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20화

거룩한 길(6)

감옥에 얼마나 더 갇혀 있었을까. 창이 없는 지하는 시간 개념도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일주일이 흘렀을 수도 있고 단지 하루만이 지나갔을 수도 있다.

톡톡,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철창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횃불이 아른거리며 빛과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극명한 대비를 뒤집어쓴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그 밀레시안인가?”

조용한 목소리라고 하기엔 더 작고 비밀스러운 음량은,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태도였다. 나도 그에 맞춰 목소리를 죽였다.

“제 이름은 솔라예요. 당신이 찾는 밀레시안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는 듯 하군. 나는 라오크라고 하네. 이멘마하 성의 시종장이지.”

시종장이 나한테 무슨 볼 일일까. 내 의문을 알고 있는 듯 더 소리를 죽여 라오크가 속삭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 에스라스의 모략을 캐고 있는 잠입자 중 한 사람이다. 네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해서 찾아왔지. 우리와 협력하지 않겠나? 그러면 이 감옥에서 꺼내주지.”

“조심성이 없네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외부의 협력자에게서 네 신용을 듣고 판단한 일이다. 그보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협력은 하겠나?”

“…네. 지금으로썬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까요.”

그는 열쇠를 꺼냈다. 열쇠가 자물쇠를 따자 감옥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라오크는 나를 구속한 모든 쇠사슬을 풀었다.

“자, 끔찍하게도 옭아맨걸 보니 에스라스도 밀레시안의 능력을 경계하긴 했나보군.”

“감사해요. 사실 환생을 이용해 도망가려했는데 감옥 문을 안 들키게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거든요.”

“환생? 아, 밀레시안들의 능력을 말하는 거로군. 그보다 이걸 받아라.”

라오크가 내게 준 건 사제들이 입을 법한 로브였다. 나는 그걸 걸치고 머리에 가발을 썼다. 이정도면 나임을 알 사람을 없을 것이다.

라오크는 내게 해야할 일을 알려주었다. 성의 지하에는 감옥뿐 아니라 에스라스의 실험실이 있는데 거기서 이루어지는 실험 약물을 표본으로 챙겨 성 바깥으로 나가는게 1차 목표, 그리고 2차로 일러주는 접선장소에서 외부의 협력자에게 그걸 넘기는게 2차 목표.

“그동안 나는 다른 내부협력자들을 찾아보겠어. 요즘 눈치를 챘는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거든.”

나는 그 말에 라오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처음 만난 나를 걱정하는건가? 당신이 해야할 일이 더 위험할 걸 알 텐데도? …역시 그렇군. 하지만 난 죽을 생각이 없어. 내겐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거든.”

딱딱한 얼굴이 조금 풀어진 채로 라오크는 미약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경계하던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지하감옥의 입구에는 경비병이 잠들어있었다. 라오크의 솜씨일게 분명했다. 그는 이쯤에서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여기서 각자 갈 길을 가도록 하는 걸로.”

“네.”

난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부디 조심하세요.”

라오크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보면 이 작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이후 나는 그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중간중간 경비병을 만나긴 했지만 의외로 의심없이 나를 지나쳤다.

그러나 에스라스의 실험실 앞 쪽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대신 마법이 걸린 보안 장치가 있었다. 이 보안 장치의 비밀도 라오크가 알려줬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가발과 사제복을 집어넣고 주위를 살폈다. 실험실 내부는 결벽적으로 깔끔했으나 어딘지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중간의 탁자에는 커다란 포션제조 키트가 있었는데 담겨있는 약물은 피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나는 그것을 약병에 조금 담아 인벤토리에 넣고 그 주변의 보고서를 빠르게 읽었다.

마리오네트 포션. 요약하자면 이것의 용도는 …, 사람의 의지를 빼앗아 조종하는 것.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리안 영주는 에스라스의 꼭두각시로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이니.

‘역시 뭔가 이상했어.’

아무 말 없이 인형처럼 축 늘어져 생기를 잃은 리안 영주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에스라스의 섭정기간을 계산해보면 이런 강력한 포션을 그 긴 세월동안 마셨다는 뜻이니, 어쩌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 때였다.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보고서를 원래 자리에 놓고 빠르게 숨었다.

끼이익.

