 알까….
“뭐, 상관은 없겠죠. 그럼 저도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짐이나 가지고 와야할 건?”
“값나가는 건 딱히 가지고 있지 않으니…, 바로 출발해도 무관합니다.”
그렇게 일원이 한 명 더 추가된 채로 우리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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