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34
-out
"살려줘요…! 누구없어요! 아 물라 귀찮아. 그냥 죽을래…."
그렇게 말하는 이는 20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어려보이는 얼굴처럼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인지 혼자 고립된 그 장소에서 삶의 의지를 포기한 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꼰대, 씨… 나 안전모 쓰고 있잖아……. 그러니까 빨리 와서 좀 살려달라고……."
머리에 쓴 안전모가 딱딱한 바닥과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에 아이가 부모님에게 잘못을 일르는 것처럼 중얼거리던 청년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귓볼을 간지럽히는 감각에 옷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그 안전모는 지진이 일어나기 몇분 전, 고반장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씌워줬던 그의 안전모였다.
그 생각을 하던 청년은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기어갔다.
강화유리벽 너머로 의료점퍼를 입은 남자가 보인 청년은 순간 얼굴이 밝아지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 구조대예요? 아, 살았다. 아저씨 나 좀 살려주세요! 얼른요!"
"잠깐만요. 아, 어떻게 꺼내지? 아, 저는 의사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발밑이 흔들리더니 강화 유리에 실금이 쩌저적 갈라졌는데 청년은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철근을 잡고 쓰러졌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나 좀 꺼내줘요! 빨리요!"
청년과 남자 사이에는 고양이 한마리가 지나갈 만한 틈이 있었는데 의사는 그 사이로 손을 뻗었다.
"잡아요! 악!"
하지만 청년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천장과 벽이 심각하게 갈라지더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가 되었고 남자는 누군가를 다급하게 부르면서 팔을 거뒀다.
"뭐 해요! 무너지잖아요! 빨리요!"
"미, 미안… 미안해요! 잠시만요!"
겁에 질린 남자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자 청년은 남자를 향해 죽어라 외쳤다.
"어디가요! 이봐요! 야! 나 좀 구해달라고…! 가지마요… 제발요…"
그리고 벽이 무너지는 순간 벽 사이로 낯선 손이 뻗어오더니 청년의 손을 붙잡았고 벽과 천장이 무너지는 순간 청년의 손을 붙잡은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면서 낯선 남자가 청년의 몸을 강하게 감싼 채로 아래로 추락했다.
그 남자는 의료점퍼를 입고 있었지만 방금까지 유리사이로 팔을 뻗었던 의사와는 다른 옷을 입은 남자였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청년은 강한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
청년의 이름은 강민재, 흔하디 흔한 대한민국의 남아였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가 9살일 때 술만 마셨다하면 엄마를 죽도록 패던 아버지는 음주운전으로 사람 한 명을 죽이고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장에는 경찰들과 보험회사 직원들 외에는 다른 문상객은 없었다.
그의 엄마는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울었다 기절했다를 반복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엄마가 신기했었다.
이후 먹고 살기 힘들었던 엄마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는 재혼을 했고 그는 흔한 스토리대로 여러 일들과 천성이 뒤섞여 지금의 비뚤어진 사람이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리 밝지 않은 삶을 살아온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고 세상이 말하는 희망, 사랑, 미래 등의 따뜻한 단어들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을 살리는 게 직업인 의사가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도망쳤다는 점에서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이의 모습에 그 말을 입 밖으로 쉬이 꺼낼 수 없었다.
의료점퍼를 입은 의사로 추정되는 남자는 자신의 손에 링거를 놓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의 상태가 자신보다 더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피곤에 절은 듯한 안색은 물론이고 먼지과 피로 인해 엉망이 된 얼굴, 그리고 의료 점퍼 아래로는 다친게 분명해보이는 핏자국과 붕대도 얼핏 보였다.
그런 남자에게 아무리 그라고 해도 험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더 아픈데 있습니까?"
"…아뇨."
"구조대가 작업중일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저씨도 의사예요?"
"…무슨 의미입니까."
"방금 나 발견했던 의사선생은 나 버리고 갔는데 같은 옷 입고 있잖아요."
"…그래서 원망스럽습니까."
분명 자신의 동료임이 분명한 이에 대해 언급했지만 덤덤하게 되물어오는 남자의 행동에 그는 눈살을 찌뿌리면서 답했다.
"당연한거 아니예요? 의사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치다니."
"당신에게 의사는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 살리는 게 직업인 사람?"
"그럼 그들은 당신과 다른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순수한 그의 말에 남자는 픽하고 웃으면서 응급키트를 정리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라고. 의사도 당신과 같은 죽음에 공포를 느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두고 도망쳤다는 그 친구, 아마 공포에 질려있을 겁니다. 당신을 두고 도망쳤다는 괴로움에 말입니다. 의사도 같은 사람인데 왜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들도 다치면 아파하고 상처받은 이들인데 말입니다."
"…."
"물론 그들을 이해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한번 그들의 입장도 생각해보심이 어떠신가 싶어서 말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같은 인간은 없지만 같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는 남자의 말이 모순적이면서도 맞는 듯한 생각에 잠시 말문을 닫았는데 때마침 벽 너머에서 철근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 소리가 들리는 것에 남자와 그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안에 내 말 들립니까! 생존자! 내 말 들립니까!"
"들려요! 잘 들려요! 살려주세요!"
그가 있는 힘껏 외치자 벽 너머에서 곧 드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신을 구할 사람들이 왔으니 이제 안심입니다."
"…의사 선생님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저 말입니까?"
"그럼 여기에 당신말고 누가 있어요."
툴툴 거리는 말투였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고 그에 남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윤슬입니다."
그렇게 강민재는 한윤슬이라는 그 이름을 머리 속에 새겼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