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48
-out
그렇게 명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윤슬은 무전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쌤, 송쌤, 강쌤, 한쌤 여기 약품 창고인데요. 좀 와보세요! 큰일 났어요!"
민지의 무전에 약품창고로 발걸음을 옮긴 윤슬은 엉망이 된 약품 보관함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참, 뭐가 없어진거야?"
"마약성 진통제들이요. 다 사라졌어요."
"마지막 확인 시간이 언제예요?"
"오전 11시요. 낯선 사람도 없었고 사라진 환자도 없는데 어떻게 된건지…."
"하아, 사라진 환자는 없어도 사라진 사람은 있네요."
무언가 짐작이 된건지 무전을 든 모연이 파티마라는 소녀의 자취에 대해 물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봤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대장인 시진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시진은 곧장 윤슬과 모연을 데리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는 윤슬을 두고 먼저 차에서 내린 시진과 모연은 술집 안으로 들어갔고 안에는 발렌타인이 평소처럼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팔아도 정보와 여자는 팔지 않는다'가 철칙인 여성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간절한 정보처였다.
그래서 시진은 간절하게 여성에게 블랙마켓 정보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여성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시진은 그런 여성에게 고작 열여섯밖에 되지 않는 아이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면서 간곡히 부탁했다.
"[발렌타인, 도움이 필요해.]"
발렌타인이 그런 시진의 청에 마음이 흔들릴려는 찰나 그들의 사이에 끼어든 윤슬의 말에 발렌타인은 순순히 말문을 열었다.
"[…닐의 부탁이라면야. 마약성 진통제를 거래하는 블랙마켓은 몇 곳 있지만 그런 어린 아이가 믿고 갈 정도면 언령대가 낮은 사람이 속한 조직일거야. 그럼 이곳과, 이곳이 가장 유력해.]"
발렌타인이 가리킨 장소는 버려진 창고부지와, 빈민가였는데 그 중에서 창고부지를 먼저 가기로 결정한 그들은 발렌타인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나한테 할 필요없어. 나는 닐이 아니었다면 입을 열 생각이 없었거든.]"
그게 아무리 한 아이의 생명이 걸려있다 해도.
그에 윤슬은 발렌타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의지를 멋대로 바꿀 생각은 없지만 구할 수 있는 생명이라면 구해도 좋다고 생각해. 그럼 다음에 봐.]"
"[…건강하기만을 빌어, 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수긍을 표한 윤슬은 그대로 가게를 나갔고 발렌타인은 웃음을 거둔 채 잠시 그들이 나간 문을 응시하다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몸을 돌렸다.
이제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다운타운 거리에서 멀지 않은 음침한 공터에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화물 창고들이 다닥다닥 불어있었는데 시진은 창고 골목길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워낙 넓은 터라 일일히 찾지 않는 이상 사람이 있는지의 여부는 알기 힘든 상태였다.
"여기서 어떻게 찾죠? 일일이 다 뒤져봐야 되나?"
모연이 차에서 내리면서 말하는 순간 기다렸다듯이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모연이 스프링처럼 튀어나가자 윤슬과 시진도 다급하게 모연을 뒤따라 뛰어갔고 도착한 곳에는 깡패들이 파티마를 둘러싼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멈춰! 때리지마!]"
"[군인 아냐? 군인이 왜 온 거야 여길.]"
모연의 외침과 함께 깡패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옮겨졌고, 그 중에서 군복을 입은 시진의 모습에 그들은 경계심 어린 기색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중에서 파티마의 멱살을 쥐어잡고 있던 사내가 뒷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들면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마. 총은 우리가 더 많아. 누굴 찾는지 모르지만 우린 아니었으면 해.]"
번지르르한 외모를 가진 사내를 보아하니 파티마는 그런 그의 얼굴에 넘어간 듯 싶었다.
선량해보이는 듯하면서도 봐줄만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비열한 미소를 짓자 완전 다른 인상이 되었고 그런 그를 가만히 관찰하듯이 바라보던 윤슬이 투덜거리듯이 말하는 모연을 엄호하듯이 자리를 옮겨서 섰다.
"또 총이야? 뭐 맨날 총이야 뭔 나라가."
"작전 상의도 없이 단독 행동 하니까 그렇죠."
"조금만 늦었어도 파티마가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구요."
"잘했어요. 우리는 총 맞을 위기지만 파티마는 무사하니까."
"둘 다 그만 하시고 작전이나 세우심이 어떻겠습니까."
윤슬이 나지막하게 말문을 열어서 말하자 상대편인 깡패들 중 한 명이 답답함 때문에 짜증이 일었는지 얼굴을 찡그리면서 끼어들었다.
"[뭐라고 떠드는거야.]"
하지만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듯이 총을 장전한 번지르르한 사내는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총 내려놔.]"
"어떡…해요?"
윤슬과 시진을 번갈아 보면서 불안에 떠는 모연을 향해 시진은 무엇인가 비책을 떠올린 것인지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내가 '지금!' 하면 무조건 도망쳐서 창고 앞으로 차를 갖고 와서 대기해요. 5분이면 돼요. 만약 5분이 지나도 우리들이 안 나오면 반드시 먼저 출발해요. 그게 우릴 돕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리고 옆에서 윤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말에 수긍을 하자 모연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을 표했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인내심이 다한 것인지 번지르르한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다가왔다.
"[아까부터 뭐라는거야 저새끼. 주둥이 닥치고 총 내려놓으라고!]"
