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35
-out
윤슬이 강민재 환자를 구하기 위해 건물 안에 고립된 그 시간 건물 밖에서는 치훈이 벌벌 떨면서 주저 앉아 있었다.
여진이 시작되자 치훈은 자신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다급하게 윤슬을 불렀고 그런 치훈의 부름에 한달음 달려온 윤슬이 건물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본 치훈을 충격에 휩싸인 채로 어떻게 건물을 빠져나왔는지도 모른 채로 건물을 나와 주저 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치훈의 모습을 발견한 최중사가 치훈에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지만 치훈은 공포에 휩싸인 채로 벌벌 떨면서 고장난 테이프처럼 안에 생존자가 있다고만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래서 최중사는 심각한 얼굴로 치훈이 뛰쳐나온 것이 분명해보이는 입구를 바라보다가 무전으로 생존자의 위치를 간단하게 알렸다.
그리고 안전한 쪽으로 이동을 도와주려던 최중사는 치훈의 거절에 어쩔수없이 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의사라는 이름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치훈은 경험이 적었고 심성이 너무 여렸다.
"지금 안에 한선생님도 고립되어있다는 말입니까?"
"예, 방금 무전으로 환자가 고립된 위치를 알려줘서 물어보니까 여진 때 같이 추락했다고 했어요."
"하아, 무사하다고 합니까?"
"그런 것 같긴한데 직접 봐야 알 것 같아요. 선배라면 분명 다쳐도 안 말하실 게 분명하시거든요."
모연은 시진에게 윤슬과 강군이 고립된 위치를 대강 설명하고는 상태에 대해서도 설명하면서 시진과 다른 의미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현에게 얼핏 전해듣기로는 등에 큰 상처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 일로 상처가 터졌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 의료진은 밖에서 대기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환자 나오면 알려주세요."
"네."
그렇게 시진과 모연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알파팀은 내부 진입로 확보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시진은 바로 내부로 진입하겠다는 무전과 함께 건물로 걸음을 옮겼고 모연은 상황실 텐트로 가서 대기했다.
드디어 고립되어있던 두사람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시진은 깊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생존자로 추측되는 청년의 상태는 꽤 괜찮아 보였는데 문제는 바로 윤슬의 상태였다.
바로 콘크리트 사이에 다리가 끼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압박이 심해 다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다른 이의 도움없이는 더미 사이에서 다리를 빼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니 왜 한선생님이 이 상태인 겁니까…."
황당함이 가득한 시진의 얼굴에 픽하고 웃어 버린 윤슬은 덤덤하게 강군의 상태를 전달하면서 그를 먼저 밖으로 보내달라 했고 자신의 발은 틈을 살짝만 벌리면 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시진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 환자의 처치까지 끝낸 윤슬의 모습에 다시금 한숨을 내뱉으면서 무전을 보냈고 강군은 먼저 그곳에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가던 대영과 강군은 건물이 흔들리는 것에 서둘러 건물을 달려나왔지만 내부에 남아있던 시진과 윤슬은 그 자리에 다시금 고립되고 말았다.
윤슬이 팔을 들어올려서 낙석을 막으려는 시진의 품이 윤슬을 감쌌다.
그에 윤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유,대위님? 유대위님!"
낙석에 맞은 충격 탓에 잠시 정신을 잃은 시진을 부르던 윤슬은 흔들리던 건물이 멈춤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가 자신의 발이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신을 잃은 시진의 상태를 살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윤슬은 정신을 잃은 시진을 바닥에 제대로 눕히고는 상태를 살피다가 오른쪽 팔뚝에 5~7cm정도 긁히듯이 찢어진 상처와 왼쪽 어깨의 터진 상처를 보았고 그 외에는 외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진의 상처를 간단하게 처치하던 윤슬을 깨어나는 시진의 반응에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습니까?"
"아, 한선생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몸을 일으킨 시진은 자신의 오른쪽 팔뚝에 감긴 붕대를 보고 자신이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윤슬의 발이 빠져서 자유로워졌음도 알 수 있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유대위님 덕분에."
