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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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그렇게 잠이 들고 나서도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한 나는 새벽 무렵에 완전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간단하게 몸을 움직였다. 습관적인 행동에 가까운 행위였기에 그 행동이 끝날 때까지 내 정신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있었다. 어차피 의식하고 하는 것보다는 무의식에 이끌리듯이 하는 운동이다보니 오히려 그것이 머리 속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대충 잠이 깼다 싶어진 나는 가볍게 세안을 할 생각으로 수건 한 장만을 들고 수돗가로 걸음을 옮겼다. 샤워는 1일 1회 제한이지만 수돗가에서 가볍게 씻어내는 정도는 제한이 없었기에 나는 군인들을 제외하면 누구의 기척도 없는 바깥의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참고있던 숨을 토해낸 뒤 숨을 들이켰다. 맑고 개운한 새벽공기는 낮에 비하면 차갑고도 서늘한 기운이었지만 나는 그런 공기가 좋았기에 기분 좋은 상태로 수돗가에 도착했다.
적당한 양의 물을 끌어올려 대야에 담아낸 나는 수건을 대충 어깨에 걸친 상태로 차가운 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세수를 하고나자 손 끝이 살짝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양치까지 끝낸 뒤 자리를 정리했다.
아침 식사 시간 전까지 간단하게 몸이라도 풀고 싶었던 나는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에게 간단하게 뛸 수 있는 곳을 물어보자 병사들이 아침 구보를 뛴다는 곳과 그들이 아침 구보를 뛰는 시간대도 알려주어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마음 편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한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무리했다는 것을 알리듯이 통증이 느껴지는 다리의 상태는 꽤나 익숙했기에 나는 뛰다가 다리를 두드리다가 다시 뛰고를 반복했다. 다리가 망가지고 나서 달리는 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이런 통증을 참을만 하다고 여기는 때문일거다. 하지만 나는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그 통증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서는 뛸 수 있다와 없다는 그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 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통증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와도 다름없었다 생각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이 통증은 죽는 그 날까지 이어질 테지. 하지만 나는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동료들이 지켜준 목숨, 헛되이 버릴 생각을 접은 결과니까.
한참을 그렇게 달리던 나는 다리가 한계라고 울부 짖기 직전이 되서야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오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숙소로 돌아가 피로를 풀어야 했기에 나는 과감히 몸을 돌린 다음 걸음을 옮겼다.
미묘하지만 절뚝거리는 걸음이었지만 숙소에 도착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
아까 전에 수돗가에서 적셔두었던 수건으로 땀을 대충 훔쳐낸 나는 혹사당한 다리를 들어올려 쿨크림을 바른 뒤 마사지를 하면서 피로를 풀었다. 임시조치였지만 이렇게라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해야 나에게 이득이었기에 나는 그 행동을 귀찮다고 여기지 않았다.
"선배.일어났어요?"
"예."
"그럼 잠깐 들어갈게요."
상현의 목소리에 답한 나는 들어온다는 상현의 말에 열기가 그나마 가라앉은 다리에 발랐던 크림을 가볍게 수건으로 닦아내며 수긍의 답을 전했다. 그러자 안으로 들어온 상현은 내 상태와 꺼내둔 크림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약간이지만 불만을 담은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침부터 뭐했어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산책이랄까…?"
내 말을 들은 상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충 내가 한 일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눈치였다. 뭐 사실 그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저 웃으며 다리를 내려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여기 무리하라고 데려온거 아니니까 적당히 해요. 강모연이 알면 난리칠거 알면서 왜 그러시나."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상현의 모습에 나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하면서 다리 상태를 체크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요. 내가."
화를 낸다고 하기엔 불만에 가깝고 불만이라 하기엔 화를 내는 듯한 기색으로 그리 답한 상현이 가자면서 먼저 밖으로 나가자 나도 머리 위에 어제 쓰고 왔던 모자를 눌러쓰면서 뒤를 따랐다.
다행히도 다리는 평소와 다름없을 정도라서 모연은 아무런 말없이 넘어갔고 나는 그저 웃으며 아침 식사를 입으로 가져다 넣었다. 일과시간이 군에 맞추다보니 식사만큼은 잘 챙겨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것은 잠깐의 추억만을 가져다 줄 정도였다.
오전 진료을 간단하게 끝내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 레지던트 1년차인 이 선생의 품에 안긴 채 메디큐브에 들어오는 아이로 인해 잠시 소란이 일었다.
"갑자기 토하면서 쓰러졌다고?"
"네. 일단 영양실조 같아서 수액 달게요."
"소리는 정상인데…."
