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22

무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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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귓가에 닿아온 모연의 자조적으로 말하는 목소리에 느리게 두 눈을 떠 허공을 응시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VIP들에게도 특별한 의사가 필요하거든. VIP에게 메디컬 히스토리(Medical History)는 곧 약점이니까. 그래서 대통령의 건강 상태는 국가 기밀인거고." 

그렇게 모연이 말이 끝나고 얼마 흐르지 않아 막사 입구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메디큐브 창문으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하게 비쳐들었다.

일급 보안사항이라면서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보다 더 떠들썩하게 등장하는 환자에 모연은 차트를 덮고 환자를 맞을 준비를 했고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실에서 동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애써 떨쳐내며 의료진 사이에 섞여들었다.

VIP 환자 상태는 의료진의 생각 이상으로 위독했는데 그 탓에 환자는 곧장 산소호흡기와 각종 바이털 장비가 갖춰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무라바트 의장은 올해 69세의 할아버지로 실려온 그는 검은 터번을 둘러쓰고 있었다. 하지만 모연은 망설임없이 그의 터번을 벗긴 뒤 환자의 동공체크를 하면서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상태를 체크할수록 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만을 알려주었다.

나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한 경호팀장을 등진 채 무라바트 의장의 상태를 살피다가 경호 팀장이 건넨 것이 니트로 글리세린이라는 것에 미간을 찌뿌렸다. 주치의를 대체 어떤 인간으로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태의 무라바트 의장에게 저것을 투약하면 결코 좋은 상태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혈관이완제를 왜? 이 환자 당뇨고, 인술린 부작용 아니에요?" 

"차트 믿을 거 없다고 했잖아. 진단과 증상을 바꾸면 말이 돼. 저혈당으로 인한 고혈압이 아니라, 심장문제로 인한 저혈당이야. 투약해주세요."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차트에서 얼마나 바뀌었을지 모르는 그의 몸 상태를 대상으로 주치의의 처방이 안 좋아지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투약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 선생님이 주사기를 이용해 투약을 시도하는 그 때 갑자기 바이털이 요동치기 시작해 내 생각은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혈압이 갑자기 너무 떨어져요!"

"수액 풀 드랍(full drop, 빠른 속도로 주입) 해주세요! 뭐지? 복부팽만?"

황급히 환자의 상의를 벗겨 확인하던 모연에게 본진과 무전을 주고 받던 유 대위가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고 그에 모연은 자신의 소견을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복부팽만에 혈압저하… 헤모페리(Hempperi)! 복강내출혈이에요. 이 환자 뭔가 숨긴 게 더 있어. 일단 열어봐야 알 것 같아. 개복수술 합니다! 수술실 준비해주세요."

모연의 마지막 말에 의료진이 일제히 움직였는데 그것을 무라바트 경호팀장이 막아서는 걸로 중환자실 안의 분위기는 더욱 경직되었다.

"[손 떼십시오. 당신들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수술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약 한 시간 후면 주치의가 이곳에 도착합니다.]"

나는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짜증이 일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이 짓거리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던가. 정말이지, 볼 때마다 내 손으로 저 숨을 끊어버리고 내 숨도 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상황은 매우 거슬렸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이 환자, 한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 20분도 못 버텨요.]"

"[아랍의 지도자 몸에 아무나 칼을 댈 수 없습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자꾸! 20분 안에 수술 안 하면 이 환자 죽는다고요!]"

그 순간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모연의 머리에 장전된 총이 겨눠졌다.

"[손뗍니다! 무라바트 의장님 수술은, 오직 우리 아랍 의사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줄곧 가만히 있었지만 이 상황만큼은 과거와 겹쳐보이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발을 내딛고 말았다.

"[그 잘난 무라바트 의장님 수술 안 할 테니까, 총 치우시죠?]"

"[닥터, 닐?]"

내가 모연의 앞을 막아서면서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것인지 경호팀장은 그제서야 나를 알아차린 기색을 내보였다. 그래, 당신이 나를 안다면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저기 누워있는 저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 얼마인데.

내가 조용히 시선을 내려 총구를 응시하자 경호팀장은 깔끔한 솜씨로 장전된 총의 안전장치를 걸더니 품 안으로 갈무리해 넣었다.

"[당신들 의사대로 우리는 손 안 댈 테니까. 그 잘난 주치의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저기서 무라바트 의장님이 죽어가는 모습 보면서.]"

누가 듣더라도 예의도 없고 거칠기 그지 없는 말투일 테지만 나는 굳이 그를 향해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 있다고는,]"

"[그렇겠죠. 아니, 그래야죠. 당신들이 내 소식을 알면 안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

그 뒤로 바이털이 요동치는 소리를 제외하고 잠시간의 정적이 중환자실에 흘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선택하세요.]"

내 영문 모를 말에도 경호팀장은 알아들은 것인지 무전으로 몇마디 주고 받더니 뒤로 물러섰다.

"[닥터의 결정이라면 의장님도 납득하실 겁니다.]"

"[듣기 싫은 말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경호팀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등 뒤에 서있는 의료진을 향해 말했다.

"집도는 제가 하겠습니다. 수술실로 베드 옮겨주세요."

"…베드, 옮깁니다."

모연의 통솔 하에 무라바트 의장이 누워있는 베드가 수술실로 옮겨지는 동안 나는 이들과 대치할 이들을 떠올리고 유 대위를 돌아봤다.

"현재 작전 통솔하고 계신 분이 모우루 부대 직속 대대장님 이십니까. 아니면 사령관님이십니까."

"아, 대대장님이십니다."

"그럼 대대장님에게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라바트 의장의 집도는 임서준이 한다고 말입니다."

"예?"

"지금 대대장님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령관님께도 보고될 테니까 문제는 없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경호팀장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수술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써지컬 캡(Surgical Cap)을 쓰고 마스크까지 낀 다음 손을 세척했다.

그 탓으로 반팔 형식인 수술복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팔에 있는 흉터들이 겉으로 드러났지만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수술방에 들어온 이들도 이런 일에 동요할 인물은 없었다. 아니, 이것과는 상관없는 다른 사유로 동요할 인물은 있었지만 그것을 드러내고 실수할 인물이 메인에는 없었다.

"수술 시작합니다. 메스."

가운과 장갑까지 갖춘 내가 수술대 앞에 서자 그제서야 수술은 시작됐다. 수술대 앞에 선 의료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그들을 믿기에 굳이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라바트 의장의 수술이 시작되었고 피로 물들어가는 수술실의 풍경에 반응하는 것은 그런 풍경이 익숙치 않은 부대원들과 경호원들 중 일부였고 그 풍경을 아무말없이 바라보는 이들은 의료진과 무라바트 경호팀장, 그리고 유 대위를 포함한 몇몇 병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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