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19
-out
룸을 빠져나온 윤슬을 시진이 따라잡아 붙잡자 윤슬은 그제서야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춰세웠는데 그에 시진이 숨을 내뱉으면서 윤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차라도 마시러 가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윤슬의 미소에 멈칫했던 시진은 곧 자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호텔을 나왔다가 올 때 여기 차를 타고 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겼었지만 곧 뒤따라 내려온 경호팀장이 차를 내어주겠다는 이야기에 두 사람은 아무 거절 없이 수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달렸는데 윤슬은 아까와 다름없이 창문을 살짝 연 채로 두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한참을 달려서 한쪽에 차를 세운 시진은 윤슬에게 내리면 된다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윤슬의 눈이 떠지면서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것을 가만히 기다려준 시진은 카페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윤슬에게 뭐 마실건지 물었다.
"유대위님이 사실 겁니까?"
"예. 한선생 지금 아무것도 안 가져오시지 않았어요?"
"아…."
"나중에 한국 가면 한선생이 사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예, 연락주시면 가겠습니다."
"그래서 뭐 마실겁니까?"
"시원한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가서 자리에 앉아 계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윤슬이 몸을 돌려 테라스 쪽으로 가자 시진은 카운터에 익숙하게 주문을 하고는 음료가 나올때까지 가만히 자신을 등지고 앉은 윤슬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음료가 나오자 그것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기요."
"아, 감사합니다."
옅게 웃으면서 잔을 받아든 윤슬은 가볍게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금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한선생은 멀미가 심합니까?"
"…예."
항상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낸 시진은 윤슬의 대답에 수긍했다가 곧 윤슬의 말이 이어지는 것에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예전에 귀 쪽을 다치면서 생긴 후유증인데 이 참에 한국에 돌아가면 치료할려고 생각 중입니다. 한국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이상으로 불편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 올 때 고생하셨겠네요."
"뭐… 그렇죠."
픽하고 웃어보인 윤슬이 다시금 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 시진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한선생은, 군인일 때가 그립습니까?"
"…글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냥. 문득 궁금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립다라…."
시진과 마주했던 시선을 다시금 테라스 밖으로 옮긴 윤슬은 잠시 말이 없었는데 그런 윤슬의 분위기를 시진은 굳이 깨려고 하지 않았다.
애정어린 눈빛으로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한 윤슬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애정어린 미소가 그려졌고 시진은 그런 윤슬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때 함께 생사를 오가던 전우들이 그립기는 합니다."
"…그렇군요."
"한번 더 그 때로 돌아간다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
애정어린 미소를 짓는 윤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진은 그 미소가 점차 슬픔으로 물들고 곧 사그라지는 모습에 더이상 어떠한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었지만 위험한 일을 하는 시진은 직감적으로 윤슬의 동료들을 왜 그리워하는지, 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알아차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적을 깨운 것은 시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 탓이었는데 윤슬은 덤덤한 얼굴로 시진을 봤고 시진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어, 나다. 유엔? ……누구? ……알겠다."
굳은 시진의 얼굴에 단번에 좋지 않은 일임을 알아차린 윤슬은 가만히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예."
웃으면서 시진을 배웅한 윤슬은 가만히 시진의 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봤고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시진의 자리에 누가 와서 앉는 것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미간을 찌뿌렸다.
"오랜만입니다. 대령, 아니 소장. 이었던가요?"
"…당신이 우르크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 그럴리가요. 소장님이라면 분명 알고 일행을 보내신 거 아니십니까."
윤슬에게 다가온 이는 윤슬을 알고있는 인물인듯 서글서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아있었고 윤슬은 그런 그를 서늘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강마음 상사, 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할려고 접근한건지 묻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더 화낼거라 생각했는데. 내 배신이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나 봅니다."
웃던 것을 거둔 그가 그리 말하자 윤슬은 그저 무표정으로 그를 봤고 그런 윤슬의 시선에 먼저 물러난 건 상대방이었다.
"나도 그럴려고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강마음 상사. 하나 충고하자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한들.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죠."
두 사람의 서늘한 시선은 강마음이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깨졌고 윤슬은 분노로 물든 눈동자를 창밖으로 돌리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복수를 꿈꿔왔지만 이렇게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팀장님, 당신의 마지막 길에 저 배신자 녀석 만큼은 동행시키고 싶었습니다. 이제라도 당신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당신의 용서가 닿을지, 당신의 분노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신께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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