모연이 우르크 현지인 남자아이를 청진하면서 하는 말에 나는 아이의 외형과 간단한 동공반사 등을 체크했다.
"폐렴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영양실조에 의한 단순 빈혈이라기엔 상태가 너무 안 좋아."
그러다가 내가 아이의 배 이곳저곳을 누르더 중 간 근처를 누르자 아이가 신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뿌렸다.
"간과 비장 사이의 통증?"
"빈혈은 복통하고 상관없는 증상인데…. 아! 허혈성 대장염 아닐까요?"
모연의 중얼거림에 이 선생의 확신 없는 말투에 모연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허혈성 대장염은 고령자에게 발생하기 쉬운 질병으로 아이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생각됩니다."
"그렇죠…."
기운빠진 목소리의 이 선생의 답에도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 선생에게 아이에 대해 묻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먼저 입을 연 이가 메디큐브 진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납중독은 어때요."
"납중독은 이렇게 급성으로 증상이 나타나진 않아요."
유 대위의 말을 단호하게 쳐낸 모연의 답에 나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로 이 선생에게 물었다.
"혹시 이 아이 철 같은 거 물고 있었습니까?"
"음, 철은 아니지만 손가락 빨면서 뭔가 달라 하긴 했어요. 근데 자기네 말로 해서 뭘 달라한 건지…."
"그럼 유 대위님 말대로 납중독일수도 있겠습니다. 이곳은 위생이 철저하지 않은 데다가 아이들이 버려진 고철과 가까이 하고 지내는 곳이니 영양실조에 어니미어(anemia, 빈혈증)인 상황에서, RBC(적혈구)는 몸에 들어온 납성분을 영양분으로 알고 빨아들이고 순간적으로 납수치가 올라가 어큐트(acute, 급성)하게 나타난 거라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니 말입니다."
"…해독 치료부터 해야 하니까 고농도 비타민C 링거 주고, EDTA도 처방해."
"아! 바로 약 타올게요."
내 말을 들은 모연이 이 선생에게 오더를 전달하자 이 선생은 달려 나갔고 유 대위는 통역을 해줄 테니 나중에 아이가 깨어나면 불러달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말없이 몸을 돌려서 진찰실을 나섰다. 물론 나도 모연에게 아이를 맡긴 뒤 진찰실을 나섰지만 굳이 유 대위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우르크는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 납중독 등 한국에서는 만나기 힘든 질병이 즐비한 곳이었고 그런 것을 캐치하지 못한 것은 우리는 부적응이 만들어낸 결과니까. 굳이 변명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유 대위의 등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약품창고에서 수량체크를 하던 나는 막사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사이렌 소리를 듣고 손에 있던 파일과 펜을 한쪽에 내려둔 뒤 창고에서 나와 군 명령에 따라 메디큐브에서 의료진이 모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저래? 어디 전쟁 났나?"
"난 그럼 적군도 다 치료해줘야지. 선서했으니까."
투덜거리는 상현과 해맑게 말하는 이 선생의 말 소리에도 나는 조용히 상황을 파악할 정보가 필요했기에 병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2인 1조로 무장한 상태로 배치된 병사들의 모습을 기준으로 경계 수치가 낮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동안 관찰한 결과로는 그 이상의 상황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 나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 대위와 서 상사의 등장은 좋은 일이면서 최악의 일이었다.
'중동 평화조약 성사를 위해 북우르크를 비공식 순방하고 돌아오던 아랍연맹 의장인 무라바트라는 사람이 곧 메디큐브에 올 것이다. 환자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응급 상황이니 진료할 준비를 하고 있어달라. 무라바트는 아부다비 왕가의 서열 3위 왕족으로 종파 간 갈등 문제, 국경 분쟁 문제에 대해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막후 실력자다. 중동 평화조약으로 인해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지만, 반대파에겐 암살 1순위 전치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VIP 환자로 대해야 할 것이며, 이 모든 일은 일급 보안사항이므로, 의료진은 각별히 신경 써주길 바란다'
"VIP 주치의가 보낸 병력 기록입니다."
브리핑을 마친 유 대위가 모연에게 환자 차트를 건네는 모습에도 나는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시선을 내려 잔뜩 힘이 들어간 두 손을 맞댄 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잊고 있던 과거의 조각이 머리 속에서 비집고 나오고 있었지만 그 기억은 결코 나에게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난 괜찮으니 오지 말거라.'
담담하면서도 익숙한 그 목소리는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머리 속에 울려퍼졌다.
'어머니….'
끔찍했던 기억이 다시금 생생해지는 감각에 나는 갈 곳 잃은 감정을 삼키고 또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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