"내려놓지, 내려놓잖아. 여기 내려놓으면 돼? 이 자리 맘에 들어? 형아가 어차피 이 총은 못 써요. 내가 이걸 쓰면 보고서를 엄청 써야 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시진이 들고 있던 손을 내려 허리 춤에 있던 총을 꺼낸 다음 바닥으로 몸을 낮추면서 깡패들의 동선을 파악하던 시진은 사내가 자신의 사정거리 내로 들어서자 빠른 속도로 사내를 가격하고 총을 낚아채면서 외쳤다.
"늬들 총 좀 쓰자. 지금!"
그러자 모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튀어나갔고 윤슬은 빠르게 근처에 있던 또 다른 깡패를 제압하고 총을 빼앗았다.
두 사람이 그렇게 깡패들을 제압하고 윤슬이 먼저 벌벌 떠는 파티마의 어깨를 감싸서 뒤로 물러나자 시진도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당한 그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대기 시작해서 그들은 벽 뒤로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윤슬과 시진은 침착하게 깡패들에게 총을 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을 간신히 피해 높이 쌓인 박스들에 맞은 총알들이 박스를 깡패들에게로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과격한 엔진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박살나면서 시진의 지프가 들어왔고 그 차에 탄 모연은 핸들을 이리저리 확확 꺽으며 깡패들과 그들의 사이를 헤집어 놓았다.
갑자기 쏟아진 박스들과 군용 지프의 등장에 놀란 깡패들이 우왕좌왕하는 순간 모연은 숨어있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빨리 타요! 파티마 컴 온! 빨리!"
그래서 윤슬은 파티마를 먼저 차에 태우고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쫓아오는 깡패들에게 총을 쏘면서 차에 올라탔고 시진도 깡패들을 막으면서 차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총을 밖으로 집어던지면서 마지막 깡패까지 넘어트린 윤슬은 망설임없이 엑셀을 밟는 모연의 행동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와 대박! 와 완전 신나! 따라오는 사람 없겠죠? 와 우리가 해냈어요!"
"허,"
"아 흥분이 가시질 않네. 이 맛에 군인 해요? 야호! 내가 적을 무찔렀다!"
모연이 신나하는 그 순간 깊은 한숨을 다시금 내뱉은 윤슬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얜 어떻게 알고 마약성 진통제만 골라서 가져갔을까요."
"뭐가 비싼 거고 뭐가 싼 건지부터 배우는 삶이었겠죠."
"사람들을 제일 많이 살리는 건 소독약이랑 항생제, 예방 백신 같은 싼 약들인데. 그런 것부터 배우는 삶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느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모연과 시진의 대화를 그저 가만히 듣던 윤슬은 모연의 다음 말에 픽하고 웃어버렸다.
"니 죄를 니가 알렸다!……가 영어로 뭘까요?"
하지만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이 뒷좌석에 있던 파티마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넌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선택의 여지 없어. 당장 학교부터 다녀.]"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왜 없어. 내가 널 구해버렸는데. 그리고 너 토 달지 마. 니가 토 다니까, 언니 짧은 영어가 길어지잖아. 언니 진짜 토할 것 같거든? 암튼, [학비는 내가 줄 테니까 학교는 마쳐. 공짜 아니야. 빌려주는거니까 나중에 갚아. 알았어?]"
모연의 말에 파티마의 거친 눈빛이 약간 순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을 감아버렸고 모연은 그런 파티마를 백미러를 통해 힐끔 보고는 말했다.
"얘 지금 내 얘기 다 알아들은 거 같죠."
"공짜 아니라는 대목이 특히 잘 들렸어요."
"그러라고 되게 굴렸어요. 약속을 했네 했어 내가…… 어휴……."
핸등 위로 머리를 가볍게 콩콩 찧으면서 운전하는 모연의 이마를 가볍게 감싼 윤슬의 행동에 모연이 정면을 보면서도 윤슬의 이어지는 말에 웃어버렸다.
"그러다 우리 죽습니다."
"네, 운전 잘 하겠습니다."
다시금 운전에 집중하는 모연의 모습에 시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파티마 학비, 지원해줄겁니까?"
"왜요?"
"의사 연봉 많나 봅니다? 누군가의 인생에 손 내미는 건 책임질 일이 느는 겁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냥 하는 거죠. 엉망진창이더라도."
"이렇게 만난 사람들을 다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파티마의 삶은 바뀌겠죠. 그리고 그건 파티마에겐 세상이 바뀌는 일일 거예요. 그럼 됐죠 뭐."
"그런 의사 아니라면서요."
"그런 의사할려고요."
"왜요?"
"이래뵈도 선배님의 후배인데 선배님의 자랑스러운 후배님 좀 되고 싶어서요."
시진은 모연의 말에 잠든 것 같이 눈을 감고 있는 윤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픽 웃으면서 말했다.
"선배님이나 후배님이나 다들 대단한 사람들이었네요."
"별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모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고 윤슬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댓글 1
Nil 창작자
이 편에서 저는 모연의 "세상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파티마의 삶은 바뀌겠죠. 그리고 그건 파티마에겐 세상이 바뀌는 일일 거예요. 그럼 됐죠 뭐." 라는 대사를 가장 좋아했고 울었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에서 저 대사를 꼭 다루고 싶었습니다. 나라는 존재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나의 선행 하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복일수도, 구원일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던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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