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13화

변하지 않는 것(5)

“따라 가볼까?”

들어온 길을 되짚어 나가는 동안 계속 뒤를 돌아보는 나에게 블래시가 물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우러스의 다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보다도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르나의 상황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본 검은 갑옷의 마족…, 글라스 기브넨만 산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대상으로도 이기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문제거리가 늘었다.

침묵하는 내게 블래시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말 없이 던전 안의 걸음소리를 채웠다.

밖으로 나와 다시 여신상 앞. 엔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분 다 수고하셨어요. 근데 얼굴 빛이 영 안 좋네요?”

블래시가 간단히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의외로 엔더는 마우러스의 결정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놓았다.

“성공 확률이 낮아요. 마우러스 씨의 말에 따르면 마신 키홀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 굳이 마우러스를 이용했다는 건데, 그 말 뜻은 키홀 또한 글라스 기브넨을 부릴 수 있다는 뜻이죠. 애초에 옛 전쟁 당시 글라스 기브넨을 거느렸던 자는 키홀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마우러스가 지배권을 빼앗길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네. 그렇게 된다면 마우러스 씨의 목숨은 물론 에린의 평화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허무하게 둘을 잃는 것보단, 차라리 우리가 무엇이라도 보태는게 좋겠네요.”

블래시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엔더 또한 마찬가지. 내가 결단을 내려야할 타이밍이었다.

“마우러스에게 가죠.”

“뭐, 어쨌든 좋아. 근데 그 사람한테는 어떻게 가지?”

나는 눈을 바보같이 떴다. 그러고보니 그 생각을 못 했네.

“하하, 그건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도우갈 씨가 이 펜던트에 특별한 패턴을 새겨주었어요. 이것이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체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하더군요.”

엔더가 든 펜던트는 여신이 내게 건넸을 때와는 달리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마법적인 힘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걸 여신상에 바쳤다. 지긋지긋한 던전이 다시 한번 생성되었다. 블래시가 무사히 나가게 되면 한동안은 사냥을 하지 못 할 것 같다고 투덜대었다.

던전은 몇 번을 거듭해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스태미나 포션을 줄창 마셔야 했는데, 포션 중독에 걸리지 않은 게 용했다. 아마 한 번만 더 마시면 정말로 걸리겠다 싶을 때에야 우리는 끝에 다다랐다.

“마우러스!”

나는 보스룸의 문이 열리자마자 경악했다. 마우러스와 키홀이 서로의 마법을 밀어붙이는 힘겨루기 중이었는데, 마우러스가 키홀에게 밀리는 처지였다. 엔더가 재빨리 마우러스에게 손을 보태어 힘을 더했고, 그걸 본 검은 갑옷의 마족이 달려드는 걸 블래시가 저지했다.

여유가 생긴 마우러스가 내게 외쳤다.

“글라스 기브넨이 소환되었어! 아직 키홀에게 지배권이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승산이 없네! 차라리 이때 글라스 기브넨을 없애버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글라스 기브넨을 쓰러뜨리면, 그 후에는? 어둠의 에르그가 나오게 되어 결국 키홀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버린다.

“하하하! 절호의 기회에도 망설이는 애송이가 글라스 기브넨을 없앨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대마법사도 궁지에 몰리면 판단력이 흐려지는군.”

“시끄럽다! 그러는 키홀 네 놈 또한 지금 이곳에 발이 묶인 처지 아니더냐!”

“웃기는 소리.”

키홀이 커다란 로브 아래의 짙은 어둠에서 웃음을 내보였다. 그의 손 끝에서 뻗어나간 마력이 더욱 충만해졌다. 엔더와 마우러스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을 힘이었다. 돕고 있던 엔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와 동시에 블래시의 어깨죽지가 검에 크게 베였다. 능숙한 그답게 곧바로 거리를 두긴 했지만 활이 주력인 그에게 저 부상은 큰 패널티였다.

이 순간, 나는 물리지 못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키홀의 계략대로 글라스 기브넨에게 가야하는가, 아니면 그를 무시한 채 승산없는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하지만 마음은 이내 굳건해졌다. 나는 손에 쥔 검 두자루의 날을 세우고 글라스 기브넨에게 뛰어들었다. 차라리 키홀의 계략대로 될 지언정, 저 사람들이 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거대한 거인은 마우러스의 지배가 풀리는 중인지 멈칫거리며 나를 향해 적의를 띄웠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머리를 노렸다. 공중에 떠있는 무방비한 몸을 향해 글라스 기브넨이 대검을 든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동작은 둔하고 끊겨 있어 나는 거인의 대검을 발판 삼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이어 그대로 다른 팔을 타고 올라가 머리를 베어갈랐다. 하지만 검은 얕은 상흔을 남기고 튕겨나왔다. 윽, 얼마나 단단해야 이렇게 손목이 울리지.

