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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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10월의 마지막 날. 병원에 남아있으려던 나는 지수와 모연, 그리고 상현의 합작으로 강제로 병원에서 나와야만 했다. 어이 없음과 황당함에 허허로이 웃으면서 잠시 건물 앞에 서있던 나는 문득 익숙한 얼굴을 보고 그 쪽에 시선을 멈췄다.

사복 차림의 남자는 분명 진료를 받으러 오겠다 했다가 오지 않았던 유시진 환자였다. 그쪽에서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내가 그쪽을 쳐다보자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걸어왔다.

"진료받으러 왔는데 벌써 가시나 봅니다."

"아, 뭐…."

동료 의사들이 집 좀 가라면서 쫓아냈다 말하면 과연 무슨 반응일지 싶어서 뒷말을 되삼킨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안에 들어가면 다른 분들을 계시니까 진료받으실거면 가보세요."

"아뇨. 임선생님한테 진료받으러 온건데 안 계시다면 들어갈 이유가 없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난기를 담아 웃어보이는 그의 모습에 저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문득 그 몸이면 다른 의사들에게 보이기 불편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아, 제가 지금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간단한 정도면 집으로 가서 확인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내가 그의 몸을 한 번 훑어 보는 것으로 상태를 대략적으로 추측하면서 말하자 그는 살짝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물론 되는 건 아니지만 따로 진료비를 받을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상태 확인하는 정도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환자 본인이 동의 하신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혹시 동의하시는 게 아니라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뇨, 동의 합니다. 제가 모셔다 드리죠. 집이 어디십니까."

다급하게 말을 이으면서 자신의 차로 추정되는 차량을 팔로 가르키는 모습에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상태 확인만 해주고 보내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주소를 알려주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보니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지만 그 잠깐 동안에도 어질하고 울렁이는 감각에 차가 멈춤과 동시에 차에서 내려 숨을 들이마셨다가 깊게 내뱉었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인지 다급한 기색으로 달려온 그가 걱정이 섞인 말을 건넸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네, 가벼운 멀미입니다. 탈 것에 약해서…."

"아니, 그럼 미리 말씀하시지…."

"…가까우니까 이 정도는 버틸만 합니다."

진정하기 위해 나는 반쯤 숙였던 허리를 피며 두눈을 질끈 감았다 뜬 다음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괜찮다는 말을 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집은 모연이 추천해준 단독주택형 빌라 단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평수가 그리 크지 않아서 혼자 살기 적당하다 판단해서 고른 곳이었다.

집 안에는 기본적인 가구들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허전해보기도 했지만 어차피 집에는 자주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집이…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네요."

그래서 그의 말에도 그다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이 집은 명분 상의 집일 뿐 본가도 아니었고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습니까."

덤덤하게 그리 말한 나는 가운을 세탁물 통에 던지듯이 넣고는 그에게 주스 한잔을 건네주었다.

"일단 씻고 나올 테니까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목욕을 하기엔 무리일 것 같아서 간단하게 샤워만 하고 나올 생각으로 욕실에 들어온 나는 겉옷을 벗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몸에 새겨진 흉터들은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게 하기 좋은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 날의 고통도 함께 떠오르기에 그다지 달갑지 않은 흔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기도 했다.

이보다 확실한 흔적이 어디있을까.

다 씻고 나서 가볍게 트레이닝 바지에 긴팔 면 티셔츠를 입은 나는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어내며 거실로 나왔고 그러자 가만히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그가 보였다.

"…뭐 하고 계십니까?"

"아, 잠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딱히 볼만한 건 없을텐데, 아…."

문득 그가 몸을 틀어서 서면서 그가 보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곳에서 시선을 떼고 그에게 쇼파로 오라고 말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단숨한 디자인의 사각 액자였는데 그 안에 담긴 것은 가족 사진이었다. 물론 그 뒤에 숨겨진 것을 아는 나로서는 그것이 그리 덤덤하게 와닿지 않았다.

나만 가지고 있는 마지막 사진. 그 안에는 내가 속해있던 람다팀의 모든 팀원들이 함께하고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젠 나만 가지고 있는 그 사진은 내가 전역을 하면서 유일하게 군에서 들고나온 물건이기도 했다.

군에서 내가 했던 모든 작전들은 기밀이고 외부에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 그 액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그것을 보는 것이 꺼려졌다.

