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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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은 기침과 고열로 인해 격리 조치된 케이스였고, 그는 의사가운 대신 환자복을 입고 베드에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지진 발생 이후 모든 의료진은 쉴틈없이 움직여야만 했고 만약 환자의 상태가 급변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해야만 했기에 상현은 이렇게 맘 편히 누운 지금이 꽤나 기꺼우면서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상현은 곧 병실 문이 열리더니 들어온 자애를 보고 바로 상체를 일으켜 앉아 빙긋 웃어보였다.

평소라면 우스갯소리를 내뱉었을 그였지만 그는 곧 기침을 내뱉으면서 한 손으로는 자애의 접근을 막았다.

그런 상현의 모습에 자애는 멈칫하더니 상현을 심각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상현은 그런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들고온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트북은 뭐하게."

"심심할 거 아냐. 게임이나 하게. 모아놓은 아이템 다 쓸라고. 이 판국에 아껴 뭐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애가 열을 재기 쉽도록 자세를 고친 상현은 체온계를 확인하는 자애를 바라봤다.

"38.7도… 열이 안 떨어지네. 따끔할거야."

평소보다도 더 무뚝뚝하게 상현에게 말하는 자애의 모습에 상현은 그저 채혈을 하는 자애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지난 30년간 상현이 알아온 자애는 무뚝뚝해질수록 그 속에서는 순두부처럼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되어있었기에 지금 무뚝뚝한 지금의 그녀는 속이 많이 상했다는 것임을 상현은 알 수 있었다.

"넌 옛날부터 피 참 잘 뽑아. 한 방에 쭉쭉."

그런 그녀의 속을 알아차린 상현은 너스레를 떨었고 그런 상현의 행동에 자애는 익숙하게 말을 받아칠 뿐이었다.

"처음부턴 아니었지. 간호 실습생 시절에 의대생 친구 팔뚝 하나 아작 낸 다음부터니까."

"기억하네?"

"고맙게 생각해. 피 뽑을 때마다. 꾹 눌러."

그런 자애의 채도에 상현은 평소처럼 장난기를 담아 말을 이으면서도 착실하게 그녀가 건네준 알콜 솜으로 지혈을 했다.

"너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냐? 나 죽을 것 같아서? 양성에 한 표야?"

"한 대 쳐맞는다에 세 표다."

그렇게 말하면서 상현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내려진 자애는 엄살을 부리는 상현을 흘겨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때 너 그냥 감기야. 특이증상은 엄살이고, 아프면 호출해."

"보고 싶으면?"

서둘러 나가려는 듯한 자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상현이 웃음기를 거두고 하는 말을 들은 자애는 움직이려던 발을 멈칫하고 정면을 우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전에 올게."

그리 말하고 나가는 자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상현은 고열과 기침으로 인해 피로했던 몸이 다 나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상현이 자애를 처음 만난 건 일곱 살, 유치원 때였다.

그때의 상현은 또래보다 덩치도 작고 몸도 약해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 탓인지 상현은 뛰어노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고 다른 아이들과 있는 것보다 홀로 있는 것을 더 선호했었다.

반대로 자애는 키도 크고 성격도 명랑래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무엇보다 승부욕이 강했던 그녀는 남자아이들의 장난에 절대 말려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마냥 부럽고 신기해 했던 상현이 성격도 취미도 달랐던 자애와 친해진 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 우르르 쾅쾅 내리치는 천둥소리에 유치원 아이들은 두려움을 가득 담은 채 의지할 곳을 찾았는데 일순위는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을 선생님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렇기에 상현은 선생님의 손길보다 평소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책의 의지하며 그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상현에게 다가온 것이 자애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을 본 상현은 자신의 옆에 바싹 붙어 앉은 그녀가 대뜸 책을 읽어달라는 요구에도 흔쾌히 응했다.

아무리 책을 의지하고 그 속에 숨어들어도 홀로는 무서웠던 상현은 자신에게 다가와준 자애가 내심 반가웠기에 최선을 다해 자애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상현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흉내내거나 목소리를 바꿀 때마다 까르르 웃는 자애의 웃음소리가 상현은 너무 좋았고 그 뒤로 상현은 자애와 단짝이 되어 30년 간 우정을 유지해왔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성립되려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는 말을 SNS에서 읽은 상현은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상현은 자애를 사랑했고, 그들의 우정은 지금껏 유지되어 왔으니까.

상현은 자애가 사라진 병실의 문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가 가져다준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윈도우창에는 다섯개의 폴더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직박구리' 폴더를 클릭한 상현은 10대부터 30대까지 찍은 자애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상현과 찍은 사진도, 자애의 독사진도 있었지만 상현에게 그것은 남몰래 키워온 그녀에 대한 사랑이 담긴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모두가 소중했다.

본래라면 자애가 자신을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바라봐줄 때 이 사진들을 모아 프러포즈할 계획이던 상현은 폴더를 닫고 돌아온 윈도우 창에 자리한 '올빼미' 폴더를 클릭하면서 생각했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늘 예기치 않은 변수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된 상현은 M3 바이어스와의 전쟁이 끝나면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큰 이유는, 사랑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올빼미 폴더가 열리자 그동안 그가 연구해 온 바이러스 관련 논문들과 기사들이 정리되어있었는데 그 안에는 그가 병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기록하거나 윤슬에게 조언을 얻으면서 정리했던 정보도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 M3 바이러스에 대해서만 추려낸 상현은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치료제를 찾는 것, 그것이 의사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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