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16화

거룩한 길(2)

“팔라딘이요?”

“네, 팔라딘은 이멘마하를 수호하는 기사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 취지만큼 완벽한 집단은 아니지만…, 어쨌든 미리 접촉한다면 서로 정보를 주고받아 비상 상황에 어느정도 대비가 가능하니까요.”

현명한 타르라크의 조언이라면 마다할리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팔라딘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요청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에게서 이윽고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나왔다.

“팔라딘은 한 때 루에리가 걷고자 했던 길입니다.”

루에리. 사라진 세 전사 중 한 명이자 지금은 행방불명 상태인…,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친구의 이름이 타르라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모르지는 않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루에리가 팔라딘을 포기한 건 정의를 표방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겠지요. 물론 팔라딘이 나쁜 집단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속된 평화는 무인의 칼 끝을 무디게 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루 라바다의 활약도 이제 역사 속 이야기이고….”

“루 라바다?”

“네. 팔라딘의 상징이자 이상적 목표인 인물입니다. 그는 제 2차 모이투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지요. 던바튼에 세워진 유니콘 동상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게 바로 루 라바다가 타고 다니는 유니콘을 본 딴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던바튼 광장 아래에는 유니콘 동상이 하나 있다. 그 앞에서 연주회를 열거나 약속장소로 잡아 만나는 밀레시안들은 종종 있지만 유래에 관해선 아무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름 의미있는 설치물이었구나.

설명은 이멘마하의 역사로 이어졌다.

“이멘마하는 사실 끔찍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한 때 마족들의 침공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그 날의 기억을 사람들은 이멘마하의 참극이라고 부르더군요. …자세한 상황에 대해선 모르지만 그게 한 마족의 아이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마족의 아이 때문에 일어난 참사라니, 나는 그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타르라크는 잘 알지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 때면 타르라크는 크리스텔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을 테니….

“그러니 팔라딘이라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겠네요. 그 때의 고통을 반복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제 말을 쉽게 믿어줄까요?”

“사실 저도 그 부분이 걱정이긴 합니다만…. 아, 솔라 씨가 팔라딘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네?”

타르라크의 제안은 솔직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밀레시안을 기사로 임명할 만한 집단이 있을까? 그것도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단에서.

“괜찮을 겁니다. 실력이 받침된다면 팔라딘이 되는 데에는 출신을 크게 따지지 않는게 규칙이라 들었으니까요.”

별 걸 다 아시네요, 라고 말 할 뻔한 걸 가까스로 감켜냈다. 저 정보의 출처를 따지자면 루에리일 것이 뻔하니까.

그 때쯤 딱 알맞게 잉어 스튜가 다 익었다. 우리는 그릇에 스튜를 퍼 담은 다음 언 손을 녹이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쌀알이 톡톡 씹히는 게 일품인 스튜는 사실 죽이라고 보는 쪽이 더 옳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추위를 막기 딱 좋은 맛이었다.

식사 후, 나는 더 늦지 않게 시드 스넷타를 빠져나왔다. 팔라딘이 되기 위해선 이멘마하로 가야했으나, 사실 난 이멘마하를 가본 적이 없었다. 던바튼에서 오스나사일을 거쳐가기만 해도 되는 가까운 길이었지만 그 오스나사일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스나사일은 깎아지르는 절벽을 자랑하는 좁고 험한 산길이다. 맹수들도 다수 포진해있어 지나가는 여행객을 공격하기로 유명하다. 물론 맹수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다. 그런 좁은 산길에서 긴장한 채로 이동하는게 생각보다 번거로움이 크다는게 이유라면 이유겠지.

물론 돌아가면 센마이 평원으로도 갈 수 있다지만 굳이 그렇게 빙 돌아서 갈 필요를 지금까지는 못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다. 나는 빠르지만 험한 오스나사일과 느리지만 안전한 센마이 평원의 장단점을 따지다가 던바튼의 남쪽으로 내려갔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밤이었고, 밤의 산은 유독 더 혹독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이레흐 언덕은 남으로 가면 반호르, 서로 가면 센마이 평원 입구에 도달한다. 이곳은 오거도 살고 인적이 드물어 천년 묵은 몬스터들이 제법 포진해 있으므로 무기를 손에 든 채로 걸었다.

그리고 세 갈래길에 다다를 쯤, 나는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해서….”

“…가? …야.”

목소리는 점점 크고 분명해져갔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교역을 하는 상인처럼 마차를 끌고 있었지만 짐 마차의 대부분이 커다랗고 새까만 천으로 덮여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길을 밝히는 램프조차 들지 않았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나는 조용히 그들 뒤를 밟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쪽에도 횃불은 없었고, 깜깜한 사방에서 눈이 좋지 않는 한 나무 뒤에 숨은 나를 볼 방법은 없어보였다.