그 사진을 본다면 같은 소속일 그라면 바로 알아차릴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내 과거에 대해서―

"그때 상처는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쯤이면 실밥 뽑으셨을 것 같긴 한데."

"군 병원에서 뽑았습니다. 앞으로 잘 관리하라는 말만 들었죠."

태연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개의치 않은 나는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예."

그의 말에 그가 입고 있던 상의에 손을 뻗은 나는 왼쪽 상처부위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들어올렸고 그러자 무사히 아물어가는 상처가 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처 회복이 더딘 것이 무리한 것이 분명했다.

"격한 운동은 삼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았는데 무리하셨나 봅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대충 상처 회복이 더디다는 건 자가 회복 능력이 느리거나 이미 상처가 한번 덧났다가 회복하고 있다는 걸 텐데 이렇게 상처가 생기는 것에 덤덤한 사람의 자가회복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무리해서 상처가 한번 덧났다가 회복세로 들어가면서 더뎌진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대단하시네요."

"…다행히 아무는 속도를 보면 사흘정도만 지나도 완치될 것 같네요."

내가 옷을 내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쳐다봤다가 그가 나를 묘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음…. 역시 임선생님은 묘한 느낌의 사람이네요."

"…예?"

"상처 확인하실 때 옷을 전부 들어올려서 확인 안 하시는거,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니십니까?"

"……."

"그래서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금방 그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털어내면서 몸을 돌렸다. 그런 나의 행동이 답을 회피한다는 것임을 눈치챈 것인지 더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굳이 그런 그에게 확답을 하지 않았다.

굳이 모른 척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알고 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한숨만이 나왔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임선생님 혹시 식사 하셨습니까."

뜬금없는 그의 말에 머리를 털어내던 손을 멈춘 나는 가만히 몸을 돌려서 그를 응시했다.

"전 아직이라서 말입니다. 오늘 쉬시는 김에 저랑 식사 어떠십니까."

"…죄송하지만 오늘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요."

"그럼 시켜 먹는 건 어떠십니까? 어차피 배달음식은 2인분부터 배달되지 않나요?"

그 말에 나는 굳이 이 사람과 식사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지만 큰 문제는 없을거라는 생각에 수긍을 표하면서 집안 한 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책자를 집어들어 건네주었다.

"드시고 싶은신 걸로 고르시면 됩니다."

"임선생님은 드시고 싶으신거 없으십니까?"

"예.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 뒤로 식사는 한식으로 고르고 그 중에서도 비빔밥으로 정한 다음 주문을 넣었다. 오는데 30분 정도 걸린다는 말에 그 동안 그의 얼굴의 상처를 소독할 생각으로 한 쪽 서랍에 놓인 의료상자를 꺼내왔다.

"뭐하실려고요?"

"얼굴 상처, 소독 해야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가 새삼 깨달았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에 얕은 한숨을 내뱉고는 소독약을 꺼내 들었다. 다른 것과 비교한다면 작은 상처긴 해도 그냥 방치했다가는 흉으로 남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제대로 케어하지 않아 좋지 않는 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입가와 눈썹뼈 부근에 생긴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간단한 처치였지만 은근 이런 것을 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 또한 생소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이렇게 소독하는 군요."

"작던 크던 상처는 상처니까 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안 하는 경우가 대다수죠. 아, 파상풍 주사는 10년에 한 번 맞아두시는 게 좋습니다. 자주 다치시는 만큼 위험하다는 거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거즈와 약품을 정리하던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정리한 의료상자를 들고 일어서면서 그를 쳐다봤다.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군인이셨습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그냥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보면 동료랑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그의 모습에 느리게 손끝으로 입가를 매만지던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내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의료상자를 본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병역의무는 필수입니다. 그리고 제 말투는 부모님이 군인이셔서 그렇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데 부모님이 직업군인이십니까?"

"예. 뭐 두 분 다 전역하셔서 지금은 민간인 신분이시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저도 아버지께서 군인이시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도 군인이 된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도 어릴 때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하도 말리셔서 의사가 되긴 했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그래. 후회하지 않는다. 의사이기에 나는 동료를 살릴 수 있는 순간도 있었고 그 덕분에 더 많은 기억들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은 그렇게 되었지만, 나의 삶으로 인해 그들의 삶도 내 안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기밀로 시작해 기밀로 끝나버린 그들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이제, 나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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