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거룩한 길(5)
이로써 묘한 대치상태가 되었다.
남자는 마족 여자아이, 그러니까 트리아나를 뒤로 물리고 나와 팔라딘을 경계했다. 그덕에 나는 그 사이에 껴서 두 쪽을 견제하느라 눈을 굴려야했고. 팔라딘 측은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꿈 속에서처럼 당황했다.
“영주님과 똑같은 얼굴…! 도플갱어인가!”
남자는 그런 팔라딘을 보곤 코웃음을 치더니 내게 물었다.
“내가 본 게 맞다면 네가 트리아나를 보호한 건가? …저쪽과 같은 소속으로 보이는데.”
그가 가르킨 건 팔라딘 수련생들을 위해 지급된 무기였다. 자로 잰듯 똑같이 찍어낸 무기에는 팔라딘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네, 그게 맞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어째서? 마족이라는 걸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나는 마족이라는 단어에 눈동자가 흔들린 트리아나를 보았다. 그리곤 남자와 눈을 마주치곤 단호히 답했다.
“지금 당신이 그 아이를 구한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르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또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면 그녀 또한 나처럼 행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글라스 기브넨을 쓰러뜨리기 위해 했던 여정은 그만한 연민과 의지가 아니라면 행하지 못했을 일이니까.
그땐 급한 마음에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마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공격받는 트리아나를 보면서 동조하지 않은 점, 그 후의 남자와의 전투에서 힘을 다하지 않은 점. 그리고 무엇보다 르나의 시선은 싸우면서도 간간이 트리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부덕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양.
그래서 꿈을 이어받은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물론 이 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뿐이고, 이유를 대라면 역시 이쪽이 낫겠지.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고.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이번에는 에스라스가 나타났다. 그녀의 곁에는 리안 영주도 함께였다. 꿈에서 봤던 장면처럼 남자가 리안을 부르고, 에스라스가 남자를 마족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마족 주제에 인간인 척 하는군. 뭣들 하느냐! 놈을 죽여라!”
나는 그가 병사와 싸우는 틈을 타 트리아나에게 다가오는 에스라스의 앞을 막아섰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오호…. 당신은 얼마 전에 팔라딘이 되고자 영주성을 방문했던 자군요.”
이채를 띈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훑더니, 돌연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팔라딘의 정의에 먹칠을 하다니, 이건 영주님, 더 나아가 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자도 같이 구속하라!”
더이상 방패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검을 꺼냈다. 달려드는 사람들을 등으로 쳐내고 슬쩍 남자를 보았다. 그는 조금 힘겨워 보였지만, 그건 무력의 약함이 아닌 복합적인 문제로 보였다.
승산은 있다. 하지만 어렵다.
우리 둘이었다면 가볍게 낙승이지만 트리아나를 보호하느라 신경을 써야했다.
이러다가 그 마족이 올 텐데….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인벤토리에서 여신의 날개를 꺼내 트리아나에게 건네었다.
“이걸 쓰면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우린 걱정 말고 나가서 기다리세요!”
그러나 아이템을 받은 트리아나는 내 설명에도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해요. 저는, 저는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그랬다간….”
“그건 안 될 일이지. 또 다시 그 날이 되풀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모르간트!”
늦었군. 끼어든 목소리는 역시 그 때의 마족이다. 저 자의 이름이 모르간트인가? 검은 투구로 가려졌지만 그는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외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내 말을 듣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묻겠다. 루에리…, 인간의 정이란 저런 것이다. 에스라스의 정체도 봤을 것이다. …더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가? 자, 트리아나와 함께 돌아가자.”
나는 익숙한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모르간트는 그 사이 저벅저벅 걸어와 내 시야를 트리아나로부터 분리시켰다. 어쩌면 투구 속 눈이 나에게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겐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듯 행동은 철저했다.
“저들을 벌할 수 있는 시간은 곧 온다. 그때 네게 부족함 없는 힘을 주겠다.”
모두가 모르간트란 자에게 압도당해 얼어붙어있는 사이, 그들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루에리…, 그래. 루에리가 내게 손을 뻗으려 했으나 모르간트는 틈을 주지 않았다.
경직된 상황이 풀리자마자 나는 여신의 날개를 사용해 벗어나려 했으나 에스라스가 그보다 빠르게 나를 저지했다. 재상이라면서 힘이 생각보다 셌다. 방심했어….
순식간에 무릎 꿇려진 나는 에스라스를 올려다 보았다. 이제는 보인다. 번들거리는 욕망으로 가득찬 두 은색 눈동자가.
그녀는 저번처럼 우아하고 총명한 재상의 모습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할 얘기가 많아 보이는군요…. 솔라 경. 아니, 이제 경이라고 붙일 이유가 없지.”
* * *
나는 이멘마하 성 지하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배신자의 말로치고는 꽤 괜찮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 때 글라스 기브넨을 막았다는 공때문일까. 아니, 그건 솔직히 유치한 착각이었다.
에스라스는 내가 지하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찾아왔다.
“역시 밀레시안이라 그런가, 이 정도로는 눈빛이 죽지 않는군.”
오만한 미소를 빼어물고 에스라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죽지도 않아, 그렇다고 고문해서 망가뜨리기엔 여신의 존재가 성가셔.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목적이 있으면 그냥 말해요.”
사흘만에 나온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있었다. 사실 그만큼 몸이 지쳐있긴 했다. 내 말에 에스라스는 정답을 맞춘 아이를 보는 선생님처럼 빙그레 웃고는 의자에 앉았다.
“밀레시안 솔라. 난 네가 이대로 묻어버리기엔…꽤 아까운 존재라고 생각해. 그래서 하는 제안인데.”
“….”
“내 심부름꾼을 도맡아 해준다면 팔라딘으로써의 명예를 그대로 돌려줄 수 있지. 물론 목숨도. 아, 이건 밀레시안이라 딱히 상관없을까?”
나는 눈을 찌푸렸다. 정말 내키지 않는 제안이다. 에스라스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루에리의 존재로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루에리는 인간이다. 그것도 여신을 구하겠다는 사명만으로 여행을 떠난 인간.
그런 그라면 리안이 동생이라는 말도 사실일 것이다. 비록 나는 루에리와 교류를 하진 않았지만 그의 친구인 타르라크는 루에리를 굳게 믿고 있다. 그런 타르라크를 내가 의지하고 있고.
사람을 거짓으로 몰아붙이는 이유야 뭐겠는가?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아마 에스라스가 건네는 제안 또한 그런 류일 것이다. 구린 일에 양껏 쓰다가 버리는 패. 그녀에게 내 존재란 그런 정도의 가치일 뿐이다.
내 험악해진 눈빛만으로도 그 마음을 짐작했는지, 에스라스가 돌연 내 머리카락을 쥐어 거칠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불경하다, 불경해…. 그 눈이 마치 나를 모욕하고 있는 듯 해!”
밀려오는 고통에 작게 신음을 냈지만 에스라스는 그럼에도 끔찍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 감옥에서 내내 그런 낯이었다. 자신의 우위를 아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얼굴.
“아직 때가 아닌가 보네. 아쉽지만 이만 가도록 하지.”
에스라스는 간수장을 부르곤 올 때처럼 훅 사라졌다.
남겨진 나는 차가운 성벽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잘못 걸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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