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07

-out

해성병원에서 의료진들의 봉사일정이 확정되는 그 시기 발칸반도 끝자락에 자리한 우르크에서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남우르크의 수도에 주둔한 한국의 태백부대가 남북국경지대의 평화 재건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알파팀이 소속된 모우루 중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진이 중대장으로 복무중인 모우루 중대가 주로 하는 일은 국경지대에 유실된 지뢰를 찾아 제거하는 작업이었는데 그 중에는 불발탄이 대다수라고는 해도 뇌관이 아직 살아있는 지뢰들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미군에 헙조 공문을 보내서 처리해야하는 것이 맞았지만 시진은 그과정을 생략하고 병사들과 함께 지뢰를 제거했다.

그 제거의 중심에는 특전 폭파 전문인 대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시진과 대영은 태백부대 대대장인 박병수 중령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아주 본진에서 떨어져서 늬들끼리 지내니까 직속상관 지시사항은 지나가는 개 짖는 소리지? 불발탄만 제거하고, 신관 살아있는 폭탄들은 미군 EOD에 넘기라고 내가 몇번을 강조했어! 누구야! 어떤 새끼가 일 이따위로 처리했냐고!"

박중령의 고압적인 말에 그의 앞에 차렷자세로 서있던 시진과 대영은 지겹지만 익숙한 생각을 머릿 속에서 되짚었다.

8개월동안 줄기차게 들어왔던 소리이면서 그들에게 내릴 징벌도 무엇일지 알고 있는 그들은 박중령의 노호성 깊은 말은 깊게 되새기지 않았고 이후 시진과 대영은 당연하게도 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달렸다.

자신들의 몸을 혹사시키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겁없이 돌아다니는 아이들 때문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은 이곳저곳을 헤매면서 먹을 것을 찾아헤맸고 그 탓에 만일 시진이 미군 측으로 협조 공문을 보낸 후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안전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돌면서도 시진은 웃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시진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더라도 이렇게 아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시진의 의견에 동의하는 대영 또한 그런 시진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연병장을 달리는 시진의 곁에서 묵묵히 함께 달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르크 태백부대에 소속된 모우루 중대의 일원이자, 곧 파병기간이 만료되는 한국 군인들이었다.

그로부터 몇일이 흐르지 않았을 무렵 시진은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일과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어 한가한 오후를 그렸던 그에게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언덕 위에 있던 그는 아래로 달리면서 무전을 보냈다.

"빅보스 송신! 중대장이다. 정문 초소 상황보고 해!"

"파콜로 송신! 정문 이상 없습니다. 산악도로 쪽 차량사고 같습니다!"

임중사의 답변을 들은 시진은 합류한 대영과 함께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 유엔 화물 탑차를 확인했고 이리저리 흩어진 의약품 상자들을 대충 넘긴 그들은 곧장 생존자 확인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운전자 석에는 유엔 구호단체 옷을 입은 백인 남성이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었는데 그에게 다가간 대영은 가만히 맥을 짚었고 곧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의 죽음을 알렸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는데 그것을 들은 시진이 굳은 얼굴로 수신호를 했고 대영은 그런 시진의 신호를 확인하더니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Freeze! Hands up!"

대영의 목소리를 들은 시진은 죽은 남성을 관찰하던 시선을 거두고 곧장 차키를 빼들어서 대영이 있을 반대편으로 움직였고 그곳에는 머리를 짧게 깍은 백인 남성이 자신이 입은 유엔 구호단체 티셔츠를 가리키며 자신을 쏘지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남성의 비무장을 확인한 대영이 물러서자 사내는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운전석 쪽으로 물러났으며 시진은 빼온 차키를 대영에게 던져주었다.

차키를 받아든 대영은 바로 뒷쪽 화물칸을 확인하러 움직였고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시진은 운전석 쪽으로 다가간 남성에게 조용히 접근했다.

그 후 남성이 차키가 빠진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 아래에서 총을 꺼내는 것을 본 시진은 재빠르게 개머리판으로 권총을 쳐낸 다음 그를 결박했다.

"팀장님!"

