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05

01. 의료봉사

-out

모연이 방송에서 해박한 의료지식들을 말하는 그 시각 윤슬은 오랜만에 평온한 기색으로 로비에 앉아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윤슬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느리게 휴대폰을 꺼내들어 화면을 본 윤슬은 망설임없이 통화버튼을 터치했고 그러자 낭랑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무슨 일이야?"

-"어? 받았다! 오빠 오늘 저녁에 식사 약속 있는거 잊으면 안 돼!! "

"응, 안 잊었어. 응급만 안 터지면 안 늦을거야."

-"응급 터지면 늦게라도 와…. 오늘 별하랑, 가은이 언니, 그리고 기찬이 오빠도 오기로 했단 말이야."

"걱정하지마."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윤슬의 얼굴은 행복이 가득해보여서 그를 아는 이라면 놀랄 만한 광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주변에는 그를 모르는 이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아프지 말고!"

"응 별아 너도."

-"난 언제나 건강하다고~"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말이 진심임을 아는 윤슬은 그저 웃으면서 통화를 마무리하고는 그 후로 방송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in

그 날 연락 이후로 김은지 교수에 대한 의료사고와 비리들을 까발리고 별아가 그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당당하게 방송에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강선생님을 보면서 작은 충족감을 느꼈다.

강선생님은 어느새 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내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의 성공은 언제봐도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다.

수술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가족들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고 김은지 교수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나의 일상에는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나는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도망치는 중이며, 아직 내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한쌤! 강쌤 오셨어요!"

당직실에서 쉬고 있던 나는 최선생님의 부름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고 최선생님께 이끌려서 도착한 곳에는 강선생님이 샌드위치를 들고 왔는지 샌드위치가 가득 있었다.

그리고 정작 그 샌드위치를 가져온 것이 분명한 강선생님은 김은지 선생과 말타툼을 하고 있었다.

"지금 뭐하십니까?"

강 선생님께 손을 휘두르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김은지 선생의 손목을 붙잡아서 저지한 나는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고 그런 나의 행동에 그곳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들을 무시한 채로 가만히 김은지 선생을 쳐다봤고 그녀는 곧 내가 붙잡고 있던 손목을 뿌리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한쌤 어디있다가 온거예요? 찾았는데."

"아, 당직실에 누워있었습니다."

강선생님의 말에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미소를 지은 채 말했고 그런 나의 태도에 긴장감으로 굳어있던 분위기가 풀리더니 장난끼가 묻어있는 송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없으니까 한쌤이 이제 수술실에서 산다 살어."

"정말, 그러지 말라니까… 진짜 수술실에서 사는 건 아니죠?"

걱정으로 물든 강선생님의 눈을 마주한 나는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했고 그런 나의 행동에 강선생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거면 그냥 다시 여기로 복귀할까요."

"아니, 굳이 노력해서 교수 자리에 앉았는데 왜 다시 내려오려고 하십니까."

"제가 분명 특진병동으로 이동하기 전에 말했잖아요. 한쌤 무리하면 다시 돌아올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요. 잊은 겁니까?"

강선생님의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선배한테 확인할거니까 거짓말은 하지마요. 선배 꼭 이 사람 무리하는 거 같으면 연락주세요."

"그래, 그래. 그럼 이제 매일 연락하면 되는건가?"

"에이- 송선생님 그러지 마시지 말입니다."

"선배의 고삐를 잡을 인간이 누굴지 궁금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교수가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장난끼가 담긴 송선생님의 말에 황당해 하는 나와 달리 공감하는 듯한 주변 이들의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자, 그럼 모두들 동의한 걸로 알고 저는 이만 가봅니다. 꼭 연락주세요."

"네~"

"조심히 가세요-"

"잘 가 강교수~"

"조심히 가세요. 강선생님."

강선생님이 가신 이후 나는 익숙한 잔소리들을 귓가에 흘려들으면서 하선생님이 쥐어준 샌드위치를 입에 가져다 넣었고 다 먹을 즈음 울리는 진동음에 휴대폰을 꺼내들어 이름을 확인하고 말문을 열었다.

"저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급한 환자 있으면 콜 주세요."

그 말을 한 나는 다른 이들의 인사를 뒤로 한 채로 아직도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올려 통화버튼을 눌렀다.

-"윤슬아 바쁘니?"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다행이다. 중요한 건 아닌데 이번에 해성병원에서 봉사일정이 하나 생길거야. 거기에 혹시 참여할건가 싶어서…."

"…누나 거기에 뭔가 있는거야?"

사람이 드문 곳으로 온 나는 나지막하게 답하면서도 해성병원에서 갈만한 봉사일정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귓가로 들어오는 내용에 멈칫 했다.

-"우르크라고 발칸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곳에 해성그룹 태양발전소 설립 중이라 이번에 우르크 쪽으로 의료봉사단을 보낼 예정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우르크에는 지금 한국군이 파병 가있어. 그래서 아마 가게 된다면 한국군과 마찰이 있을 확률이 높아."

"누나는 내가 군인들과 안 만났으면 하는거야?"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한 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누나의 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우리는 군인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집안이지만, 너만큼은 멀어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우리는 너까지 잃고 싶지 않으니까."

"…누나. 그 얘기는 그만 하자."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만 할게. 근데, 이건 약속해주라."

"어떤 걸?"

-"아프지마. 다치지마. 그리고, 죽지마…. 네가 어디있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괜찮으니까."

"…약속할게."

-"그래. 그리고 만약 가게 된다면 연락은 해주라. 기찬이 녀석도 걱정하더라."

"알겠어."

우리 집안에서 무뚝뚝한 인간을 꼽자면 형 다음으로 아버지라고 할 정도인데 형이 걱정할 정도라면 그 일이 가족들에게는 걱정이 되는 사항이라는 건 맞는 듯 싶었다.

우르크, 한국군.

나는 아직, 과거와 마주할 자신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나의 얼굴이 일그러졌음을 창문에 흐릿하게 비치는 걸로 확인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방금 먹은 샌드위치가 다시 위로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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