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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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다음날 출근을 하니까 분명 오늘 오프가 아닐 모연이 없다는 점에서 의아해 하면서 상현에게 묻자 어제 일을 간략하게 전달해주었다.

"아… 그게, 어제 교수 임용 결과 나왔는데 강모연이 떨어졌거든요."

"강 선생님이 말입니까? 그럼, 누가 채용 되었답니까?"

"그……. 하아, 김은지 선생이 이번에 교수로 채용 됐어요. 그래서 어제 한 바탕 했고. 지금 강모연이라면 방송에 나오고 있을 걸요? 뭔가 꼬인 것 같던데 마침 어제 선배 오프여서 제대로는 못 물어봤어요."

그 말에 가만히 생각을 하던 나는 상현에게 알겠다는 말을 하고는 휴대폰을 꺼내들면서 응급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저 서준인데, 혹시 지금 바쁘십니까?"

-"음 아니. 우리 서준이 연락인데 바빠도 괜찮지. 그래, 무슨 일이니?"

"아… 다름이 아니라 혹시 해성병원 김은지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 싶어서 말입니다."

-"흠….잘 모르겠다만 필요하다면 알아봐주마.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머니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부정의 말을 건넨 나는 간단하게 내가 알고 있는 김은지 선생에 대해서 설명하자 어머니의 굳은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아무리 어머니가 군의관으로서 전역하셨다고는 해도 의사이신 건 그대로이시다보니 내가 말한 이야기로 인해 많이 화가 나신 듯 싶었다.

굳이 어머니께 말하는 건 아닌가 싶긴 했지만 이보다 더 잘 공감할 사람은 없었다. 같은 의사니까 할 수 있는 분노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 또한 그동안은 미뤄두었지만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었던 교수 임용에 대해 신경쓰였다.

모연이 교수가 되지 못해서 김은지 선생이 교수가 되어서가 아닌, 실력이 있는 이가 무너지고 실력이 없는 이가 살아남는 것을 막기 위해. 의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존재이지 권력을 위한 명분이 아니니까.

내가 그리 노력해서 얻어낸 것들을 그들로 하여금 망가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끝까지 해볼 생각이다. 그게 나의 파멸이라해도 같이 떨어져 보자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로비 부근에 틀어지고 있는 방송을 보고 잘 보이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화면 속에서 보이는 익숙한 얼굴은 평소보다 더 좋아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것이 진심이 아니라 가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온전히 웃을 수 없었다.

당직이 아님에도 오늘도 병원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었던 나는 저 얼굴을 보고 나니 그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한 잔 하자고 불러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콜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바로 응급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만큼은 딜레이 되는 일 없이 시간에 맞춰서 퇴근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집중해서 응급 환자들을 체크하고 처치해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교대 시간이 되고 응급실도 잠시 한산해지자 나는 퇴근해보겠다면 인사를 했다.

"어? 임쌤 드디어 칼퇴근하시는 거예요?"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최민지 선생님이었는데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데스크로 돌아오시던 하 선생님이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셨다.

"오늘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니면 어디 아프시다던가…."

"하하, 그런 건 아니고 강 선생님이랑 한 잔 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좋다는 답도 받았고."

그 말대로 아까 모연에게 문자 남겨둔 것에 대한 답장이 수긍이었기 때문에 술은 내가 사가겠다고 답을 전한 상태였다. 그런 나의 말에 어느새 다가온 상현이 어서 가라면서 등 떠밀었다.

그에 나는 웃으며 병원을 나섰고 지수와 모연이 자주 마시던 와인으로 두 병 골라서 모연의 집으로 향했다. 안주는 모연이 준비한다고 해서 따로 챙기지 않은 나는 모연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끌어안는 손길에 조심스럽게 도닥여 주었다.

"고마워요."

"별로."

뒤로 물러서면서 웃어보이는 모연의 모습에 옅게 웃어보인 나는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방 쪽 식탁 위에 소소하면서도 식사대용으로 할 법한 안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 안 하고 올 것 같아서 간단하게 사왔어요."

"고마워. 맛있을 것 같네. 나는 이걸로 준비했지."

"오- 최고인데요?"

