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04
-out
콜을 받고 응급실에 도착한 윤슬은 모연이 보호자로 추정되는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고 환자로 추정되는 여자는 호흡을 어려워하는 채로 침대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쪽으로 향했다.
"지금 산소공급 안하면 이 환자 죽습니다!"
"내가 동의를 안하겠다는데 네가 뭐라고 하겠다 말겠다야!!!"
"저는 의사고, 지금 환자가 눈 앞에 있는데 치료를 하지 말라는 건 환자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내가 동의하지 않겠다니까 무슨 상관이냐고!!"
모연의 멱살을 잡으려 드는 보호자분을 저지하고 그 앞에 선 윤슬은 나지막하게 그와 눈을 마주하면서 물었다.
"보호자분은 지금 환자분의 연명거부권을 행사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연명거부권인지 뭔지에 싸인할테니까 내버려두라고!"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법적으로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치료할 수 없었고, 이렇게 살릴 수 있는 환자도 죽어가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연도 그런 현실에 마주하고 만 것이었다.
환자는 결국 뇌사상태에 빠졌고, 모연이 실의에 빠진 그 순간 윤슬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이번 교수 임용 합격자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은지.
그 이름은 해성병원 의사들이라면 꼭 한번 듣게 되는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을 듣게 되는 경로는 모두 달랐지만 가장 유면한 것은 해성병원 대주주의 딸, 그 다음이 의료사고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의료사고로 인해 잘 알고 있는 윤슬은 그런 인물이 교수 임용에 합격하고 자신의 동료 중 한명인 강모연이 떨어졌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디론가 달려간 모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던 윤슬은 한 쪽에서 모연을 본 것인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익숙한 세 명을 보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의사는 실력이죠."
"누가 그래. 실력은 실력이 없어요~. 의사는 재력이지, 그 다음은 체력이고."
"그래서, 지금 잘 됐다고?"
"잘못됐단 얘기를 이렇게 하는거지, 나는."
세 사람에게로 다가간 윤슬은 그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닿았고 이을 악문 것 같은 억눌린 말투로 말하는 자애의 말에 상현이 변명하는 것처럼 후루룩 답하는 것까지 들은 윤슬은 그제서야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강선생님이 어디로 가신지 아십니까?"
"아, 한선생님. 안녕하세요."
해성병원에서 근무한지는 아직 2년이 채 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실력으로 모두의 인정을 받고 경력으로 따지면 교수급인 윤슬의 등장에 자애는 한걸음 물러서면서 인사를 했다.
또한 바로 옆에 서있던 치훈은 윤슬에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나 윤슬이 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으며 홍삼액을 물고 있던 상현은 들고있던 홍삼을 내려서 윤슬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물론 이들의 행동에 윤슬은 여전히 불편해 했지만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이들이기에 결국 포기한 기색으로 그저 자신이 물은 말에 대한 대답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강선생이라면 아마 외과장실 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가보실려고요?"
"…죄송하지만 제가 외과장실이 어딘지 몰라서 안내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언제나 동료들을 대할 때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윤슬이었지만 지금의 윤슬에게서는 단 한점의 미소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시선 또한 그들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상현과 자애는 알겠다고 답했고 함께 있던 치훈은 얼떨결에 그 무리에 합류해서 외과장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외과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무표정이던 윤슬의 얼굴은 외과장실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있는 두 인형을 보고 와그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순간 구겨졌고 그에 후다닥 두사람에 달려간 치훈과 자애가 두사람을 뜯어말렸고 상현은 버럭 소리치면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떨어지자 윤슬은 외과장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엉망인 두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자료파일을 보고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런 윤슬의 행동은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는 것인지 김은지는 모연을 째려보고는 휙하고 외과장실을 나가버렸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짧게 쳐다본 윤슬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세사람에게 이만 가보라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치훈은 상현의 떠밈에 밀리듯이 외과장실을 나갔고 자애는 상현의 손에 이끌리듯이 상현과 외과장실을 나가버렸다.
"…강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아뇨. 안 괜찮은 것 같아요."
눈물로 가득한 모연의 눈을 본 윤슬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엉망이 된 모연의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주고는 그녀의 옆에 떨어져 있던 가방까지 주워서 모연과 함께 외과장실을 나왔다.
"표선생님 사무실로 갑시다. 거기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윤슬의 말에 답하지 못한 모연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윤슬의 안내에 따랐고 다행히 아직 사무실에 있던 지수에게 간단하게 설명한 윤슬은 아까 주웠던 파일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모연에게 물었다.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흐그, 끕, 내일, 방송 흐어엉-"
"…"
무언가 말하려했던 모연이 왈칵 울음을 쏟는 것에 지수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윤슬은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다리를 굽혀 의자에 앉은 모연과 시선을 맞추려 했다.
"강선생님. 이거 내일 방송에서 쓸 자료라면 완벽하게 해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강선생님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믿어도 됩니다."
"흐윽, 선배…."
"내가 아는 강모연은 이런 걸로 무너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강요는 아니지만 나는 강선생님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선배~ 흐어어엉…."
자신에게 안겨오는 모연의 등을 토닥이면서 진정시키던 윤슬은 모연이 조금 진정했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수는 그런 윤슬에게 이만 가보라는 말을 건넸다.
"그럼 강선생님 잘 부탁하겠습니다."
"예, 한쌤도 이만 가서 쉬세요."
"네."
윤슬이 가고 나서 진정한 모연은 이를 악물고 자료를 외우기 시작했고 그런 모연의 곁을 지수가 지켰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선 윤슬은 당직실로 들어오자마자 짐 한구석에 놓여있던 폴더폰을 꺼내더니 전원을 켰고 전원이 켜진 폰의 화면은 가장 기본적인 배경화면으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떴다.
저장된 번호가 없는 것인지 번호를 찾는 행위 하나 없이 숫자를 누른 윤슬은 곧 전화번호 하나가 완성되자 통화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전화를 걸었고 그가 귓가에 폰을 가져다 대자 단조로운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금방 뚝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아버지, 접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는 잘 지냈느냐?"
"…네."
-"그동안 연락 한 통 없어서 걱정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전 언제나 같은 일상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가 아무리 그리 말해도 아비 입장에서는 걱정을 안 할 수는 없겠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해하지 말아라. 네가 살아있다는 게 나에게는 다행이니."
"…알겠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뭐길래 네가 직접 연락한거냐."
"제가 일하는 해성병원에 근무중인 김은지라는 사람에 대해 조사 좀 해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김은지?"
"예. 이번에 교수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그 사람 실력이 교수가 될 정도라고 생각치 않아 이렇게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흠,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 번 알아보마. 근데 그 실력이라면 의료사고도 빈번했을텐데 크게 문제된 적은 없었나 보구나."
"…몇번 들은 적은 있지만 어떻게든 해결한 듯 싶었습니다."
-"그럼 별아에게도 연락 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네 연락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번씩 안부 연락 좀 해줘라."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아프지 말고 잘 지내거라."
"예. 아버지도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쉬거라."
"예."
그걸로 두 사람의 전화 통화는 끊겼고 윤슬은 폰을 옆에다가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두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탓에 말려올라간 가운 아래로 희미하게 화상 흉터와 깊게 베였다가 아문 게 분명한 자상이 새겨진 왼팔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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