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변하지 않는 것(4)
그제야 나는 실수했음을 깨닫고 침묵했다.
죽어도 된다, 라는 안일함은 같은 밀레시안인 이들에게 무례였다. 내게 해당되는 말이면, 당연히 이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에.
시드스넷타에서 마지막으로 타르라크를 보고 돌아오는 길.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인간의 죽음에 대해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내 목숨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걸까.
이어 자연스럽게 떠오른 기억은 처음 내가 이곳에서 죽었을 때였다.
내가 세월에 짓눌려 먼지가 되기까지 결코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 순간이 지금은 흐릿하다. 어떤 집채만한 짐승에게 물려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 날의 고통과 감정들은 지금. 타인의 눈으로 읽어내는 듯한 어렴풋함으로 남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한다. 그러니 내 최초의 죽음 또한 뒤이어 오는 더 많은 죽음에 밀려 뒤로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시 겪은 고통이 반감되는 건 아니라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몸에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 어느새 블래시의 손은 힘을 뺀 채 툭툭, 위로하듯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고. 들어봐. 사람들에겐 늘 최후의 수단이 있어. 예를 들어 하라는 숙제를 안 한 아이가 준비한 아프다는 거짓말 같은. 근데 그건 리스크가 너무 크지. 들키면 죽어라 혼나니까.”
그는 짐짓 익살스럽게 혀를 굴렸다. 말에 담긴 뼈의 무게와는 다르게.
“우리 같은 이들에게 있어 최후의 수단은 다시 살아나는 거야. 거창하게 망한 상황을 회피하기엔 이만한 것이 없지. 아주 강력한 수단이야. 그런데 최후의 수단이 최후에만 쓰여야하는 이유가 있어. 너도 알겠지? 편하다고 남발하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리스크.”
블래시는 검지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자연히 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두근, 두근. 뛰는 박동.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하는 감각 중 하나.
“점점 인간이 아니게 돼.”
그렇다. 나는 인간으로 살아왔다….
“항상 이걸 잊지 마. 죽음이 편한 도구가 되어선 안 돼. 이건 밀레시안 선배로서 해주는 이야기니까 새겨듣도록 하고. 알겠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엔더도 혼난 아이 위로하듯 나를 달래주었다.
“솔라 씨,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 백분 이해합니다. 그래도, 그럴수록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을 요청하세요. 비록 개인주의자들이 많기야 하지만. 밀레시안들은 거절하지 않을테니까요.”
“…네.”
이 둘이 없었다면 큰일날 뻔 했겠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다들 생을 같이할 가족을 찾는걸까?
무거운 주제가 해결되자 우리는 그제야 밝은 분위기로 내가 생각한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머리를 맞대고 이것저것 얘기한 끝에, 그럭저럭 괜찮은 의견을 골랐다.
그래서 지금 우리 둘은 엔더를 도우갈에게 보내고 알베이 던전으로 다시 들어왔다. 목적은 마우러스와의 만남.
더 정확히는, 마우러스를 글라스 기브넨 소환 전에 몰래 빼돌릴 작정이었다.
마우러스에게 가는 방법을 몇가지 생각해봤는데, 원래 내가 쓰려던 방법은 위험하고 검증되지 않는 방안이었다. 여신상을 부순 다음, 던전의 봉인이 사라져 온전한 마족의 던전이 되면 그곳에서 어떻게든 마우러스를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엔더는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여신상의 목적이 인간들의 보호인만큼, 봉인이 풀리면 던전에 강한 마족들이 나올텐데 그와중에 어떻게 마우러스를 찾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는 반대뿐 아니라 그럴듯한 해결책도 내놓았다.
“엔더가 늦게 나타났던 이유가 이거였군요.”
“응, 네 제안을 듣고 나서 뭘 찾아보겠다고 하긴 했었지.”
내 손에 있는 건 놀랍게도 [ 복수의 서 ] 3권이다. 어떻게 구했나 했더니, 드래곤 유적지의 셰이머스 씨가 가지고 있었다 했다. 엔더가 내 사정을 듣고나서 혹시나 싶어서 찾아봤다고 한다.
도우갈에게 가기 전에 엔더는 이 복수의 서에 특별한 마법적 처리를 해두었는데, 그게 바로 추적 마법이었다.
메모리얼 아이템이 소유자의 강렬한 감정과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소유품에는 소유자의 흔적이 남는다. 특히 복수의 서는 저자의 감정이 극대화 된 상태에서 작성된데다가, 마우러스는 대마법사이기 때문에 그의 마법적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뒤로 마나의 성질, 어쩌고를 이용해서 마법을 걸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원리라 자세한 설명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어쨌든 모로 가도 목적지만 가면 되는 일이다.
복수의 서 3권을 제단에 바치자, 검은 구슬을 바쳤을 때와는 달리 내부가 검지 않은 던전이 생성되었다. 우리는 조심히 살피며 마우러스를 찾았다. 던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마우러스를 찾는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가 있는 곳에 검은 갑옷을 입은 마족이 서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마족과는 달리, 매우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자였다. 우리 둘이 덤벼도 이길 것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쉿.’
그래서 일단 블래시와 나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훔쳐보았다.
“곧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의식이 시작할 때…. 서두르시죠, 마우러스.”
설마 늦었나? 나는 속으로 한탄을 삼켰다. 그러나 마우러스는 선뜻 나서지 않고 가만히 허공을 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닐세. 마음이 심란하여 명상을 좀 하고 갈테니 자네는 먼저 가있으게나. 소환 직전에 내 정신이 흔들린다면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장담 못하니.”
검은 갑옷의 마족은 그런 마우러스를 잠시 보더니 곧 알겠다며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마우러스는 괴로운 표정을 삼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정 이 방법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난? 내 바보같은 행동에 딸아이를 잃어야 했음에도?”
그래,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복수의 최종전 앞에서 눈 먼 자신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때문에 나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였다. 몸을 빼내 괴로워하는 마우러스의 앞에 다가섰다.
“그렇다면 직접 옳은 길을 찾으셔야죠.”
“…자네는? 인간이 어찌 이곳을….”
“저는 글라스 기브넨의 부활을 막으러 왔어요. …타르라크의 부탁으로요.”
뒷말을 덧붙이니 마우러스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에게 간단히 타르라크가 살아있으며, 키홀이 모리안의 행세를 하며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럴수가…. 아니,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네. 타르라크와 마리를 내 눈앞에서 해쳤을 때부터….”
“마우러스. 시간이 없어요.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이 코 앞인 거죠? 얼른 이곳을 탈출하셔야 해요. 글라스 기브넨을 소환하게 된다면, 에린은 불바다가 될 거예요.”
“아니, 그럴수는 없네.”
예상외의 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제 몸까지 불태우는 복수심 대신 세계를 구했던 대마법사다운 이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없어도 키홀은 글라스 기브넨을 소환해낼 걸세. 내 손을 빌린 건 단지 자신의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였을 테지. 차라리 내가 글라스 기브넨을 소환한 뒤, 내 의지로 다시 돌려보내는 방법이 더 나아.”
“그러면 당신이 위험하지 않나? 그 뒤에 어떻게 될 줄 알고?”
듣다못한 블래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우러스는 그의 질문에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내 어께에 묶인 죄는 많다네. 충분히 감수할 생각이야. 자네들도 이제 걱정하지 말고 가보게. 이 땅은 위험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제일 옳은 길이긴 했다. 글라스 기브넨을 쓰러뜨리는 것도 문제니까.
그런 이유로 마우러스는 바로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단언했으니 우리의 진짜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그건 미약하게 남은 마우러스에 대한 연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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