웃으면서 외인병을 받아드는 모연의 모습에 나도 웃으며 손을 씻고 오겠다면서 몸을 돌렸다. 모연의 집은 종종 와본 적이 있었다. 물론 자주 올 정도로 친근한 건 아니었지만 한번만 봐도 기억하는 나에게 모연의 집 구조를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을 씻고 주방으로 돌아오자 벌써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둔 모연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걸렸나?"

"그럴리가요. 그냥 내가 빨리 준비해서 그런 거죠. 앉아요."

"응."

자리에 앉은 나는 가볍게 와인을 음미하는 것으로 모연과의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조용히 마시면서 분위기를 봤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모연 쪽이었다.

"선배. 이번에 내가 교수임용에서 떨어진 거, 들으셨어요?"

"…응."

"하긴, 그러니까 술 마시자고 했겠지만…. 선배, 나는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몇시간이고 수술방에서 지냈어요. 그리고 외과장님 논문도 정리해드리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게, 그게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

"근데 선배, 처음으로 내가 후회를 했어요. 오로지 교수라는 자리 때문에 차라리 내가 실력이 아니라 그 김은지처럼 뇌물이라도 드렸어야 했나 하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옳다고는 못 하겠더라고요. 선배가 어떻게 의사가 됐고 나한테 어떤 가르침을 줬는데, 내가… 그걸 놓아요…."

사실 나는 모연이 저리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 뭐라 정의하기 어려웠다. 모연을 처음 만난 것은 펠로우 시절이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로 약간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후회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무력한 것은 살릴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을 마주했을 때였다. 보호자의 치료 거부라거나, 보호자의 폭행으로 인해 환자의 치료가 지체되어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하거나 하는 여러가지 경우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잠시 휴식을 위해 나왔던 나는 우연히 임상실습을 위해 방문했던 이들 중 하나였던 송상현을 알게 됐을 때 조금이지만 숨을 트일 수 있었다. 무력한 나와는 달리 재치있고 상황에 맞춰 자신을 숨길 줄도 아는 그의 친화력에 홀렸던 나는 의도치 않은 방법으로 모연을 만났었다. 그 때 상현은 나에게 그리 말했었다.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인재. 그게 바로 모연을 향한 송상현의 평가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더 나아가서 모연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묘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생각을 하는 사람. 솔직히 의대가 치열한 경쟁보다는 자기 자신과 싸우기 바쁜데 그 시기의 모연은 자신을 이기는 것을 넘어서 나처럼 더 많은 지식들을 원하는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현재 임상실습을 나오는 상현보다 아직 본과도 들어오지 못한 모연에게 더 시선이 갔었다. 나의 과거가 떠오르게 만드는 이라서. 그래서 나는 펠로우 기간을 마무리 하는 그 때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혹은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모연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은 그저 나를 빗대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모연이 임상실습을 나올 쯤 병원을 떠나 군에 입대해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만난 것이 바로 얼마전 내가 죽을 뻔 했던 그 시기였다. 그 때 나를 수술한 것이 바로 그 모연과 상현이었으니까.

솔직히 그 이야기 듣고 나서 고마우면서 미안했다.

모연과 상현에게 있어서 나는 인연이 있는 선배 의사였을 테니까. 감정적으로 무리를 할 정도로 착한 이들이니까.

그런데 이런 순간까지 모연은 그런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그저 나는 과거의 나를 떠올리고자 모연을 도왔을 뿐인데 그런 모연의 표지판이 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나의 행동이 모연에게는 더 큰 무언가였다는 점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라고 권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라는 존재로 인해 자신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어버리는 저 모습은 달갑지 않았다.

나 조차도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데 왜 너는 그리 살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그 날 밤 나는 조용히 모연의 말을 듣고 또 들어주었다. 과거 그녀의 질문을 듣고 또 들었던 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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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BL

댓글 1


  • Nil 창작자

    모연과 서준의 나이차는 8살 상현과 서준의 나이차는 4살 하지만 서준이 평군 적인 나이 기준 3년 일찍 입학했기 때문에 레지1년차일때 상현이 입학/ 전문의 취득하고 펠로우로 지낼 초반이 상현이 본과 3~4년이라 임상실습 나온 시기이자 모연이 입학한 시기로 본과에도 들어오지 못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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