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죽지 못한 이의 삶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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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핑 이후 각자 배정 받은 숙소로 이동했는데 나는 인원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다른 막사에 배정 받았다. 하지만 그 배정에 나는 속사정이 있음을 눈치챘지만 정확히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체 생활에서 유일하게 예외라는 것은 말이 안될 일이었으니 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들의 배정에 반박하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나의 생활 중 일부가 편안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짐 정리를 마친 뒤 나는 이후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자유시간이었음을 떠올리고 간이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을 청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료팀 환영식이 있을거라고 알리러 온 상현이 나를 깨운 탓에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밤에 자고 지금은 나갑시다."
등을 떠밀어서 나를 밖으로 나가게 만든 상현은 내가 스스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환영식 준비로 분주한 쪽으로 가서 하 선생님을 도왔다. 그 모습에 옅게 웃어보인 나는 문득 떠오른 일이 생각나서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한 쪽에서 사진기를 들고 풍경을 찍고 있는 이치훈 선생이 보여 그 쪽으로 다가갔다.
"이치훈 선생."
"아! 임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풍경을 찍는 건 좋지만 혹시 다른 사람을 찍지 않도록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초상권 문제랑 관련 있는 부분이니 주의하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아… 그런 문제가 있네요. 꼭 주의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다고 강 선생님한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디 가세요?"
"네, 아는 사람이 우르크에 거주하고 있어서 잠시 만나고 오려고 합니다. 자유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 말입니다."
내 말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이 선생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걸음을 옮겨 브리핑을 진행했던 서대영 상사를 찾았다. 본래라면 경호 팀장의 자리에 있는 유시진 대위를 찾는 것이 맞았지만 그쪽에서 나를 불편해 할 것 같아서 선듯 찾아가기 망설여졌기에 선택한 방향이었다.
"서대영 상사,님."
문득 그들이 내 신분을 알리 없다는 것에 익숙하게 존칭을 떼고 호칭하려던 나는 금방 존칭을 붙여서 말을 이었다.
"혹시 근처 다운타운에 가려고 하는데 차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빌려드릴 수는 있지만 시간이 늦어지신다면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동행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늦어지기 전에 돌아올테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일단 중대장님께 보고드리고 나서 빌려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경호 임무를 수행하는 입장이라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나는 서대영 상사가 유시진 대위에게 보고를 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릴 겸 돌담에 기댄 채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는다고 해서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모자를 쓰고 있는 덕분에 나는 그 뜨거운 햇빛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었다.
그늘진 챙 아래의 두 눈은 감긴 채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소리 만큼은 선명하게 귓가에 닿아왔기에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도 무난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전 자신에게 말을 전해고 떠났던 이와는 다른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나는 좁아진 시야에 잡혀오는 군화의 모습에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군화의 주인을 마주 봤다.
"서 상사한테 들었습니다. 근처 다운타운에 나가야 해서 차가 필요하시다고요."
"…예."
"괜찮으시다면 제가 데려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상관은 없지만 유시진 대위님께 폐가 아닐까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내 말에 그는 익숙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긍정의 답을 내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 스스로가 심란해짐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런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 아무 이유없이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잡아 모자를 고쳐쓰는 것처럼 내 얼굴을 가렸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 뒤로 나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모두 나에게 헛된 이야기일 뿐인 것들 뿐이었다.
그가 나를 잊어서.
글쎄…?
그와 마지막이었던 그 날 이후로 새로운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럴 일이 있을까?
단순히 내가 경호 업무 대상 중 하나여서.
이게 가장 가능성이 높지만 이게 문제가 된다면 외출을 거절하면 됐는데 굳이 동행하겠다는 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생각하기를 그만둔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창 밖은 한국과 달리 넓은 대지와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가 보이는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는 길에 놓여있던 나바지오 해변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본 적이 없지만 그곳에서 가져왔다는 돌은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돌을 가져오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신나게 이야기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잠시 귓가에 머무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나는 금방 그 착각을 무시해버렸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들의 과거는 내가 아무리 붙들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되돌려주지 않으니까….
댓글 1
Nil 창작자
누군가가 말한 전설. 누군가가 가져온 돌. 하지만 그 돌을 가지고 있는 건 임서준. 그건 어째서일까?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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