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18화

거룩한 길(4)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알고 있다고 해서 내게 행위의 정당성이 부여될까?

꿈을 꾸고나서 처음으로 생각해본 문제였다. 아마 크게 틀어질 일이 없다면 내가 봤던 장면은 고스란히 재현될 것이다. 팔라딘 수련생들이 그 마족 여자아이를 해칠 가능성은 농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고. 그러므로 미래를 안다는 이유로 비난할 자격은 내게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내가 내일 세상을 멸망시킬 인간이라 누군가 그러면, 그렇다고 해도 그는 나를 죄인이라 할 수 없다. 아직 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고, 누명과 다를바 없이 억울할 테니까.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바로 그런 사태를 내가 막는 것이었다.

사실 저번 훈련에서 이탈한 이후로 크레이그가 내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팔라딘의 대장인만큼 엄격하고 고지식하다. 그에게 나는 영주의 추천장을 뒷배경 삼아 들어와놓곤 마음대로 훈련을 빼먹는 그런 인간부류로 보이겠지.

그러니 아마 또 한번 사건을 벌이면 무슨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 신뢰를 주기 위해 팔라딘에 들어온 건데 이것도 영 쉬운일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문득 붉은 머리의 그 남자를 떠올렸다. 분명 영주를 자신의 동생으로 여기는 태도에 거짓은 없어보였다. 에스라스와도 아는 사이 같았다. 만약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나는 아마 에스라스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도플갱어 따위가 아닌 인간이니까. 확신이 든 이유는 모르겠다. 마족의 기운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면 말이 되려나. 비록 검은 갑옷의 마족과 함께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생각해봤는데, 에스라스 입장에서 리안의 형이라는 존재는 달갑지 않을게 뻔하다. 영주의 대리직으로 섭정하는 그녀에게 건강한 영주의 핏줄이 있다는 건 위협적인 요인이니. 어쩌면 그래서 그를 도플갱어라고 매도한 걸지도.

…이건 너무 억측일까?

아무튼 그 사건을 막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팔라딘을 설득해 마족 여자아이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은 팔라딘에게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고. 둘 중 뭐가 더 낫냐고 하기엔 뭐하지만 후자를 선택하면 난 아마 팔라딘의 뜻과는 반대하게 되고, 여차하면 팔라딘 수련생 전부와 싸워야한다.

왜 싸우는 선택지가 설득보다 쉬운 방법이냐 하면, 인간의 고정관념은 말 몇마디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힘으로 제압하는게 훨씬 간단하긴 하지.

하지만…, 나는 일단 설득해볼 생각이다. 잠시동안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는 면면과 싸우기가 꺼려졌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호하기위해 누군가를 해쳐야한다는 사실은…얼마나 슬픈 모순인가?

나는 그렇게 정했다.

그로부터 얼마후, 팔라딘 실습 임무가 크레이그를 통해 전달되었다. 임무를 받은 훈련생들은 지루하고 불만스러운 낯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게 몇 번씩이나 반복된 임무 내용이라 했다.

“왜 그렇게 바리 던전을 소탕하게 시키는 거죠? 차라리 이멘마하 근처의 룬다 던전이 낫지 않나요? 팔라딘은 이멘마하를 수호하는 기사단이잖아요.”

“사실 소문이긴 한데.”

훈련생 중 한 명인 길로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낮게 속닥거렸다.

“이곳 영주가 바리 던전의 금을 노린다는 말이 있어.”

그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때 센마이 평원에서 보았던 금을 옮기던 광부들. 그 많은 황금의 출처인 던전을 미리 소탕하는게 팔라딘이라는 사실이었다.

팔라딘이라는 집단은 생각보다 더 많이… 썩어있었군. 정확히는 영주 측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말이 더 맞을까. 그들에겐 이제 신념이나 고귀한 정의 따윈 황금을 캐내는데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이러면 원래의 목적인, 팔라딘과의 교류를 통해 마족의 침입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생겼다. 아마 이런 상태라면 내가 뭘 말한다 한들 위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거기! 쓸데없는 잡담은 금지다.”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크레이그가 한차례 지적했다. 덕분에 대화는 끊겼지만 사실 뭘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팔라딘이 되고 난 후 첫 임무인 바리 던전 소탕 임무는 매우 쉬웠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훌륭한 실습지는 아니었다. 코볼트는 이러나 저러나 만만한 적이었으니까.

