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65

-out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윤슬의 뒤를 따르던 시진은 문득 환자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꽤나 익숙하다는 것에 멈칫하고 말았다.

일이 터질 때마다 병실로 실려가고 수술을 받는 그의 몸상태가 얼마나 최악일지 상상을 하던 시진은 순간 발걸음을 멈춰 세운 윤슬의 행동에 자신도 걸음을 멈춰세울 수 밖에 없었다.

시진의 걸음이 멈춘 것을 들었는지 몸을 빙 돌려 시진과 마주한 윤슬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송선생님에게 들었습니다. 편지, 유대위님이 가지고 계시다면 돌려주시겠습니까."

시진은 그런 윤슬의 말에 잠시 두 눈을 내리 깔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무기질적인 윤슬의 두 눈을 마주하며 손에 들고 있지만 등 뒤로 감추고 있던 편지를 윤슬을 향해 내밀었다.

"…이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내밀고 있던 손을 이용해 편지를 받아드는 윤슬의 행동에 천천히 손에 힘을 풀면서 편지를 잡고 있던 손을 거둔 시진은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윤슬의 얼굴이 복잡함을 내비치는 것에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조용히 적막 속에 서있던 시진은 귓가에 닿아온 종이 소리에 자리를 피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쁘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담담한 말투에 담긴 건조함에 시진은 알겠다며 주변을 바라봤고 잠시 복잡한 머리 속을 비울 겸 주변 풍경을 한번 훑어보다가 곧 귓가에 들려오는 윤슬의 목소리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산책로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진짜 산책가실 생각이셨습니까?"

시진이 놀람을 담은 얼굴로 되묻자 윤슬은 픽 웃어보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봉투에 넣은 채로 접어서 환자복 주머니에 넣고는 고개를 돌려 풍경을 바라봤다.

"싫다면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싫을리가요."

"그럼 안내해주시겠습니까."

"하아, 대신 멀리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웃으며 시진의 걸음에 맞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윤슬은 시진이 보지 못할 위치에서 조용히 방금 읽었던 편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편지 안에는 윤슬의 팀이 전멸했던 그 날의 진실이 담겨 있었는데 그 진실은 결코 윤슬에게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전역을 한 강마음 상사는 타국에 본국의 군사정보를 넘겼고 그 정보를 가져간 이들 중에 윤슬을 노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게 계기였지만 결국 그 작전에서 윤슬은 살았으며,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점이 있다면 윤슬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서 생존의지를 잃었다는 점 정도였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팀장님은 물론이고 팀원들도 죽었으며, 자신의 어머니 또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은 윤슬에게 꽤나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달리 윤슬은 그 짐의 존재를 알려준 강마음 상사에 대한 복수심은 줄어들었다.

결국 사건의 발단은 그였지만 그 사건의 진실을 알려준 것도 결국 그였으니까.

그렇기에 윤슬은 시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복잡한 머리 속을 정리해나갔다.

"유시진 대위님."

"예?"

"혹시 살아있다는 게 잘못됐다고 느낀 적, 있으십니까?"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살아있어서,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어서, 그래서… 모든 게 무너진거라면. 그럼 어떨 것 같습니까?"

윤슬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시진은 발걸음을 멈춘 채 윤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시 쌓아올릴 겁니다."

"……."

"나로 인해 무너졌다면, 내가 다시 세워 올리면 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유시진 대위님은 생각이상으로 단단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윤슬이 이은 말에 시진은 부정을 표했지만 윤슬은 그런 그의 부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살아가는 시간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게 무슨…."

"저희 팀장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십니다. 정답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던 저에게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시죠."

"아……."

"팀장님 말이 맞았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뿐."

시진은 윤슬의 동문서답같은 말에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윤슬을 바라봤고 윤슬은 그런 시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처음 보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해답을 찾은 아이같이 맑아보이는 그 미소를 지어보이는 윤슬의 얼굴은 후련함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런 윤슬의 모습에 시진은 자신의 복잡한 머리 속은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고 오로지 그의 얼굴만이 머리 속에 가득 새겨졌다.

"유대위님, 덕분에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타인에게는 큰 무언가가 될 수 있고, 자신에게 큰 무언가가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유대위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그것을 통해 중요한 것을 얻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혹시 물어봐도 된다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유대위님 말대로 다시 쌓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시진의 조심스러운 질문과 달리 흔쾌하게 답을 내놓은 윤슬은 어리둥절한 기색인 시진을 그저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곧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는 평야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저는 제 사람들이 제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강선생님 구출을 온전하게 유대위님께 맡기지 못한 겁니다."

"…그렇군요."

"물론 그 점에 대해 사적인 감정이 하나도 없다는 건 거짓일 겁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 저는 이것을 가지고 돌아와버렸죠."

윤슬이 말하는 것이 강마음 상사가 적은 편지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시진은 그저 조용히 윤슬의 말을 들으며 잠시 밀려났던 자신의 복잡한 머리 속을 가만히 정리했다.

"아군이었던 그가, 적이 되어버린 그 날 저는 모든 것을 잃었고, 또한 제 자신도 놓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붙잡아서 쌓아볼 겁니다. 다시 잃게 된다면 더이상 일어서지 못할 것 같지만, 미래가 두렵다고 멈춰서는 건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한선생님도,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아뇨, 저는 겁쟁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무언가를 잃는 아픔이 두려운, 겁쟁이-

그런 윤슬의 숨겨진 말을 시진은 알 수 있었다.

자신 또한 존경하던 김진석 대위를 잃은 댓가로 구조했던 아구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과거의 전우를 죽이지 않았던가.

스스로의 손으로 죽인 과거의 전우는 자신의 동료인 김진석 대위의 목숨을 앗아간 댓가로 살린 이였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 전우였던 아구스를 잃을 두려움을 가지고 회피했던 것 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진은 머리 속이 복잡했었지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의 말에 그저 말을 아낄 수 밖에 없었다.

해답을 찾은 이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진은 곧 자신의 눈을 마주 보는 윤슬의 행동에 흠칫하고 말았다.

"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지만,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채워줍니다. 유대위님도 부디 그 빈자리가 어서 채워지길 바라겠습니다."

윤슬의 그 말에 시진은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써 외면해왔던 것이었다.

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과거 자신의 전우였다.

시진은, 전우를 잃은 것이었다.

자신의 손에 의해-

그렇기에 그 자리는 아픈 상처만이 빈 자리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 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벽을 만들었던 시진은 윤슬의 말에 무너진 벽으로 인해 그 상처를 마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윤슬은 무너져 내리는 시진을 그저 말없이 품에 숨겨주었다.

그 누구도 그의 무너짐을 눈치채지 않도록-

그것이 팀장의 자리에 서있는 유시진의 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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