글라스 기브넨이 개미털듯 몸을 흔들었다. 덕분에 떨쳐진 내가 낙법을 쓰기도 전에 글라스 기브넨이 나를 낚아채어 던졌다.

“ㅡ!”

아파!

벽에 부딪힌게 머리가 아니라 등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머리였으면 그대로 사망했을지도. 나는 또 한번 공격을 허용할까 얼른 몸을 일으켰다. 꽤 멀리 날아온 터라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 그대로 보였다.

엔더와 블래시는 최선을 다해 나에게 다른 공격이 닿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엉망이 된 꼴을 보니 덜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는 건 나중에.

…감사인사도 나중에 하자.

글라스 기브넨이 포효했다. 귀가 아릴 정도로 울리는 포효 끝에 다시 나를 향해 돌아본 글라스 기브넨의 입으로 거대한 에너지가 모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이건 위험하다.

나는 엔더와 블래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글라스 기브넨의 인식을 끌었다. 그렇지만 순순히 맞을 마음은 없다. 저 빛이 쏘아지는 속도가 느리진 않을테니 눈으로 보고 바로 피하는게 불가능 할 터.

나는 검 한자루를 인벤토리에 넣고 방패를 꺼냈다. 그 후, 단단히 받치고 방어에 치중한 디펜스 스킬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에너지가 쏘아졌다. 평범한 방패가 버티기엔 너무 강력한 에너지라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래도 뒤에 있는 나는 부상을 덜 수 있었다.

“하아….”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상도 심하고. 이대로 한 두번 더 맞으면 죽겠지.

그래도 해내야 한다. 어떻게?

그때였다. 공격태세이던 글라스 기브넨의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졌다. 설마 마우러스가?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가 스매시를 날렸다. 뛰는 속도를 더한 공격은 저번 것보다 더 큰 대미지를 입혔다.

글라스 기브넨의 거대한 팔 하나가 너덜너덜해져 무너졌다. 덕분에 들고 있던 대검이 떨어져 쿵, 소리를 내며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글라스 기브넨은 내 유효타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아까와 비슷하게 계속해서 대미지를 주었다. 차곡히 쌓인 공격은 아무리 단단한 몸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균형을 잃은 글라스 기브넨은 쓰러졌다.

그 광경을 마냥 기뻐할 수도 없이 나는 마우러스 쪽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 이 틈을 만들어준 건 분명 그이다.

“마우러스!”

하지만 마우러스는 이미 피를 토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손 끝이 차가워짐을 느끼며 키홀을 노려보았다.

“이런, 그 틈을 타 애송이가 힘을 냈나보군…. 하지만 어리석어. 고작 글라스 기브넨을 쓰러뜨리기 위해 목숨을 대가로 바치다니.”

“그건 어리석은 게 아니에요.”

“그래서 네 녀석이 애송이란 거다. 겉만 보고 그 속은 보지 못하는 족속들…, 그게 인간 아닌가?”

“…에르그 붕괴 현상, 그게 진정 당신이 원하던 거였으니 그렇게 생각하겠지.”

키홀에게서 흘러나오는 비웃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언제나 일이 제 마음대로 흘러갈거라 생각하지는 말아요.”

“네 녀석…,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왜 글라스 기브넨은 베었지?”

나는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저 마신은 이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좋아….”

키홀이 두 손을 들었다. 그의 입은 불길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다르카 셀림…메데르 다우…사비….

주문을 양식삼아 자란 신의 마법이 나를 덮쳐왔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몸을 힘껏 밀듯이 안았다. 덕분에 바닥을 크게 구른 후에야,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블래시였다.

그의 어깨에서 흘린 피가 내 뺨을 적셨다. 나는 그만 물어볼 뻔했다. 이 엉망인 상태로 왜 나를 구했냐고.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못 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을까.

내 표정이 너무 처참했는지 블래시가 웃었다.

“그런 상황이 안 오게끔 해준다고 했잖아. 그래도 주문은 피했으니 걱정하진 마. …그보다, 이제야 행차하신 것 같은데?”

그가 가리킨 손끝에는 모리안 여신이 서있었다. 검은 깃털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그 광경을 보며 내 마음 속으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여신의 옆에는 쓰러진 마우러스가 있었다. 감은 눈이지만 그녀는 마우러스를 슬프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나 곧 여신은 고개를 들어 키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여신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멈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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