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13
03. 무라바트
-out
발렌타인과의 만남 이후 윤슬은 다운타운 거리를 지나서 도로를 걸었고 한참동안 차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 위를 걷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고 말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절벽 너머로 다시금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바지오 해변이 보이는 그 자리에서 윤슬은 한참동안 서있었고 그런 윤슬에게 인사를 하기라도 하듯이 바람들은 윤슬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그런 윤슬이 움직이려고 몸을 돌린 것은 해가 저물어서 노을이 비치는 풍경 때문이었다.
몸을 돌려서 도로 위를 본 윤슬은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폰을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노을이 지는 수면 위와는 달리 도로위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이대로 길을 걷다가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
멀미약의 효력이 떨어져서 걸어갈 생각이었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피치못할 상황이라 판단했고 휴대폰의 전화기록부에서 '빅보스'라고 적혀있는 연락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유시진 대위님. 저 한윤슬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시다면 데리러 와주시겠습니까?"
-"아직 밖에 계셨던 겁니까?"
한톤 올라간 시진의 목소리에도 덤덤하게 자신의 위치를 말한 윤슬은 자신을 그가 데리러 올 때까지 암흑으로 물들어가는 나바지오 해변을 바라봤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의 행진이 이어지는 하늘과 그 빛에 반짝이는 수면의 조화는 매우 아름다웠지만 윤슬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저 무표정인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불빛을 빛내면서 도로 위를 달리는 차가 윤슬의 뒷쪽에 세워졌고 윤슬은 그런 차의 등장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찾았네요. 타세요."
"고맙습니다."
시진의 말에 옅에 웃으면서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들고는 익숙하게 앞좌석에 올라탄 윤슬은 시진이 차를 출발 시키자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뒤로 살짝 넘겼다.
그리고 그런 윤슬의 모습이 피곤해 보였던 것인지 시진은 어떠한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그렇게 정적 속에서 차는 부대에 도착했다.
"그럼 쉬세요."
"예, 유시진 대위님도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혹시, 유시진 대위님 말고 편하게 불러주시면 안 되십니까?"
시진의 말에 몸을 돌리려던 윤슬은 멈춰서서 시진을 쳐다봤고 시진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옅은 웃음기가 섞인 얼굴로 말했다.
"다들 유대위님 이런 식으로 불러주시는데 한선생님은 유시진 대위님이라고 일일히 다 불러주시니까 묘해서 말입니다."
"…그럼, 유대위님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그쪽이 편합니다."
시진은 웃으면서 답하고는 인사를 하면서 몸을 돌렸고 그런 시진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윤슬은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도 막사로 몸을 돌렸다.
"어? 어디 갔다와요? 막사에서 쉬라니까."
안에 있었던 것인지 윤슬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상현이 그를 보면서 물었고 윤슬은 그저 옅게 웃으면서 다운타운에 잠시 다녀왔다는 말로 그 물음에 답했다.
그 순간 막사를 뒤흔드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뭐냐…."
"의료팀 다 모이시랍니다."
상현이 투덜거리려는 그때 완전무장한 기범이 막사박에서 말했고 그 말에 상현은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윤슬에게는 쉬라는 말과 함께 혼자 막사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이 사이렌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윤슬의 안색은 굳게 굳어 있었다.
윤슬이 굳은 안색으로 가방에서 약을 찾아 먹는 그 때 메디큐브에 모인 의료진들은 완전무장한 신진과 대영의 등장에 술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시진의 브리핑을 가만히 귀에 새길 뿐이었다.
'중동 평화조약 성사를 위해 북우르크를 비공식 순방하고 돌아오던 아랍연맹 의장인 무라바트라는 사람이 곧 메디큐브에 올 것이다.
환자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응급상황이니 진료할 준비를 하고 있어달라.
무라바트는 아부다비 왕가의 서열 3위 왕족으로 종파 간 갈등문제, 국경 분쟁 문제에 대해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막후 실력자다.
중동 평화조약으로 인해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이지만, 반대파들에겐 암살 1순위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VIP 환자로 대해야 할 것이며, 이 모든 일은 일급 보안사항이므로, 의료진은 각별히 신경 써주길 바란다.'
라는 내용의 브리핑이 끝남과 동시에 시진은 들고있던 환자 차트를 의료진 책임자이자 팀장인 모연에게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VIP 주치의가 보낸 병력 기록입니다."
"네."
두 사람의 사이가 싸늘했고 서로를 사무적으로 대하는 태도에도 주변 이들은 그저 이 상황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한 내막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보다는 시진이 건넨 환자 차트를 본 이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 이유는 환자 차트의 웬만한 기록은 검은 펜으로 지워져 있어 읽을 수 있는 기록이 몇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냐 이게? 이렇게 다 가려놓고 뭘 보고 어쩌라는거야?"
상현의 황당하다는 듯한 말투에 모연만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차트를 읽어나가면서 답했다.
"VIP들 차트에는 어차피 진실보단 거짓이 많아요."
"환자 차트에 거짓 기록을 한다구요? 어떤 미친 의사가 그런 짓을 해요?"
"나 같은 의사."
치훈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에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단호하게 답한 모연을 시진이 힐끔 쳐다봤지만 모연은 무심하게 자신의 할 말만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VIP들에게도 특별한 의사가 필요하거든. VIP에게 메디컬 히스토리(Medical History)는 곧 약점이니까. 그래서 대통령의 건강 상태는 국가 기밀인거고."
그렇게 모연이 말이 끝나고 얼마 흐르지 않아 막사 입구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드리는가 싶더니 메디큐브 창문으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하게 비쳐들었다.
일급 보안사항이라면서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보다 더 떠들썩하게 등장하는 환자에 모연은 차트를 덮고 환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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