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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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자 사람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는데 그중에서 나는 그나마 여유로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급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었기에 나는 이 여유로움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간의 여유를 통해 산책을 하던 나는 나를 만나고 싶다면서 찾아온 이를 보고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닥터 닐,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전하는 이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이곳에는 무라바트 의장의 경호 팀장을 제외하고도 나와 유시진 대위, 그리고 의료팀장인 모연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마치 인질을 잡고 거래를 하려는 듯한 상황과 맞물려서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어 냈다. 그렇다 보니 내 말은 절대 곱게 나가지 않았다.

“[…뭐하자는 겁니까.]”

“[의장님께서 전하라고 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

그 말과 함께 그가 전하는 서류를 받아든 나는 가만히 경호팀장을 응시하다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서류는 한글로 작성이 되어있었는데 그들이 직접 한글로 작성했을 리 없으니 내가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을 해서 작성한 듯싶었다. 내용은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에 담긴 내용은 간략했다. 수술은 물론이고 무라바트 의장이 메디큐브에 방문한 사실 자체를 삭제하는 것으로 아랍연맹을 통해 정부에 요청했다는 것과 정부에서는 응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는 것. 또한 앞으로 무라바트 의장은 임서준의 도움이라면 기꺼이 도울 것이며, 그의 정보는 더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관리할 것이라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 외에도 부가적으로 적혀있던 안부 인사와 사과의 말들을 가만히 눈에 담아낸 나는 조용히 서류를 봉투에 다시 담은 뒤 돌려주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보셔도 되겠군요. 지금 이 순간 조차도 누군가에겐 정보이고 약점이 될 테니까요.]”

그게 나일지, 그일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예, 의장님께서도 서류만 전달해드리면 된다고 하셨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쪽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이만.]”

조용히 몸을 돌려서 떠나가는 차량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불길함을 담아 쿵쿵거리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지긋이 눌렀다. 두어 번 숨을 고르고 나서야 감았던 눈을 뜬 나는 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는 모연과 그 뒤에서 조용하지만 신경 쓰인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익숙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거두었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아… 아니, 됐어요. 우리 이제 들어갑시다.”

무엇인가 정리한 듯 단번에 웃는 얼굴을 만들어낸 모연이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이끌고 메디큐브로 향하는 것에 미쳐 그가 있는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무슨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몰랐으며 그것은 지금 당장의 나에게는 그리 급한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기도 했다. 지금 당장의 나는 무라바트 의장님의 일로 인해 엉망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오후에 일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간단하게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스트레칭을 하던 나는 침체한 얼굴로 부대로 돌아오는 이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에게 시선을 멈추고 말았다. 괜히 신경 쓰이는 기색을 하고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익숙하게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쁘십니까?”

“예? 아, 아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잠시 산책 가려고 하는데 안 바쁘시면 잠시 동행하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벙찐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익숙하게 웃으면서 수긍의 답을 보이자 그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울타리 내에 존재하는 안전구역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막사와 멀리 떨어졌다 하기엔 애매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도 마음 정리를 위해 걷기엔 나쁘지 않은 정도의 거리였기에 나는 조용히 그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저, 임 선생님.”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것에도 가만히 따라오던 그가 입을 열자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춰 세운 뒤 그를 돌아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군복 차림에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그였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낯익은 과거를 떠올리고는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신경 쓰였던 것일지도 몰랐다. 지울 수 없는 과거지만 이런 순간에 이런 식으로 떠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말씀하세요.”

“음, 아뇨.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그 얼굴로 돌아가셨다가는 악몽 꾸고 뛰쳐 나오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아닙니다. 그냥, 쓸데없는 오지랖이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올리면서 그리 말하고는 몸을 돌려 들판 너머를 응시했다. 뒤죽박죽인 속과는 달리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던 나는 잠시 후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의 옆에서 아까와는 다른 미소를 지은 채 들판 너머를 응시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나는 그가 지은 그 미소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금방 지워냈다. 쓸데없이 가능성을 내보이지 마라. 그것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실례되는 행동이 될 것이니. 그렇게 나는 그가 호출을 받고 돌아가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그와 함께 풍경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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