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 백업

[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31

-out

발전소는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엉망인 상태였다.

랜드마크처럼 서 있던 한국어 대형 입간판이 반으로 꺾여 땅에 처박혀 있고, 건물 자체는 반쯤 무너져 내린 채 외벽이 남아 있는 2층 높이에는 트럭이 처박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폭탄이 떨어지고 난 이후의 땅처럼 황폐하고 무참한 광경이었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군인들과 살아남은 현장직원들이 먼지가 자욱한 사고 지역에서 부상자들을 구조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의료진은 잠시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막내 간호사인 민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계속 울어대고 있었지만 같은 기분임에도 불구하고 모연은 울 수 없었다.

이 현장에서 여자로서의 강모연이 아닌, 인간 생명의 존엄을 알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의사로서의 그녀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국장과 치훈을 통해 의료진을 모이게 한 모연은 군용트럭에 싣고 온 응급 키트를 의료진에게 나워주었고, 자애를 비롯한 간호사들은 의료진에게 의료점퍼와 트리아제 비표를 나눠주었다.

"환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의료팀 잠바 입으시고, 트리아제 분류법은 알고 있죠?"

"비응급은 녹색, 응급은 빨간색 그 외의 부상환자에게는 노란색."

"그리고, 현장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의 중환자에겐 사망자와 동일한 검은색, 검은색 비표가 붙은 환자는 포기하고 살릴 수 있는 환자에게 집중합니다."

모연의 말에 의료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에게 할당받은 응급 키트를 짊어졌다.

모연도 응급 키트를 짊어지고 움직이려다가 순간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봤다.

급하게 오느라 갈아신을 생각을 하지 못한 하이힐의 존재에 모연은 망설임없이 굽을 부러트리고 다시금 발에 신발을 신었다.

"모르핀이나 데메롤 처방은 교수님 오더 받고 합니까?"

"아니, 일일히 그럴 수 없어. 주변 상황에 따라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해서 가능한 최선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세요. 자, 이제 가죠!"

그렇게 의료진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 시각 윤슬은 군인에게 전달 받은 안전모를 머리에 쓴 채로 부상자를 구출하는 중이었다.

간단하게 상태를 체크하고 진단을 내리면서 환자들을 분류한 윤슬은 곧 의료진이 도착함을 보고 서둘러 그쪽으로 그들을 불러 우선 구조자들의 치료를 맡기고 그들에게 전달 받은 조끼를 걸쳤다.

그리고 곧 바로 구조현장으로 달려나갔다.

아직 구조할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의 다리는 멈출 수 없었다.

낙석이 떨어지는 현장에서는 구조대원도, 구조자도, 의료진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망설임없이 구조자를 위해 움직였고 달렸다.

그러던 중 윤슬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상황실 텐트 쪽에 의료진들이 모여있는 걸 보고 가만히 그쪽을 쳐다봤다.

"정신 안 차려? 안 차리고 싶어? 그래도 지금은 안 돼. 어리광 그만 부리고 의사면 의답게 행동해."

상현의 고함 소리가 멀리 서있는 윤슬에게까지 닿았고 그 소리를 들은 윤슬은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의사예요. 환자 분류 하나 못 하는데… 내가 무슨 의사냐고!!"

"너 의사야. 지금 이 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 너 그런 의사니까 네 환자 네 손으로 사망선고하고 의사가 필요한 곳으로 가. 살릴 수 있는 다른 환자에게 가라고. 생존자들 구조 요청 소리 안 들려?"

냉정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이었고 마주해야할 진실이었다.

스스로가 버텨내고 일어서지 못 한다면,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윤슬도 그 곳에서 눈을 떼고 다시금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모연은 흐느끼는 치훈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며 말하고는 돌아섰다.

"부탁한다, 이치훈."

"사망시간, 우르크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 40분…."

"수고해…."

그리고 그 뒤로 치훈의 사망선고를 내리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그것을 바라보던 상현이 방금 고함을 치던 목소리와 상반되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스스로가 말했던 것처럼 의사가 필요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구조자의 고립시간도 빠르게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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