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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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러한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에게 당황이라는 감정을 안겨줄 수 없기에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뜬 나는 때마침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몸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배달기사분이 봉투를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고는 문을 닫았다. 비빔밥을 2인분 시킨 것 치고는 묵직한 느낌에 의아해하면서 주방 쪽 아일랜드 식탁 위에 봉투를 올려둔 나는 가위와 수저를 챙기기 위해 움직이면서 말했다.

"제가 바닥에 오래 앉는 게 힘들어서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아일랜드 식탁에는 2개의 의자만 있었는데 그 덕분에 둘 다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봉투 안에 들어있던 포장용기들을 하나하나 풀던 나는 속으로 이걸 다 못 먹으면 다 음식물 쓰레기가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 그 푸짐한 양이 부담 되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 표정이 이상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익숙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니라 답한 나는 드시라는 말을 하고는 수저를 집어들었다.

이후 내 걱정은 유시진씨가 먹는 양에 의해 기우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많이 먹던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로 제대로 일 인분이라고 정해진 양들을 제대로 해치워 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이런 배달 음식은 피하게 됐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걱정없이 먹고 나니까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물론 한 그릇을 비웠던 나는 이후 더부룩함에 소화제를 챙겨먹어야 했지만 그 조차도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새삼 사람의 온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 생각에 나 자신을 비웃으며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문득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료 진료도 해주고 밥도 사준 게 나라면서 먹었던 용기와 수저의 설거지를 본인이 하겠다는 것을 말리지 못한 탓에 주방에 서게 된 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집으로 오고 나서는 누군가를 집에 초대한 적이 없다보니 이렇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는 이 순간이 생소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상태가 괜찮은 것인지 그 조차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군인이고, 과거의 나와 같은 특전사라 할지라도.

그렇게 조용하게 평온한 일상의 소리에 나는 문득 피로했던 것인지 그대로 쇼파에서 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타인이 집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놓고 자버렸다는 점에서 깨어난 나는 놀람과 충격을 담아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깨어난 위치가 침실이라는 점에서 두 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이 말은 내가 그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동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리였으니까.

숨을 깊게 내뱉으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하던 나는 저릿저릿 해져오는 팔다리를 느리게 움직이면서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집 안이 고요한 것을 보니 그가 돌아갔거나 그도 조용히 내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방문을 나옴과 동시에 비어버린 집 안의 모습에 그가 돌아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나는 한 쪽 다리가 꺽여서 몸이 무너졌지만 그대로 바닥에 앉아버리는 것으로 몸을 틀었다. 등을 벽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쉬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족사진을 바라봤다.

군인이심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복을 입으시고 찍었던 일반적인 가정같은 그 가족사진 속에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나와 첫째인 누나와 둘째이면서 셋째이기도 한 쌍둥이 형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막내동생도 있었고.

아버지는 특전사의 꿈을 가지게 해주었던 분으로 특수전 사령부 사령관이셨다가 은퇴하신지 꽤 되셨지만 군 내에서 아버지의 존함을 모르는 분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군의관으로서 장교가 되셨지만 대테러부대의 납치인질극의 희생양으로서 붙잡히셨다가 큰 부상을 입으신 이후 의병 전역을 하셨다.

그런 부모님의 삶이 마무리 되기 전 태어났던 우리들 중 첫째인 누나는 자신의 꿈을 펼치겠다면서 디자이너가 되었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로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둘째이면서 셋째인 쌍둥이 형들은 아버지처럼 특전사의 길을 걸었지만 소령이라는 자리를 끝으로 군복을 벗고 지금은 경호업체를 꾸려서 운영중이라고 들었다.

막내동생은 누나가 디자이너가 되고 초반에 디자인 도용 등으로 힘들어 했던 걸 보고 변호사가 되어서 지금은 형들이 운영 중인 경호업체 전속으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머니의 반대에 의사로서의 길을 걸었지만 결국 어머니를 설득해 전문의가 된 이후 바로 군에 들어가 특전사로 지원을 했었다.

처음엔 불가했던 일이었지만 이례적인 케이스로 군의관이자 특전사로서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조건으로 특전사의 훈련을 따를 수 없다면 본래의 보직으로 돌아갔다는 사항을 내밀었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최전방에서 내 실력을 갈고 닦아 정식으로 팀에 발령받을 수 있었다.

그 팀의 이름이 바로 람다였다.

내가 팀장인 그와 같은 직급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반할 생각도, 그의 명령에 불복한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물들어갔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 과거를 떠올리다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려서 불편하긴 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액자 앞까지 걸어가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액자를 집어들어서 뒤로 돌린 다음 잠금 장치를 풀어낸 나는 뒷판으로 인해 가려져 있던 사진 하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구겨지고 일부는 울어버린 그 사진은 결코 깨끗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 만큼은 멀쩡했기에 놓을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 눈가에 고이는 눈물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인 나는 한동안 그렇게 서있다가 천천히 두 눈을 뜨고 천천히 뒷판으로 사진을 덮은 뒤 잠금 장치를 채웠다.

아직까지는 웃으면서 그들을 얼굴을 볼 수 없는 내 상태에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액자를 본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래,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제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잘 하고 있습니까?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내뱉으며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이후 멍하니 침묵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그가 남기고 간 쪽지에 대해서는 볼 수 없었다. 다시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 주무시길래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상처 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유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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