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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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 시간이 다 되서야 부대에 돌아온 시진과 모연은 메디큐브에서 끌려나오는 진소장과 그를 끌고가는 대영을 보고 놀랐는데 그에 시진은 대영에게로 갔고 모연은 메디큐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메디큐브 안은 정적이었는데 그 정적의 중심에는 윤슬과 명주가 있었다.

명주는 방금 끌려나간 진소장의 무례한 언행과 행동, 그리고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깔봤다는 점에서 열받은 상태였고 윤슬은 자신이 아끼는 후배와 동료들이 고작 저딴 인간에 의해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에 밖으로 나가려는 걸 자애와 민지가 말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 강쌤! 한쌤 좀 말려주세요."

민지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자 윤슬에게로 다가간 모연은 화로 물든 무표정인 윤슬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고 가만히 서있는 것과는 별개로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말문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시는 게 어때요? 그러다가 상처 또 터지면 이번엔 가만 안 둡니다."

"…하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윤슬의 기색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는데 그걸 본 민지와 자애는 그에게서 떨어져 각자 할일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밖에서는 대영이 진소장에게 협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인간에게는 말보다 신체적인 협박이 확실했고, 그것을 대영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소장은 금세 저자세로 대영에게 빌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했다.

하지만 진소장은 한시라도 빨리 아구스의 시선을 피해 우르크를 떠야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여기서 나갈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아구스에 손에 죽는 것이었고 여기서 나가지 않고 군인들의 손에 죽는 것도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진소장이 다시금 말문을 열려는 걸 대영이 제지하려는데 시진이 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런 시진의 등 뒤에 서있더 치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비행기표, 필요하세요?"

"에?"

"지금 이게 뭐하시는 짓입니까?"

대영이 나지막하게 시진을 쳐다보면서 묻자 시진이 그저 무릎을 꿇은 진소장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 난 서상사가 사람 하나 죽일까봐 걱정되서 따라왔다가 여기 이선생이 할말이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

그에 대영의 시선이 치훈에게로 넘어가자 치훈이 고개를 푹 숙였고 대영은 그런 치훈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본인의 의사가 그런거라면 괜찮습니다만 강제라면 말리겠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거니까 괜찮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행패를 부린다면 봐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일단 진소장은 치훈의 말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도 더이상 없없고, 본래의 목적인 비행기표도 얻었기 때문에 조용히 막사 한 곳에 몸을 숨겼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시진이 그런 치훈을 향해 묻자 치훈은 가만히 자신의 손 끝을 바라보면서 자신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안 갈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요."

"…."

시진은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치훈의 안색을 보면서 다시금 묻고 싶은 질문을 접어 넣었다.

지금의 치훈에게는 어떤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하다고 판단한 시진은 그저 치훈에게 팀장인 모연에게 그 대신 진소장이 귀국진에 합류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두겠다는 말을 끝으로 치훈에게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시진인 발걸음을 옮기고 만난 것은 모연이 아닌 윤슬이었다.

평소의 의사가운도, 사복도 아닌 환자복을 입은 윤슬은 평소의 피로한 안색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시진은 오히려 그 모습이 건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선생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산책입니다."

"오늘은 근처에 계시네요."

"멀리 가면 혼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픽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윤슬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는데 시진은 익숙하게 윤슬에게서 한걸음 떨어진 곳에 걸터 앉으면서 같은 곳을 바라봤다.

"상처는, 괜찮습니까?"

"예.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 없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제가 유대위님에게 걱정을 끼쳤나 봅니다."

윤슬의 덤덤한 말에 시진은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고작 걱정이란 말 하나로 묶기에는 자신은 온갖 감정을 겪었던 탓에 그 말에 온전히 맞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의 안전을 걱정한 것도 맞았다.

그래서 시진은 쉬이 그 말에 답할 수 없었다.

"유대위님?"

한참동안 답이 없는 시진의 태도에 윤슬은 의아해하면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러자 복잡한 얼굴인 시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윤슬은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저 여기 살아있습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아뇨, 그냥 유대위님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봐서 말입니다."

"…어떤 얼굴이었길래."

시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윤슬이 익숙한 웃음을 지어보였고 그런 윤슬의 얼굴로 시선을 둔 시진은 곧 윤슬의 말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자주 봤거든요. 제가 죽었을 때를 생각하던 사람들의 얼굴. 방금 유대위님 얼굴이 딱 그 얼굴이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몇 없는데 유대위님도 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되신 겁니까?"

"…."

덤덤한 윤슬의 말에 시진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윤슬은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면서 말을 이었다.

"유대위님께 제가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인 겁니까?"

덤덤한 윤슬의 말투에 시진은 더욱 답하기가 힘들었지만 마른 입술을 몇번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

이번엔 윤슬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진은 그런 윤슬의 정적이 두려운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제가, 불편해지셨습니까?"

시진의 불안감이 담긴 질문에 그제서야 윤슬의 말문이 열리고 시진에게 윤슬의 시선이 닿았다.

"아뇨."

짧지만 강렬한 대답에 시진은 멈칫했지만 곧 윤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윤슬의 시선에 담긴 아픔에 굳었다.

그 아픔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시진은 조용히 윤슬의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고 윤슬은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보답하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라지 않는 겁니다. 나를 생각하는 이들이 더 늘어나지 않기를…."

"제가 보는 한선생님은 보답할 줄은 몰라도 그 사람의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입니까?"

"어떤 게 말입니까?"

"제가 유대위님에게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들 가치가 있는 이유 말입니다."

시진은 윤슬의 물음에 잠시 머리 속을 정리했다.

자신이 왜 그의 죽음을 걱정하고 무서워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이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

"처음엔 이해자 같아서, 그 다음엔 너무 아파보여서, 그리고 다음엔 쓸쓸해보여서 시선이 갔습니다. 그 곁에 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선생님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겁니다."

"이제라도 저에게 설명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습니까?"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보이는 시진의 얼굴을 윤슬이 가만히 바라보더니 왼손을 들어 시진의 눈 위를 덮었다.

"내 옆은, 아픔 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아픔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아프고 한선생님이 안 아픈 겁니까?"

"…아뇨."

"그럼 제가 없다면 한선생님이 안 아픕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선생님의 옆에서 같이 있으면서 아픔을 덜어주는 건 안되겠습니까?"

윤슬은 자신이 가린 시진의 눈이 어떤 빛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이 전하는 의미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윤슬은 그런 시진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슬은 시진을 좋은 사람, 특전사에 너무 잘 어울리는 군인이면서도 불의를 참고 넘기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은 시진의 마음을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 있던 이들이 어떻게 떠나갔는지 지켜봤던 이가 바로 윤슬이기 때문이다.

차마 저런 인물을 자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잃게 만들 수는 없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시진은 윤슬의 대답보다 그의 목소리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목소리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였다.

그래서 시진은 윤슬이 자신의 눈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떼는 순간 자신의 눈을 굳게 닫은 뒤 그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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