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Nil
- 날이 밝아오자 사람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는데 그중에서 나는 그나마 여유로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급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었기에 나는 이 여유로움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간의 여유를 통해 산책을 하던 나는 나를 만나고 싶다면서 찾아온 이를 보고 얼굴을 굳히고 말았
-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치면서 기나긴 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평화로운 부대의 모습에 안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 나는 별 어려움없이 시선의 끝에 서있는 이를 알아차리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걱정이 서린 시선을 뻗치는 것은 유시진이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의 시선에 호응하지 않았다. 나에게
- 의료진의 수술이 진행되는 그 시각 대한민국에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 외교부장관과 국방부장관 등이 최악의 사태를 대비했는데, 그 과정에서 남우르크 정부군이 모우루 중대로 특공여단을 보내려 했던 것이 무라바트 경호 팀장의 연락에 취소됐다는 것과 무라바트 의장의 수술을 집도하는 임서준에 대해 언급되었다. 국방부에서는 군의관이자 특전사였던 그를 알고
-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귓가에 닿아온 모연의 자조적으로 말하는 목소리에 느리게 두 눈을 떠 허공을 응시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VIP들에게도 특별한 의사가 필요하거든. VIP에게 메디컬 히스토리(Medical History)는 곧 약점이니까. 그래서 대통령의 건강 상태는 국가 기밀인거고
- 어젯밤 그렇게 잠이 들고 나서도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한 나는 새벽 무렵에 완전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간단하게 몸을 움직였다. 습관적인 행동에 가까운 행위였기에 그 행동이 끝날 때까지 내 정신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있었다. 어차피 의식하고 하는 것보다는 무의식에 이끌리듯이 하는 운동이다
- 숙소에 가는 길에 씻으러 간다는 상현과 마주친 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만 따로 지정한 시간의 끝무렵에 씻기로 했다. 상현을 보낸 뒤 숙소로 들어온 나는 피로한 몸을 베드에 눕힌 다음 조용히 정적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후덥지근한 낮과 달리 서늘한 공기가 은근하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마치 답답하던 속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착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 근처 다운타운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잠시후 내가 말한 장소에 도착하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굳이 그런 반응에도 관심을 주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어느 쪽이 편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돌아가시는 것도 태워다 드릴 생각이라." "…같이 들어가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그녀와 내
- 브리핑 이후 각자 배정 받은 숙소로 이동했는데 나는 인원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다른 막사에 배정 받았다. 하지만 그 배정에 나는 속사정이 있음을 눈치챘지만 정확히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체 생활에서 유일하게 예외라는 것은 말이 안될 일이었으니 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들의 배정에 반박하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 우르크. 발칸 반도 끝자락에 자리한 나라로 이번에 해성병원에서 의료봉사단을 보낸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그것을 본 이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 봉사단에 들어갈까봐 눈치를 보거나 불만을 표하는 이들, 다른 하나는 그 봉사단에 지원하는 이들이었다. 나머지는 이도저도 아닌 이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 가지 중 이도저도 아닌
- 사람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쉼없이 흐르는 유한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그 불변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내 할 일을 해나갔다. 모연이 특진병동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수술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수면시간은 줄었지만 모연의 성공만큼은 기뻤기에 그에 불만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툴툴거리는 건 상현 쪽이었
- 그와 약속했던 2주의 마지막 날. 나는 평소처럼 그와 저녁을 먹고 항상 갔던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서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유시진씨." "…예?"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복잡함이 느껴지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잠시 시간이 나서 옥상에 올라온 나는 담배를 피고 있는 상현과 마주칠 수 있었다. "어? 선배, 벌써 수술 끝났어요?" "아아,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마무리 됐어요. 근데 아직도 담배 피는 겁니까? 하 선생님이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 그럴려나요?" "아무래도 여러모로 좋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몸도
