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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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훈이 공포에 질린 채 이도저도 못하는 그 때 공포의 원인인 강군은 메디큐브로 후송되자마자 자신에게 달려온 고반방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치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강군에게 고반장은 친부보다 더 아버지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존재였다.

현장에서 고반장은 사사건건 잔소리에 구박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을 강군은 이번 지진으로 인해 확실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그 탓에 강군은 투덜대면서도 자신에게 안전모를 건네줬던 고반장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타인의 무사함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반장이 그 와중에 자신이 씌워준 안전모를 잘 쓰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강군에게 칭찬을 하는 것이 평소라면 귀찮았겠지만 지금의 강군은 그 말도 기껍게 들렸다.

그리고 고반장이 잠시 볼일을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그때서야 강군은 공포에 질린 치훈을 발견했고 그 순간 웃고 있던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그때 자신을 구해줬던 의사인 윤슬의 말이 머리 속을 지나갔지만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원망할 이라고는 저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고반장을 만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로 결심한 강군은 공포에 질린 치훈에게 절뚝이면서 다가갔고 자신의 한걸음 한걸음마다 더욱 움츠리는 치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당신, 아까 도망쳤던 그 의사죠?"

"…."

치훈이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자 강군은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나, 당신한테 아무 말도 안 할거예요. 그니까, 당신도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마요. 사과도 하지 말고, 용서 구하지도 마요."

"…."

"그니까 당신도 정신차리라고요. 전혀 의사로 안 보이니까."

"……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사과도 용서도 받지 않는다고 한 강군의 말에 치훈은 고개를 푹 숙일 뿐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강군은 그런 치훈을 뒤로 하고 다시금 베드로 돌아가 지친 몸을 눕혔다.

그 의사 말대로 치훈은 자신과 같은 공포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자신과 달리 악의라고는 단 하나도 모르는 듯한 사람이었다.

인생에 절망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자신과 절망이라고는 하나도 모른 채 살아온 듯한 치훈의 차이에 강군은 그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공포에 떠는 그 모습이 마치 옛날 어릴 적 술먹은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공포에 질려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어떠한 원망도 할 수 없었다.

그딴 인간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어릴 적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는 그 방법을 몰랐지만 고반장과 같은 이들을 통해 그 방법을 찾아가는 듯했다.

가던 길이 무너져 갈 길을 잃은 이와, 갈 길을 몰라 방황하다가 길을 찾은 이는 그렇게 밤을 맞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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