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24

-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치면서 기나긴 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평화로운 부대의 모습에 안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 나는 별 어려움없이 시선의 끝에 서있는 이를 알아차리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걱정이 서린 시선을 뻗치는 것은 유시진이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의 시선에 호응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그는 결국 지나가다 부딪힌 것 뿐이니까. 저런 시선의 이유를 받은 이유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에게 걱정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단순히 경호 임무 대상을 걱정한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저 시선을 굳이 내가 신경쓰는 것은 그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 맞았다.

"선배!"

"아, 강 선생님."

걸음을 옮겨 약품창고에 가려던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섰다가 모연이 나를 부르며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연의 품에는 차트 두어개가 들려있었는데 그것을 나에게 떠넘기듯이 안겨준 모연이 말했다.

"지금 약품 창고가려고 했던거예요? 그럼 가는 김에 이거 가지고 가서 이치훈한테 체크 하라고 전해주시고 오실래요?"

"예? 그렇다면 제가 체크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선배, 선배가 여기서 얼마나 고급인력인지 알아요?"

"…예?"

"약품 체크 정도는 이치훈한테 맡겨도 괜찮으니까 선배는 저랑 발전소 쪽에 가서 같이 검진하는 걸로 해요. 마치 인원이 더 있었으면 했는데 같이 가주실 거죠?"

모연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말을 아꼈다가 조용히 웃으면서 수긍의 답을 건넸다. 어차피 저 시선에서 벗어날려면 그 쪽이 더 나은 선택지일 것 같아서 내뱉은 수긍의 말이었지만 모연은 모르는 듯 싶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쪽에서 떠올렸다.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알게요. 자, 빨리 가서 전달하고 오세요. 저는 가서 발전소 현장에 갈 물품 마저 체크해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와요."

모연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서 가버리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나에게 향하던 시선이 거둬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약품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약품창고에는 이 선생을 제외하고도 김 선생을 비롯한 인원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내가 창고에 들어오자 일부는 바로 나에게 인사를 해왔고 다른 일부는 자신에게 할당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선생."

"아! 임쌤! 무슨 일로…."

이 선생은 이미 차트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내가 전달하는 차트까지 확인하고는 질색한다는 느낌과 이것을 무마해야한다는 느낌이 뒤섞인 기묘한 얼굴을 하면서 자신의 품으로 차트를 끌어당겨서 안았다.

"강 선생님이 이것까지 체크하라고 하라고 말하면서 전했습니다."

"으…. 그거까지 말인가요?"

"제가 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오늘 발전소 쪽으로 가는 팀에 합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아니, 그게 아니어도 임쌤이 아니라 제가 해야죠!"

내 말을 들은 이 선생은 기겁하는 얼굴로 차트를 받아들었던 팔이 아닌 펜을 든 손을 다급하게 휘적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그저 웃으며 알겠다는 말과 함께 수고하라는 말을 전하고 기존에 발전소 검사 현장에 가는 팀이 출발한다고 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팀원들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단체복은 따로 배부하기 때문에 굳이 개인적으로 물건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나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빈 몸으로 집합 장소에 도착한 나는 출발 차량에 올라타기 전 모연이 건네준 멀미약을 들이킨 뒤 조수석에 올라타 이동 내내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도착한 발전소 건설 현장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다. 그런 인상을 받으며 건설 현장을 잠시 응시하던 나는 다른 이들을 도와 검사 현장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 일단 백신주사와 부상자 체크 등의 사항을 간략하게 체크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내가 할 일은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빠른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이 불가할 정도로 많은 것은 상당한 시간 소모를 발생시켰다. 덤으로 현지어만 쓰는 인부들의 경우엔 서로가 의사소통을 못하는 문제로 인해 더 많은 시간 소모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짧은 것이 아니라 나는 그들을 진료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대충이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예전의 지식을 통해 간단한 현지어 정도라면 할 줄 알았던 나는 최대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목소리에 경청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어려보였던 인부 중에 먹여살릴 가족들이 있는 이들도 있고 단순히 갈 곳 없어서 일을 하러 왔다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모인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만들어 나가는 발전소는 결국 하나의 건축물이 되겠지. 뭐라고 해야할까, 묘한 감각을 알게 해주는 발전소 현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다른 이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뒷정리 하는 것을 도왔다.

이제 모두가 부대로 돌아가게 될거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온 모두는 아직 낯설게 분명하지만 익숙해지려 애쓰는 저녁을 챙겨 먹은 뒤 각자의 자유시간을 누렸다. 그 속에서 나도 가벼운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부대 내부의 돌담이 쌓인 길을 가만히 걷던 나는 문득 뒤에서 들리는 발 소리에 느리게 걸음을 멈춰세웠다.

"……."

내가 멈춰서자 자연스럽게 뒤에서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도 멈춰섰고 나는 반사적으로 날카로워지는 감각으로 인해 한계 근처까지 몰아붙여진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그렇지만 그 반사적인 현상에도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던 나는 가까스로 선제공격을 하려던 생각을 거둘 수 있었다.

저 발걸음 소리의 주인을 알기에 나는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상대는 생각치 못한 상황이라는 듯이 놀라움을 드러냈다가 특전사 답게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아내던 나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유 대위님."

"네."

자신의 뒤를 따르던 이의 정체를 입에 담아내자 상대에게서 답이 돌아왔지만 그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잇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눈에 담긴 많은 감정들은 나에게 닿을 때면 요동쳤다가 가라앉고는 했으니까.

"…하아, 제 감시를 명 받으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나도 모르게 잠시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던 나는 금방 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그의 행동이 그저 작은 회피임을 안 나는 그저 두 눈을 감았다 뜨면서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했다.

"그럼 왜 제 행적을 확인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무엇인가 말을 하려던 그의 말문이 턱 막혔는지 그의 얼굴은 복잡함을 짧게나마 내비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무슨 상황이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무라바트 의장과 연관된 이번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올 경우 과거에 일망타진 했던 세력의 또 다른 지지세력이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무라바트 의장의 적대세력은 지금도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불가능한 전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대장의 위치에 있는 이를 내 감시 겸 경호 인원으로 쓰기엔 과하지 않나.

귀한 신분의 인물을 데리고 있음을 광고할 게 아닌 이상에야 이런 배치는…. 하지만 그들의 방식을 따진다면 중대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라도 버겁긴 할거다.

아아, 나는 어차피 이제 병역의무를 지고 있는 군인이 아니다. 이런 문제를 굳이 내가 생각하고 고려하면서 따질 필요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문을 닫은 유 대위를 향해 말했다.

"제 일을 방해하지 않는 선이라면 협조할 테니 선은 지킵시다."

"…알겠습니다."

그를 등진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로 돌아갔고 평소대로 샤워를 마친 뒤에는 바로 취침 준비를 했다. 내가 막사로 돌아간 이후에는 따로 감시의 시선은 없었기에 내가 애써 잊고 있던 과거를 되새기는 악몽과 함께 밤을 지새워도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