“하아. 이걸로 한동안 바리 던전은 가지 않겠구만.”

“일당이 세도 던전에서 작업하는 건 좀 무섭단 말이지. 실제로 덜 처리한 코볼트들이 기어나오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광부의 대화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애초에 바리 던전은 광산이면서도 던전이기 때문에 일반 광부들이 가기엔 위험하다. 하지만 저들은 아무리 봐도 싸우는 모험가이지도, 그런 모험가를 고용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뉘앙스로 보건데, 누군가가 몬스터를 처리한 뒤 광석을 캐는 모양인데….

역시 괜한 의심이었나? 싶을 찰나.

“아이쿠.”

“이봐, 조심해! 그건 영주성에 납품할 금이니까 허투루 하면 안 된다고!”

큼직한 금광석이 떨어지는 걸 잽싸게 주운 광부가 마차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얼핏봐도 굉장히 많은 양의 금.

영주성에 저만한 금을 납품한다고. 그렇게 사치가 심한 곳인가? 나는 눈쌀을 찌푸린 채로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았다. 듣기로는 꽤 현명한 정치로 번영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여러모로 찝찝함을 안긴 사소한 사건이었다.

그 후 이멘마하에 도착한 나는 제법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던바튼도 번성한 도시긴 했으나 이멘마하는 잘 정돈된 거리며, 건물이며, 온화한 얼굴의 사람들까지…, 이상적인 도시의 표본이었다.

광장에는 쌍둥이 소녀가 꽃을 팔고, 음유시인이 악기를 다듬고 있으며 돈이 넘쳐나는 부자가 거지에게 적선하듯 금화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이멘마하를 둘러보았다.

호수를 낀 물기어린 도시. 이멘마하에 대한 감상이었다. 실제로 흐릿하게 안개가 끼는게 일이라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팔라딘 수련장을 찾아가 보았다. 수련장은 도시의 윗편, 숲사이에 끼어있었다.

일제히 도열한 수련생들이 휘두르는 검날이 은빛 물결처럼 일렁였다. 겉보기엔 멋있어보이는 광경이긴 하지만….

휴식 시간이 되고 훈련을 지도하던 기사 한 명이 사라지자 다들 주저앉아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매번 검 휘두르기만 한다는 점에 불만이 있어보였고, 대부분이 그에 동조했다. 멋있어 보였던 아까의 절도 있는 자세들은 이미 흐트러진지 오래였다.

나는 그들 사이로 끼어들기 위해 살짝 인기척을 내었다.

“아, 외부인은 출입 금지입니다만.”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팔라딘이 되고 싶어서 왔는데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들은 나를 훑어보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밀레시안과 다르지 않게 내 모습은 단련한 이의 뚜렷한 특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확실히 던바튼과 다르게 이곳은 밀레시안이 많지 않은가 보군.

그래도 나름 흥밋거리라 여겼는지 수련생들은 이어진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팔라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무래도, 저희처럼 팔라딘이 되기 위한 수련을 거쳐야 하겠죠.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자격이 안 돼 그 수련조차 받을 수 없을 겁니다.”

“팔라딘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 들었는데.”

내가 의아해하자 수련생을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야 옛날 막 팔라딘 지망생을 끌어모을 때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팔라딘이라는 이름 값어치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죠. 큰 공을 세워 입지를 다지거나, 애초부터 신분이 뚜렷한 자들만 팔라딘의 이름을 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에리의 성격은 내가 잘 모르겠지만, 그가 팔라딘이 되고자 한 의지를 꺾은 데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 신념과 힘만으로는 아무리 고강해도 팔라딘이 될 수 없다니. 그거야말로 팔라딘이 세워진 목적의 빛을 바래는 장애물이었다.

나는 수련생들과의 대화를 끝내고 해결 방안을 강구하다 정신적인 피로함을 느끼며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머리 굴리는 건 여러모로 쥐약이었다.

광장은 여전히 아까와 다르지 않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꽃을 팔던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꽃 사실래요?”

나는 고운 손에 들린 장미 한 송이를 기꺼이 받고 대금을 치뤘다. 그녀는 자신을 델, 동생을 델렌이라 소개하며 내게 말을 붙여왔다.

“여기 처음 오신 분인가봐요?”

“네, 이멘마하는 처음이에요.”

“어머, 어쩐지…. 어떤가요, 물의 도시는?”

“무척 좋아요. 조용하고…, 그럼에도 활기차고.”

델은 눈가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무척 예쁜 웃음이었다.

“아차, 저는 솔라예요. 밀레시안이고요.”

“아! 밀레시안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어요. 그나저나 솔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렇게 고민하던 델은 곧 깨달음에 손뼉을 마주쳤다.

“당신, 가끔 기사님들이 말하곤 하던 그 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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