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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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송선생님이 찾은 약이 치료제로서 역할을 다 하는 것인지 윤중위의 상태는 호정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은 문 너머로 지켜보다가 시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윤중위가 깨어나는 것까지는 못 보고 갈 것 같습니다."
가만히 그렇게 문 너머를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메디큐브를 빠져나왔고 밖을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는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모우루 중대를 벗어났다.
가만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맞은 편에서 헤드라이트를 빛내면서 달려오는 차량을 보고 멈춰섰다.
"[분명 데리러 간다고 했었는데 왜 여기에 있어?]"
차의 조수석에 앉은 이는 내가 잘 아는 발렌타인이었고 그런 그녀의 질문에 옅게 웃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나는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그런 나의 모습에 발렌타인은 의아해 하면서도 차를 돌려 다운타운으로 가라는 말을 했고 운전석에 있던 이는 묵묵히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해가 밝아오기 시작하는 풍경은 정말이지 불쾌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들과 달리 자연은 아름다웠고, 그 자연 속에서 인간들을 자연을 짓밟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닐, 손이 부족하다면 도와줄 수 있어]"
"[아니. 나 혼자면 충분해.]"
"[하지만….]"
"[발렌타인,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주겠어?]"
"[……알겠어.]"
그녀에게 믿어달라 말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 것 같았다.
첫번째는 그녀가 불안에 떤 채로 인신매매굴에서 빠져나오게 할 때, 그리고 그 다음이 지금.
사실 나는 그녀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때는 동료가 있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지만, 이번에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강선생님을 구하고, 배신자인 그와 결판을 내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을지도 몰라도 그 안에 아구스 패밀리가 끼어있다는 점에서 나는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아구스가 괜히 델타포스팀의 전설이었던 게 아니니까.
지금은 어떤 인물이 되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결코 순순히 물러나거나 정정당당하게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인질납치극.
그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한숨 자두는 게 어때? 얼굴 상태가 엉망인데.]"
"[…그럼 도착하면 깨워주겠어?]"
"[출발이 언제인데?]"
"[…밤 10시]"
오늘 밤 떠난다는 것으로 봐서는 오늘 밤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었고 그 순간은 경계가 풀릴 것이라 생각해서 정한 나의 침입시간은 밤 11시.
하지만 가는시간이 있기에 발렌타인이 있는 곳에서는 10시쯤에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태백부대를 빠져나왔는지 물어보면, 분명 아침이 되면 강선생님의 부재를 알아차리는 이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산책이라는 핑계로 빠져나오기에 무리가 있을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푹 자. 작전 도중의 집중력은 좋은 컨디션에서 나오는 거 아니야?]"
"그렇긴하지."
문득 발렌타인의 말에 팀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작전 전에는 최상의 몸 컨디션을 만들어두는 게 바로 우리들의 의무이자 임무야. 몸 함부로 굴리지 말고, 아프지 말고!">
피식 웃어버린 나는 느리게 두 눈을 떴고 그러자 아까까지는 불쾌하리만큼 아름답다 느껴지던 자연이,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럼 난 잘게. 잘 부탁할게, 발렌타인.]"
"[물론.]"
그렇게 나는 두 눈을 감고 편하게 머리를 시트에 기댔다.
오늘 하루만큼 나는 어느 무엇도 아닌 그저, 무명(無名)의 사람이었다.
민간인 한윤슬도, 의사 한윤슬도, 육군 소장으로 전역한 한윤슬도, 닥터 닐도 될 수 없는… 그저 한낱 복수귀가 되는 것이었다.
나라는 나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었고, 가족들에게는 그런 나의 짐을 넘겨줄 수 없으니까.
부디 무사하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강선생님.
만약 당신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조차도 모르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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