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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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이 정신이 없고 다급한 이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분주해보이는 응급실 내부에서 나는 익숙하게 오더를 내리고 차트를 작성하고 응급환자를 데리고 수술방으로 들어가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둑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구나….

그리 생각하면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나는 익숙하게 옥상 위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바닥에 누운 뒤 가만히 어둠으로 물든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해 되새기고 또 되새겼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볼 때가 가장 많이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 행동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드륵- 드륵-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이 옥상 바닥에 닿아서 만들어내는 소리에 손만 움직여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든 나는 저장된 이름을 보고 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임서준입니다."

-"강모연입니다. 선배 어디 계십니까? 수술 끝난거 아니였어요?"

"옥상에 있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갈 수 있도록 몸을 일으키던 나는 모연의 말에 멈칫했다.

-"그 아까 전에 수술실 앞에서 어제 선배가 진료했던 유시진 환자가 기다리던 걸 봤는데 만났어요? 따로 수납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래요? 나올 때 못 봤는데 그럼 그냥 돌아간 게 아닌가 싶네요."

-"뭐 그렇다면 그런거겠죠. 아, 선배 오늘 당직 아니던데 와인 한 잔 하실래요? 표닥이랑 한 잔 할건데."

"병원에서 음주는 적당히 하세요."

-"하하, 들켰네요. 그래도 뭐 아는 건 선배 뿐인 걸요."

"하아, 저는 조금 더 쉴거라 이만 끊을게요."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봐요."

"예."

그리 말하고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낸 나는 잠시 검게 물든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화면을 터치해서 화면을 띄웠다. 어플 하나를 누르자 화면에는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는 패널이 띄워졌고 나는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닥 천천히 번호를 하나하나 입력해 하나의 전화번호를 완성해 냈다.

그것은 어제 진료를 해주었던 유시진 환자의 개인 연락처로 기본적으로 병원 차트 기록에는 환자의 연락처도 기재되어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것을 이렇게 쓸 생각은 없었다.

누가 진료를 받으러 오는지에 대해 신경을 쓰기엔 내 스스로도 감당을 못하는데 그 누군가를 특별하게 신경쓸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로지 드레싱만 하면 되는데 굳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환자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수납을 추가적으로 안 했다면 오로지 드레싱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가 아닐 테니까.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사람은….

그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올린 나는 화면이 바뀜과 동시에 울리는 연결음에 가만히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해성병원 임서준이라고 합니다. 유시진 환자분 연락처 맞습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당사자임을 알 수 있었지만 형식상의 말을 내뱉은 나는 곧 이어지는 목소리에 섞인 숨을 고르는 소리를 캐치하고 그가 운동을 하고 있었던가 훈련을 하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제가 유시진입니다. 이거 임서준 선생님 번호입니까?"

"네, 오늘 왔다 가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상태가 안 좋아지신건지 한 번 확인하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아, 그건 아니고 어제 말씀 드렸잖아요. 진료 받으러 가겠다고."

목소리에 담긴 장난기에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내가 통화를 끝내기 위해 말문을 열려는데 먼저 그쪽에서 말을 덧붙였다.

-"혹시 지금은 시간 여유 되십니까?"

"…네, 뭐…."

-"그럼 혹시 지금 진료 받으러 가도 되겠습니까?"

"예? 지금, 말입니까?"

-"네. 가는데 한시간 반 정도 걸릴 것 같긴 한데, 괜찮으십니까?"

"……제가 오늘은 당직이 아니라서,"

-"아….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나는 그의 말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그에게 시간이 된다면 병원으로 오라고 답했다. 어차피 당직이 아니라고 해도 병원에 계속 있는 건 변함 없으니까 환자 한 명이 오나 안 오나 나에게는 별 다른 차이는 없없다.

-"그럼 두시간 뒤에 뵙겠습니다."

확연하게 밝아진 듯한 목소리에 떨떠름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내 눈 앞에 찾아온 것에 대해 한숨만이 내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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