시진과 대영의 뒤에서 그들을 엄호하기 위해 물러나있던 부대원들이 그것을 보고 단번에 시진에게 달려와 남성을 인계해 갔고 시진은 가만히 떨어진 권총을 주워들다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대영의 목소리에 화물칸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물칸에는 AK소총 등의 무기 상자들이 가득했는데 모두 유엔 구호상자 안에 숨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죽은 운전자와 방금 인계한 남성은 북우르크에 무기를 밀매하는 블랙마켓 조직원일 가능성이 농후해졌고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신분증, 차량 모두가 가짜일 가능성도 높았다.

전쟁은 멈췄다해도 도시의 뒷골목은 여전히 악당의 소굴이었고, 그 탓에 유엔 평화유지군의 감시를 피해 무기 밀매, 마약, 인신매매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는 인면수심의 인간들이 넘쳐났다.

"이 건은 본진에 보고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보고서가 산더밀 텐데 말입니다."

이후 우르크 시내에 있는 태백부대 본진에 도착한 시진은 곧장 대대장실에 가서 보고를 했지만 보고를 받은 박중령은 나지막하게 시진을 타박하면서 블랙마켓에 대해 눈을 돌리라고 말했고 시진은 그런 박중령의 말에 더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건 가져가고. 모우루 중대에 긴급 전출 인원 한 명 있다."

박중령의 말에 살짝 내려깔고 있던 시선을 올린 시진은 그가 건네는 서류를 건네 받으면서 복잡한 얼굴로 박중에게 되물었다.

"서상사, 말입니까?"

"특전사로 전출 명령이야. 특전사령관 직권에 의한."

명령서에는 특전사령관인 윤중장의 직인이 분명하게 찍혀있었고 대영과 명주의 사이를 아는 시진의 입장으로서 군인으로서 존경하는 윤중장이 대영에게 대하는 태도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진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기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모우루 중대의 부중대장인 대영의 귀국일이 정해졌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모우루 중대에는 의료봉사팀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성그룹은 유엔을 통해 건설업체뿐 아니라 의료, IT 등 사업 전반에 걸쳐 우르크로 시장을 확장할 계획인지 유엔에서 해성그룹으로 백신을 요청하는 것을 기회삼아 해성은 야전병원에 의료봉사팀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의료 한류'를 조성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정부도 해성그룹에 적극 지원을 약속하자 소문은 사실이 되었고 그 증거로 본진에서 연락을 받은지 일주일만에 태백부대 소속인 모우루 중대에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로 보이는 메디큐브가 헬기에 의해 옮겨졌다.

메디큐브는 겉보기와 달리 수술실까지 완비된 최첨단 이동식 병원시설이었지만 의료와는 거리가 먼 장병들에게는 그저 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선과 같은 느낌을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그것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의료팀 명단, 보셨습니까?"

명단이 담긴 서류를 들고 걸어온 대영의 나지막한 질문에 복잡한 눈으로 메디큐브를 바라보던 시진의 말문이 열렸다.

"네, 봤습니다."

"이번에 부팀장으로 오시는 분, 그 의사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팀장님 여기 있는 거 그분은 압니까?"

"여기인 줄은 모를겁니다."

시진은 이번에 의료봉사팀에서 부팀장이라는 자격으로 명단 속에 있는 이름 석자를 보고 그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천천히 떠올랐고 그의 모습도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첫만남 이후로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일부러 대영을 데려다 주는 척 해성병원에 들렸을 때 멀리서 수술실로 뛰어들어가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게 옳은 일인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해성병원에 다신 발걸음 하지 않았던 시진은 이런 식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에 묘한 마음이 생겨났다.

메디큐브가 내려앉은 곳이 바로 모우루 중대 내이므로 그들의 경호임무는 자신들이 맡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것은 곧 사실이 되었다.

태양빛에 뜨겁게 달궈진 활주로 위에 의료봉사팀이 서있었지만 시진의 눈에는 단 한사람만이 들어왔다.

팔다리가 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살갗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옷이 얇은 탓에 자연스러운 굴곡은 드러난 그의 몸은 어떻게 보더라도 단련이 된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깊게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그였지만 나이와는 달리 동안으로 보이는 그의 빛나는 외모는 감추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 시진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의 끝에는 자신은 없었고, 지금 그의 시선 끝에는 모연이 서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