- 다음날 쉬는 날이어서 급할 것 없이 몸을 일으킨 나는 가만히 휴대폰에 남은 문자메시지 기록을 내렸고 그러자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네볼라〕 장난 같은 그 이름은 내가 처음 특전사 람다 팀에 배정 받았을 때 팀장이었던 그의 콜사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쓰지 않을 그 이름. 본명이 신성운이어서 성운이라는 단어는 콜사인으로 썼던 그
- 식사가 끝나고 나서 이번에도 유시진씨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해서 대신 나는 영화를 고르겠다고 말하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티비는 없지만 빔프로젝트는 있어서 그걸로 영화를 보기로 해서 가만히 영화들 중에서 뭐가 좋을지 목록을 보던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온 그를 향해 목록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유시진씨는 어떤 게 좋습니까. 로맨스랑 공포만
- 유시진씨가 말했던 그 다음 날 나는 그가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한가해져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내밀어진 커피에 놀라서 그 손의 주인을 쳐다보자 웃으면서 서있는 그가 보였다. "…뭡니까?" "음, 그냥 드리는 선물? 아니면 뇌물?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상관은 없는데, 옷이 더러워질 겁니다. 괜찮겠습니
- 모연을 재우고 나서 가만히 모연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집을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인 탓에 공기는 어느새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고 알리듯이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의 통증에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잠시 멈춰섰다. 통증은 언제든 달갑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나의 일부와도 다름없는 것이었
- 어째서인지 다음날 출근을 하니까 분명 오늘 오프가 아닐 모연이 없다는 점에서 의아해 하면서 상현에게 묻자 어제 일을 간략하게 전달해주었다. "아… 그게, 어제 교수 임용 결과 나왔는데 강모연이 떨어졌거든요." "강 선생님이 말입니까? 그럼, 누가 채용 되었답니까?" "그……. 하아, 김은지 선생이 이번에 교수로 채용 됐어요. 그래서 어제
- 나의 이러한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에게 당황이라는 감정을 안겨줄 수 없기에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뜬 나는 때마침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몸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배달기사분이 봉투를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고는 문을 닫았다. 비빔밥을 2인분 시킨 것 치고는 묵직한 느낌에 의아해하면서 주방
- 시간은 빠르게 흘러 10월의 마지막 날. 병원에 남아있으려던 나는 지수와 모연, 그리고 상현의 합작으로 강제로 병원에서 나와야만 했다. 어이 없음과 황당함에 허허로이 웃으면서 잠시 건물 앞에 서있던 나는 문득 익숙한 얼굴을 보고 그 쪽에 시선을 멈췄다. 사복 차림의 남자는 분명 진료를 받으러 오겠다 했다가 오지 않았던 유시진 환자였다. 그쪽에서는
- 통화를 끝내고 인사만 하고 돌아가려던 나는 갑자기 들어온 교통사고 환자에 의해 분주해지는 상황에 바로 한 쪽으로 들어가 상황을 확인했다. 급박한 상황이다보니 다들 오더에 맞춰 분주히 움직였고 CT와 X-ray를 찍고 상태를 체크하고 나자 수술방이 준비됐다는 말에 바로 환자를 수술방으로 옮겼다. 그렇게 또 다시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이를 살리
- 통화 이후 잠시동안 옥상에서 머무르던 나는 다리를 몇번 두드리고 나서야 옥상을 내려와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새 수술복을 꺼내서 갈아입은 나는 오염된 수술복은 세탁물 통에 넣은 다음 손에 들고만 있던 가운을 걸쳤다. 그렇게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천천히 응급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오늘 당직이 송상현 선생님이었으니까 내려가면 얼빠진
- 평소와 다름없이 정신이 없고 다급한 이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분주해보이는 응급실 내부에서 나는 익숙하게 오더를 내리고 차트를 작성하고 응급환자를 데리고 수술방으로 들어가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둑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구나…. 그리 생각하면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나는 익숙
- 의병 전역 신청서에 내 이름 석자를 적고 공식적으로 전역 처리가 되고 나서 2년 정도가 흘렀지만 나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환자를 확인하고 수술을 하고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잠을 자고 말이다. "선배!" 익숙한 목소리에 멍하니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던 나는 상체만을 일으켜 세워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내
-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던 그 날 이후로 통증이 함께하는 일상이 당연할 정도였고 악몽은 친구같을 정도로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왔다.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회복세에 들어간 몸은 더이상 빠르게 달리지도 무거운 것도 들 수 없었지만 그 외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의료계열에 다시금 발을 넣어야만 했다. 돈 때문이냐고
- 귓가에 울려퍼지는 다수의 총성음들은 점차 고조되어가는 긴장감 속에서 고통 소리와 함께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는 곧 이어지는 폭격음 소리들에 의해 잠식되어 버렸다. 그 모든 소리가 정적이라는 말에 어울릴 법한 정도로 고요해지는 것은 오래 가지 않아 찾아왔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붉은 핏빛으로 물든 시체들은 그 고요함을 일부 삼아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