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21
-out
해가 떠오르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을 멀리서 들려오는 구보 소리에 깨달은 두 사람은 각자의 임무를 위해 평화로웠던 순간을 깰 수 밖에 없었다.
시진은 중대임무를 위해서, 윤슬은 오늘 건설현장 인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기로 한 예방접종을 위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나갔다.
윤슬은 밤을 새운 것 치고는 평범한 낯을 한 채로 의료진 속에 섞여있었는데 의료진은 그런 윤슬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평범하게 자신들의 할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윤슬에게 다가온 인물은 당연하게도 그와 같은 막사를 쓰는 상현이었다.
"새벽에 어디 갔었어요? 일어났는데 없어서 놀랐잖아요."
"…그냥, 산책 좀 다녀왔습니다."
윤슬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고 그런 윤슬의 모습에 상현은 그 말을 믿는 척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말을 따를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만의 비밀로 인한 상처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적으로 도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완전히 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상현은 그저 그런 윤슬을 주의 깊게 살피고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모연이 그의 주치의기는 하지만 모연이 케어를 할 수 없는 부분은 상현이 케어해야만 했기에 결론적으로 윤슬에게는 두 명의 주치의가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건설 현장에 도착한 의료진은 현장과는 떨어진 곳에 천막을 세운 뒤 최대한 모든 인부들의 접종과 건강 체크를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러국가에서 모인 탓에 의료진과 인부들 사이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 탓에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접종을 하고 건강 체크를 하다보니 제한적인 시간 내에 그 날 근무했던 인부들의 체크를 전부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장 관리자인 고재을 반장에게 양해를 구한 의료진은 다음날에도 이어서 접종과 건강 체크를 하기로 했고 지친 의료진은 다시금 부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온 이들 중에서 또 다시 막사에서 쉬는 것이 아닌 밖으로 나온 윤슬이 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주방에서 본국으로 귀환을 한 대영의 연락에 주방에 있던 와인의 존재를 알게된 시진이 와인을 꺼내들다가 그런 윤슬을 보게 됐다.
그래서 들고있던 와인을 내려놓은 시진은 바로 밖에 서있던 윤슬에게로 달려가 윤슬의 팔을 잡은 채로 주방으로 돌아왔다.
"하아- 아니 대체, 비가 오면 피해야지 가만히 서있는 건 왜 그러신겁니까?"
"…."
비로 인해 축축해진 윤슬은 젖어서 얼굴에 달라 붙은 머리칼을 느릿한 행동으로 쓸어넘겼고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눈동자가 물기로 품고 있음을 시진은 눈치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이 빗물인지, 그의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시진은 주방 안쪽에 놓여져 있던 수건을 집어 들어서 윤슬의 머리 위에 덮어주었지만 윤슬은 그런 시진의 행동에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윤슬의 머리칼에 담긴 물기를 거둬내던 시진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면서 수건에서 손을 떼려 했고 그것을 막은 것은 윤슬의 손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이렇게,"
잔뜩 물기를 머금은 탓에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쥐어짠 것처럼 윤슬에게서 흘러나오자 시진은 천천히 수건에서 떼어내려던 손을 다시금 수건 위로 올려 부드럽게 문질렀다.
시진의 양 손목을 붙잡은 윤슬의 손은 물기로 인해 축축했지만 시진은 그런 윤슬의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시진은 떨림이 전해지는 그 손을 마주 잡아주고 싶었지만 이 상태에서 움직이면 깨어질 것 같은 기분에 그저 조용히 윤슬의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이 깨어진 것은 창밖의 빗소리가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왔을 때였다.
자신의 양 손목을 잡고 있던 윤슬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지는 것을 느낀 시진은 슬로우 모션으로 아래로 추락하는 윤슬의 손이 마치 시체의 손 같다고 생각해버렸고 그 생각을 한 순간 수건에 올려져 있던 팔을 내려서 윤슬을 품에 끌어안았다.
자신보다 키가 큰 윤슬임에도 불구하고 품에 안은 윤슬의 몸이 그리 거대하지 않다고 느낀 시진은 저 너머로 심장소리에 들려오는 것에 천천히 윤슬을 놓아주었다.
"…실례했습니다."
잠긴 목소리였지만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온 목소리에 시진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슬이 수건 아래로 감춰진 얼굴을 끝까지 보이지 않은 채로 주방을 벗어나자 시진은 바닥에 남은 물자국으로 그의 존재를 다시금 되새겼다.
끌어안았던 품은 매우 차갑고 단단해서 마치 시체 같았지만 그 안에 뛰는 심장소리는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의 손이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 자신의 앞에 있는 그가 자신처럼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버렸고 그러자 그 순간이 너무나도 두렵게 느껴졌다.
시체를 마주하는 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죽었다라고 생각한 순간 결코 자신은 죽음 앞에 당당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시진은 기분 전환용으로 꺼냈던 와인을 두려움으로 점칠되었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에 담았다.
그동안 살면서 죽음을 두려웠던 적은 몇 없었지만 방금까지 자신의 앞에 있던 그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두려울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유시진은, 한윤슬이 죽지 않고 살아있길 원한다.
댓글 1
Nil 창작자
윤슬은 비가 오는 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그렇기에 울고 있는데 시진이 보고 수건으로 울고 있는 걸 가려준 것. 하지만 시진의 손길에서 과거의 인연을 떠올린 윤슬은 시진을 붙잡은 것. 마치 과거의 인연이 자신을 떠나가는 느낌에. 하지만 빗소리가 잦아들면서 진정을 한 윤슬은 시진을 놓았고. 이때 비를 맞은 윤슬의 체온은 내려간 상태이고 단련한 몸이라 단단한 편이고 윤슬의 손이 죽은 이의 팔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처럼 툭하고 추락하는 것에서 죽어가는 동료의 손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과 데자뷰를 느낀 시진이 순간 윤슬이 죽은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됨. 심장소리를 듣는 것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한 시진은 윤슬을 놓아줌. 윤슬은 시진의 행동에 아무런 말 없이 주방을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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