윤슬이 응급키트를 정리하면서 말하자 시진은 묘한 얼굴로 윤슬을 보다가 곧 들리는 돌이 부딪히고 떨어지는 소리에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무전도 없고 무전에 답도 하지 않는 시진과 윤슬의 안전을 걱정한 대영이 건물 안으로 진입한 결과였다.
"앞으론 살아 있으면 바로바로 좀 대답 좀 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시진과 윤슬은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그들이 나오자마자 본 것은 난동을 부리는 듯한 기색의 남자와 그를 붙들고 있는 군인들이었다.
"이 새끼 어쩔까요?!"
"놔! 놓으라고! 손대지 말라니까? 뭐 다 멀쩡하네~ 생존자도 살았고. 그럼 된 거 아냐? 뭐가 문제야. 어?"
영문을 모르는 시진과 윤슬에게서는 어떤 대답도 없었지만 뒤따라 밖으로 나온 대영은 거칠게 장비를 벗어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가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난데없이 주먹질을 받은 남자는 눈에 불을 밝히고 씩씩거렸는데 마침 상황을 확인하러 발전소에 방문했던 박중령을 본 남자는 그를 향해 부어터진 턱을 내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이 거기 무궁화 두 개. 당신이 대대장이요? 당신 나 좀 봅시다. 이거 보여요? 이거 보이냐고! 피 같은 세금으로 월급 받아 처먹으면서, 요즘 때가 어느 땐데 군인이 민간인을 패애에! 내가 어?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
박중령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선 대영과 다른 병사들을 째려보면서 의기양양하게 떠벌리는 그는 이곳 해성 발전소의 치프 매니저 진영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간단하게 진소장이라 부르는 이이기도 했다.
"나 이거 그냥 못 넘어갑니다. 진단서 끊고, 국방부 민원 넣고, 청와대에 탄원서 넣고, 검찰 경찰 아주 민형사 싸그리 다 넣어서 당신들 군복 다 벗길라니까 각오하쇼. 내가 아주 법대로 할라니까."
"그럽시다. 법대로 해봅시다. 국 통제 지역에서 그것도 민간인 구조 현장에서 포크레인 들이밀어 사람 여럿 죽일 뻔한 건 법대로 하면 어떻게 되나 한번 봅시다. 민형사 끝나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로 군사재판도 받게 해드릴 테니까 아예 진단서 몇 통 더 떼놓으시고."
"뭐… 뭐요?"
진소장의 의도와 달리 박중령은 진소장을 가자미눈으로 노려보면서 태연하게 답했고 그런 박중령의 모습에 진소장이 당황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늬들은 새끼들아, 피 같은 세금으로 월급 받아 처먹으면서 작전 지역에 민간인 하나 통제 못하고 뭐했어!"
박중령이 군인들을 향해 일갈하고 돌아서자 진소장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맥없이 서 있었는데 그런 그를 향해 윤슬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진영수, 라고 했었습니까?"
"당신은 뭐야?"
"당신이 죽일 뻔한 인간. 그리고 살아나온 인간.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앞길에 지옥만 있게 만들어줄 인간. 해성그룹에서 당신이란 인간, 없어질테니까. 그럼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진영수 치프 매니저님."
화사하게 웃어보이면서 윤슬이 하는 말에 뭐라 반박하려던 진소장은 싸늘한 윤슬의 시선에 움찔하고 물러섰다.
"해성그룹 이름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선은 지켰어야 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내버려둔 이유는 당신이 그 마지막 선을 아직은 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만 들리게 낮게 깐 목소리는 진소장에게 마치 사망 선고를 내리는 듯한 감각을 주었다.
그리고 윤슬은 진소장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쳤다.
어차피 그라는 존재는 윤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성 발전소 구조 현장은 그들을 끝으로 더이상 구조할 인원이 없었으며, 그 날 오전 11시 일부 인원이 다시금 발전소 앞에 모였다.
"나흘 전 이 시각,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오늘부터 이 시각마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사이렌이 울릴 예정입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진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퍼졌고 모두가 묵념하는 가운데, 진소장만이 시퍼렇게 뜬 눈으로 살아남은 모든 것들을 노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의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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