문 소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에스라스였다. 그녀는 영민한 재상의 얼굴을 벗어 던진 냉정하고 잔혹한 본모습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원하는 게 이루어진다.”

홀로 중얼거린 에스라스는 익숙하게 실험실 내부를 돌아다니며 작업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마리오네트 포션을 만드는 키트에 닿았다.

“흐음….”

고운 손가락이 키트와 보고서 근처를 훑었다. 에스라스의 한쪽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하하하…. 쥐새끼가 흘러들어왔군.”

…내 흔적을 들켰다. 하지만 에스라스는 그것이 나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포션을 약병에 따라 넣고 그걸 챙겨 실험실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나는 숨던 자리에서 나와 보고서를 챙기고 여신의 날개를 꺼냈다.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성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구나.

안심하던 찰나.

“역시 너였어.”

“…!!”

에스라스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 즉시 빠르게 회피해 공격을 피하지 않았으면 에스라스의 마법에 당했을 것이다. 내가 피한 자리는 전격 마법에 직격 당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깜찍하게 뒤통수를 치다니…, 내가 우스운가 보구나. 너도, 그 자도 말이야.”

“그 자?”

“널 풀어준 바보 같은 놈 말이야. 아마 지금쯤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겠지. 물론 이제 내가 편하게 해줄 테지만 말이야….”

에스라스가 마리오네트 포션을 흔들었다. 찰랑이는 붉은 물이 에스라스를 한층 더 요사스럽게 만들었다.

“닥쳐….”

“그런 험한 소리도 할 수 있었군?”

나는 에스라스를 노려보며 검을 꺼냈다. 사실 도망가는 것이 제일 최선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분노가 이성적인 판단을 멀리 미루었다.

“사람을… 그렇게 우습게 보지마!”

내 검이 에스라스를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에스라스의 손 끝에서 나온 마법이 내 몸을 감쌌다. 검으로 갈라 피하려했으나 찐득하게 달라붙은 검은 기운은 격통이 되어 몸을 덮쳐왔다.

“윽!”

입에서 울컥, 피가 새어나왔다. 고통에 저항하여 무릎을 꿇지 않는게 할 수 있는 일의 다였다. 이건…, 분명 흑마법이다. 엔더가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드루이드들 사이에서 인륜적인 문제로 금지된 악한 마법.

“바보 같기는. 글라스 기브넨도 쓰러뜨린 그런 강한 힘을 가지고도 나약한 생각에나 빠져 있으니 그러는 거야.”

에스라스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여전히 온 몸의 신경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입을 열어 그 에스라스의 논리에 반박했다.

“나약한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꺾여나갔을 거야…. 당신이야말로 편의를 위해 생각을 멈추지 않았어? 애초에 흑마법이 단지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학문이었다면 당신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겠지.”

“…말이 많군!”

매서운 발길질이 내 배를 가격했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여전히 손에 잡혀있는 걸 확인하고 에스라스에게 고했다.

“그 사람을 미끼로 날 자극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 했겠지만, 틀렸어. 나한텐 꼭 해내야 할 임무가 있거든.”

“…뭐라고?”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내가 빛을 볼 수 있도록….

손에 들린 여신의 날개는 내 바람을 들어줬다. 내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건 에스라스의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허억.”

나는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아직 눈 앞이 흐릿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흑마법의 뒤늦은 후유증 같았다.

그보다, 여긴 어디지?

“좀 괜찮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붉은 색이었다.

“당신은….”

“소개는 나중에 하고 좀 자도록 해라. 몸이 많이 망가졌으니까.”

딱딱한 말투 속 조금 다정한 듯한 목소리는 이유 모를 안도감을 들게 했다. 나는 그 말에 맞춰 도로 누워 눈을 감았다.

사실 이럴 시간이 없다. 라오크가 일러준대로…. 해야 하는데. 접선장소에 가서 에스라스의 모략을 밝히고, 그녀의 잘못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어째선지 눈물이 눈에 맺혔다. 잠깐 본 사람인데, 나로 인해 죽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텅 빈 듯 공허했다. 마우러스가 죽었을 때에도 눈물보단 허전한 감정이 다였는데.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용히 울고 있는 날 보고 있을 루에리는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해받지 않고 계속, 하염없이 울었다.

왜 사람은 이렇게 쉽게 죽는 걸까….

왜, 왜 이토록 죽음은 허무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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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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