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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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나고 나서 이번에도 유시진씨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해서 대신 나는 영화를 고르겠다고 말하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티비는 없지만 빔프로젝트는 있어서 그걸로 영화를 보기로 해서 가만히 영화들 중에서 뭐가 좋을지 목록을 보던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온 그를 향해 목록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유시진씨는 어떤 게 좋습니까. 로맨스랑 공포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로맨스는 그렇다 치고 공포라니 무서운 거 못 보십니까?"
놀랐다는 듯이 되묻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공포 작품의 대부분은 죽음을 다루는 내용이니까요. 누군가가 죽고 그 죽음 뒤에 그 영혼들이 산 이들을 해하거나 한 명 한 명 죽어가는 환경 속의 내용이거나 무엇도 달가운 쪽은 아닙니다."
"아, 그렇겠군요. 그럼 액션은 어떠십니까."
그가 말한 작품은 범죄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액션물이었는데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것을 결제한 다음 바로 빔프로젝트를 통해 파일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재생하지 않고 가볍게 마실 커피를 준비해온 나는 그에게 잔을 건네면서 자리에 앉았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재생하겠습니다."
"네."
그 뒤로 나와 그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그리 나쁘지도 좋지도 않을 정도의 내용을 보여주었고 나는 가만히 그것을 보면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는 이 순간이 꽤나 귀하고 생소한 무엇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영화의 내용보다는 이 시간이 그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왜 나에게 소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복잡한 마음으로 내내 영화가 비춰지는 벽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일어나려던 그를 붙잡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예? 어떤…."
"왜 이런 식으로 시간을 소비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예?"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되묻는 목소리에 나는 느리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당황스럽다는 듯한 그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다시금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유시진씨가 굳이 저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실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시진씨 쪽에서 손해 보는 시간들 아닙니까."
"……."
내 말에 아무 말없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느리게 두 눈을 감았다 뜨면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임 선생님이 보기에 그렇게 보였습니까?"
"예."
단호한 내 대답에 한숨을 내쉬던 그는 어정쩡하게 서있던 몸을 움직여 다시금 쇼파에 앉더니 그를 붙잡고 있던 내 손의 바로 위인 손목을 반대 손으로 붙잡았다.
"나는 임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싶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임서준이라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저한테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거든요. 그쪽이랑 친해질 시간이."
그 말에 나는 당황해서 아무말없이 그를 응시하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 이게 며칠 뒤에 파병갑니다. 8개월 정도 되는 장기 파병이라 그 전에 임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가서도 연락하고 지내고 싶거든요."
"…어째서, 저입니까. 그쪽이랑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재미없을텐데요."
"……글쎄요? 제가 당신에게 반해서, 일까요?"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그게 진심이라는 것을 그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던 나는 단박에 그 말을 쳐낼 수 없었다.
"어? 제가 이런 말 하는 데도 안 내치십니까."
"…장난 같지 않아 보여서 말입니다."
"……다행입니다. 장난이라고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서."
나는 그가 내 손목에서 힘을 빼는 것에 나도 그의 팔을 놔주었고 그러자 그는 내 손목도 놔주었다. 그 뒤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버려서 빈 화면을 띄우는 벽면을 본 나는 바로 빔프로젝트를 끄고 일어나려다가 나를 붙잡는 손길에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 이런 말 해서 제가 불편해지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저랑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유시진씨. 저보다 더 잘 맞는 사람 있을 겁니다."
"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쪽보다 제가 8살이나 많고 전 몸도 성치 않은 사람 입니다. 그런데 굳이 모자랄 것 없는 그쪽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손해 아닐까요."
내 말에 유시진씨는 화들짝 놀랐는데 그 방향이 내 나이라는 점에서 나도 약간이지만 당황하고 말았다.
"예?! 나이가 그렇게 된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다른 사람 찾아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뇨. 그래도 전 임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싶습니다. 전 그쪽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 말에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 말, 무슨 의미로 하는 말입니까."
"…어떤 의미면 제가 임 선생님 선 안에서 안 내쳐질 수 있습니까?"
"……."
"기회만 된다면 저는 임 선생님 곁에 계속 있고 싶습니다만 무리한 부탁입니까?"
"…연애는 안 하실 겁니까."
내가 그리 말하자 그는 익숙하게 활짝 웃는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그 연애, 임 선생님이랑 하면 안 됩니까?"
"아니,"
"물론 임 선생님이 불편하시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필요하다면 생각할 시간도 드리겠습니다. 근데 남은 시간 만큼은 같이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며칠 안 남았잖습니까."
"……맘대로 하시죠."
그 날 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고 나만이 복잡한 상태로 그 자리에 남았다. 남자든 여자든 연애 자체를 할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 있어서 그의 말은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가 남자라서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의 입장에서 나 같은 인간을 만나서 뭐가 좋다고 나에게 그리 말하냐는 거다.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는 그가 그리 좋아할 법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한동안 머리 속이 복잡해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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