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46
-out
아구스 패거리가 떠나고 나서 지프차 몇 대가 도착했지만 마을 아이들 전원이 타기에는 부족했고 그래서 아픈 아이들을 우선으로 지프차에 태운 뒤 마지막으로 윤슬과 거래를 했던 소녀까지 태웠다.
남은 아이들은 지금 태운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데리러 오기로 약속을 한 뒤 출발했지만 그 아이들은 결국 메디큐브로 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구스 부하들이 나타나 남은 아이들을 전부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그 상황에 대해 파악한 시진은 아구스의 은신처를 찾아 아이들을 구조해야한다는 보고를 하려 했지만 그것보다는 윤중장의 호출이 먼저였다.
본진 사단장실에서 홀로 시진을 맞이한 윤중장은 손짓으로 책상 앞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고 시진은 그것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윤중장이 사진을 한 장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누군지 알거야. 미 육군 예비역 소령. 콜네임 아구스. 현재는 무기밀매없자. 김진석 대위를 잃은 그 작전에 이자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유엔군 참모장 통해 미 CIA 측에서 우리 군에 협조 요청이 들어왔어."
"불법 무기 거래 소탕을 위한 연합작전입니까?"
"아니. 이번 작전은 정의가 아니라 정치야."
윤중장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더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현재 북우르크의 2인자인 아망 대령이야. 미국은 아망 대령에 의해 북우르크에 쿠데타가 일어나 친미 정권을 세우길 원해. 그래서 아구스를 통해 아망에게 무기를 대량 공급할 계획이야. 미 델타포스 대원이 이미 작전 수행 중이고. 자네도 잘 아는 친구라던데?"
윤중장이 또 다른 사진을 내밀었는데 이번에는 탈레반 연합작전에서 함께 공을 세웠던 조던이 찍힌 사진이었다.
시진이 묵묵히 세 장의 사진을 쳐다보면서 윤중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작전 끝날 때까지, 다시 말해, 아구스를 이용 중인 동안에는 어떤 마찰도 피해달라는 협조 요청이야."
드디어 윤중장의 장황한 설명이 끝났지만 그 내용의 결말은 결국 아구스가 우르크에서 어떤 짓을 하든 못 본 척하라는 소리였다.
바로 어제처럼 죄 없는 여자아이들을 돈 많은 늙은이들에게 팔아먹어도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선제적 조치는 취하지 않겠지만 위수지역 내 치안 유지는 파병 부대의 기본임무로,"
"유시진이."
"대위 유.시.진."
반본을 내뱉으려는 시진의 말을 끊은 윤중장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관등 성명을 대자 윤중장이 시진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일개 중대급 야전 지휘관에게 사령관이 직접 명령하고 있어. 상황보고가 아니라. 늬들 발 묶느라 여기까지 날아왔어. 10분 후엔 다시 날아가야 하고. 나도 늬들에게 성의 보였단 얘기다. 명령이야. 우리 군은 이 시간 이후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네, 알겠습니다."
시진은 그렇게 답을 하면서도 처음으로 자신의 군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우루 중대로 돌아온 시진은 막사 안이 아닌 회랑으로 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스스로 자신의 군인이라는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국가를 지키는 일이 당연하게 생각했었던 시진이지만 이렇게 정치라는 이름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상황을 직접 보고 겪으니까 할말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을 쳐도 상부의 명령 하나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번한 인간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걸 이렇게 실감을 하자 시진은 있던 의욕마저 상실한 채로 무기력함에 묻혔다.
그때 발소리와 함께 자신의 앞에 그늘이지자 시진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올렸고 그러자 한 손에 컵을 들고 있는 윤슬이 서있었다.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망설임없이 들고 있던 컵을 시진에게 내밀 윤슬은 정말 덤덤한 얼굴이었는데 자신이 마시려했었던 것인지 본래 시진에게 줄려고 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컵 안에 담긴 믹스커피는 아직 뜨거운 상태였다.
"아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메디큐브로는 안 데려오셨던데."
"…우르크 정부에서 전문시설로 옮겨 보호한답니다."
"그렇습니까."
윤슬은 덤덤하게 수긍을 했지만 시진은 윤슬이 자신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아차렸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정부 쪽으로 넘어갔다해도 아이들의 상태를 모를 수 없는데 시진이 아이들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이상으로 아이들의 소식에 대해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선생님은, 여전히 곁에 사람을 두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
시진의 조심스러운 말에 윤슬은 느리게 시진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시진은 컵에 담긴 커피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
"…."
윤슬의 단호한 대답에 말문을 닫은 시진은 그저 커피만을 바라볼 뿐이었고 윤슬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시진을 쳐다봤다.
"유대위님. 지금은 저보다 당신이 더 힘들어보입니다. 그러니 나는 잠시 잊으세요. 당신이 괜찮아지면, 그 때 다시 얘기 합시다."
시진은 윤슬의 말에 떨리는 눈으로 윤슬을 올려다봤지만 윤슬의 얼굴은 평소처럼 덤덤한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윤슬의 눈에 담긴 감정이 걱정이라는 점에서 웃어버린 시진은 윤슬에게 고맙다고 말했고 윤슬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윤슬이 시진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는 그 사실 만으로 시진은 우울했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졌고 들고있던 커피를 다 마실 무렵에는 평소의 텐션을 되찾은 채 막사로 발걸음을 옮겨 대영에게도 아구스 관련 소식을 전달했다.
심각하게 그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무전기를 통해 들려온 윤슬의 말에 다른 의미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지영이라는 분한테 소포가 왔는데. 서대영 상사님께 온 것 같습니다. 서상사님 어디 계십니까?"
"지금 어디십니까?"
-"막사 식당 쪽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무전을 끝으로 시진과 대영은 막사를 향해 달렸고 그 무전을 들은 또 다른 인물인 명주도 막사쪽 식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택배를 가지고 있는 윤슬은 그저 자신의 소포를 뜯으면서 그들을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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