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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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이후 잠시동안 옥상에서 머무르던 나는 다리를 몇번 두드리고 나서야 옥상을 내려와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새 수술복을 꺼내서 갈아입은 나는 오염된 수술복은 세탁물 통에 넣은 다음 손에 들고만 있던 가운을 걸쳤다. 그렇게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천천히 응급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오늘 당직이 송상현 선생님이었으니까 내려가면 얼빠진 듯한 얼굴과 함께 잔소리를 하기 위한 조근조근한 목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뭐 환자가 오겠다고 해서 내려간거라고 돌려 말해도 내가 이 시간까지 병원에 남아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테지만.

아니, 오히려 이 시간에 오겠다는 환자에 대해 캐묻고 나중에 보복하려 들지 않을까. 물론 그의 그런 보복이 한줌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걱정은 없었다.

"어? 어라? 아니 분명 오늘 당직이 없다고 들었던 임쌤이 왜 아직도 응급실에 계신 걸까요?"

응급실로 들어가자 다행히 응급상황이 없었던 것인지 곧장 나를 발견한 상현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가 확인해야 할 환자들의 차트를 한 번 더 체크했다. 그리고 오늘 수술했던 환자의 차트에도 추가사항을 덧붙여서 저장한 다음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예, 임서준입니다."

-"유시진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그의 말에 잠시 시간을 확인한 나는 알겠다는 말을 건네고 통화를 끊으려 했는데 그쪽에서 다급하게 덧붙이는 말에 잠시 통화를 유지했다.

-"혹시, 나중에 진료 받으러 와도 임선생님이 계실까요?"

"…언제쯤 말이십니까?"

-"다음 주 쯤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음 주면 계속 병원에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아니. 이 사람 보게. 선배님 다음 주 오프 있잖아요. 아니 모처럼 주말이 오프인데,"

"송선생님…."

"그러니까 좀 오프는 꼬박 꼬박 챙기라고요. 오늘 당직도 아니면서 지금 이 시간까지 뭐하는 겁니까."

옆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말하는 상현을 향해 시선을 옮기면서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지만 상현은 그런 내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이 능글맞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상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휴대폰 너머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풉, 주말에 쉬시나 봅니다."

"……하아, 저 말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면서 그렇게 말을 덧붙이자 너머에서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더해져서 답이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쉬는 날 부르는 건 좀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 주에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기고 나서 나는 가만히 꺼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목소리 하나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휴가가 괜히 휴가겠어? 이럴 때 쉬지 언제 쉬려고. 자, 이번엔 무박 3일로 달려보는 건 어떠십니까. 임서준 대령님.'

금방이라도 어깨에 팔을 두르고 술집으로 끌고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 착각은 꽤나 나를 감상적이게 만들었지만 그 끝은 냉정한 현실이 찾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더이상 만날 수 없는 그들에 대해서는 그저 추억으로 삼아야 하는 현실은 이 두 눈을 뜨기만 해도 마주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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