나는 혹시나 마족 소녀가 보이지 않을까 열심히 살폈지만 등장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바리 던전이라기엔 꿈 속의 던전은 조금 다른 양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바리보다는 역시 마스 던전쪽이 유력한가….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건 연이은 실습 소식이었다. 이번 던전은 마스던전.

이번 실습에 뽑힌 나를 포함한 몇몇 수련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과연, 꿈 속의 구성과 똑같았다. 팔라딘 수련생들은 수가 많고 그만큼 뽑히는 팀의 가짓수도 다양하다. 그러니 이 구성으로 마스던전이라면 이번 임무에서 그 사건이 일어날 게 뻔했다.

그렇게 마스던전이 있는 던바튼으로 향하는 길. 나는 슬며시 동행하는 이들에게 물었다.

“만약 눈 앞의 마족에게 싸우려는 용의가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응? 이상한 질문이네. 마족이라면 본능적으로 인간을 해치려 들지 않을까?”

“하지만 마족도 이성이 있는 존재잖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런 마족도 순식간에 돌변해서 우리를 해칠지 모르니까. 마족을 제거하는건 결국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인간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게 당연했다. 그런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본 수련생은 덧붙여 설명했다.

“이멘마하의 참극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

“네.”

“나도 그 날의 피해자야. 아버지는 기사셨는데, 그 날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아직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울면서 피난처로 향했어. 그동안 마족들이 우리를 가만뒀을 것 같아? 다행히 근위대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기엔 무거운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 사람은 나에게 있는 어떠한 의혹을 꺼뜨리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족들과 우리가 진심으로 소통할 수 없는 한, 나는 싸워야한다고 생각해.”

소통. 그 단어가 크게 와닿았다. 나는 이 말의 모순을 깨달았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마족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이다….

마스던전에 도착한 우리는 특별 발급된 통행증을 제단에 바쳤다. 다들 조금 긴장한 채로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그러던 도중, 한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 아직 작은 체구. 그 아이가 분명했다. 던전에 태평하게 혼자 있는 여자아이를 마족이라 판단한 수련생들은 제각기 검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방패를 들었다.

“아…. 싸우고 싶지 않아요.”

여자아이는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검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정의를 표방한 검 끝이 마족을 해치기 전, 나는 방패로 아이의 앞을 막았다.

“뭐 하는 거지?”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답 밖에 내놓을 수 없어요.”

나는 똑바로 그들의 눈을 응시했다.

“불필요한 피와 고통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는 것.”

수련생 중 리더인 자가 내게 경고했다. 내게 자신이 참극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알려준 이였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다지만, 너는 팔라딘의 정의를 배반했다. 이 사건은 보고될 거고…. 어쩌면 마족의 편을 든 자라고 판명되어 우리와 적이 될 수 있어.”

“그렇다 하더라도요.”

설득은 포기했다. 애초에 경험에 기반하여 쌓아올린 신념을 내가 한 번에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건 오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향해 검을 들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나와 여자아이에게로 쏘아지는 검의 궤도를 방패로 막았다.

“왜 검을 들지 않지? 네 실력이라면 우리 모두를 상대하기 어렵지 않잖아!”

“결국 난 인간이기도 하고…. 구하기 위해 해친다는 건 거꾸로 보면 당신들과 다를바 없으니까요.”

“태평한 소리군.”

그렇게 떵떵거렸지만, 역시 여러명을 상대로 방어만 하기엔 어려웠다. 특히 보호해야할 대상이 있으니 말이다. 방패에는 검날의 흔적이 여럿 새겨지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내구도가 깎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꺄악!”

나는 작은 비명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덕에 팔이 베이고 말았지만, 그래도 여자아이에게 향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좀 아프긴 하지만 이정도면 응급처치 기술로도 쉽게 낫는다. 나는 불안해 하는 아이에게 웃어주고 검을 막은 방패를 밀어붙였다. 수련생들이 우르르 밀려 넘어지면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기다렸던 남자가 도착했다.

“트리아나!”

카테고리
#2차창작
추가태그
#마비노기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