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21화

거룩한 길(7)

눈물이 멎고 가슴이 진정되니 졸음이 쏟아졌다. 눈을 뜨려했으나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 덕에 나는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여지껏 그래왔듯이, 익숙한 영혼과 몸의 괴리감이 느껴진다.

[ …. ]

[ 어째서! 어째서냐…! ]

르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의 남자는, 그러니까 루에리는 내게 매서운 얼굴로 외치고 있었다.

[ 트리아나와 리안이 네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

그가 끌어안은 것은 리안이었다. 싸늘하게 주검이 된 상태의 리안. 나는, 르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스라스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아마도 르나는 에스라스에 의해 누명을 썼겠지. 리안을 죽였다는 누명 말이다.

하지만 정작 르나는 아무런 말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리 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건 살짝 떨리는 한 쪽 손뿐.

죄책감? 슬픔? 후회? 무엇이든 르나의 입을 봉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모르간트는 절망하는 루에리에게 힘을 주겠다 했다. 이 세상을 벌할 수 있는 힘을.

그 말에 승낙한 루에리는 르나를 향해 저주의 낙인과도 같은 다짐을 남겼다.

[ 네 녀석의 이름…, 잊지 않겠다. 절대로. ]

나는 그가 전하는 깊은 분노를 그대로 뒤집어쓴 르나를 걱정했다. 동시에 이 비극의 단초가 된 모든 것들이 마치 잘 짜여진 극본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에리와 르나의 악연을 만든 건 오해였지만, 오해를 부추긴 건 역시….

모르간트, 그 자였다.

그가 던진 건 그저 사소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에리를 위로하는 척, 그의 분노를 세상과 어떤 대상에게로 돌리는 그 행동은 의도가 분명했다.

그는 루에리를 마족의 측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루에리가 세상을 파괴하는데 일조하게 만들고 싶어 해.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일어나니 쌀쌀한 새벽이었다. 내 몸은 모포에 둘러싸여있었다. 일어난 나는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발견했다. 아직 나무가 타들어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이곳에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던 모양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 모르는 곳…. 아마도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인 듯 싶다.

눈을 쓸자 살짝 찐득한 눈물자국이 느껴졌다. 다행히 근처에 냇가가 있어 닦아낼 수 있었다.

흐르는 물에 내 얼굴이 옅게 비쳤다. 나는 잠시 멍하니 눈을 마주치다가 뺨을 탁탁 두드렸다. 정신차려야 해.

“이제 괜찮은가 보군.”

냇가에 내 얼굴 말고 다른 얼굴이 끼어들었다. 뒤로 올려다보니 루에리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바보같은 모습을 보여버렸다…. 나는 머쓱함을 참고 루에리에게 말을 걸었다.

“보살펴줘서 고마워요. 우리 구면이죠?”

“딱딱하게 존댓말은 필요없어. …나는 루에리다.”

“저는…. 아니, 나는 솔라야.”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봤다. 나는 문득 루에리의 생존을 가장 기뻐할 그의 친우가 떠올랐다. 입을 열려는 찰나, 루에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몰래 나온 처지라 이만 돌아가보지. 내가 없으면 트리아나가 곤란해지거든.”

“트리아나라면, 그 때…. 그 애는 괜찮아?”

“몸에는 문제없어.”

다행이네. 루에리는 내 안도에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너는 처음 본 마족을 지키기 위해 널 희생한 거지? 그 일을 후회하지 않나?”

루에리의 질문은 다소 직설적이었다. 나는 적당한 답을 꺼내기 위해 입을 몇번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그냥 되는대로 지껄였다.

“마족이라도 그렇게 어린 애를 공격하는게 거북했을 뿐이고, 난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팔라딘 측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

루에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인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은 다른 법이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다른 것처럼.”

“…알 것 같지만 역시 납득하기는 어려워. 뻔한 길을 두고 미로를 헤매는 사람을 지켜보는 기분이군.”

나는 화제를 끊고 루에리에게 날짜와 시간을 물었다. 내가 이멘마하 성 지하에 구금된 지 대략 1주가 넘은 시기. 쓰러진 날 발견한 건 하루 전이라고 했다.

라오크는 살아있을까?

나는 일부러 이 질문에는 기대를 끊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일단 접선장소로 가야했고, 에스라스의 모략 또한 밝혀야 했다.

잠깐. 그런데 이 일에는 리안이 얽혀있다. 게다가 꿈에서 본 바 리안은 어떠한 이유로 죽어버렸다. 그렇다면 루에리가 이 일에 관여하는 게 낫지 않을까?

“루에리, 리안 영주가 네 동생이라고 했지?”

“그래.”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리오네트 포션을 꺼냈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긴 한데…. 이건 에스라스의 실험실에서 훔쳐온 샘플이야. 일명 마리오네트 포션. 먹인 사람의 의지를 빼앗아 조종할 수 있는 약물이지. 그리고 리안 영주는 에스라스에 의해 이 약물을 지속적으로 복용당하고 있어.”

“뭐라고!?”

루에리는 격분했다. 나는 차분히 리안 영주의 상황과 실험 일지의 대상이 매우 일치하다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에스라스…!!”

한 때, 알고 지냈던 이에게 배신 당했을 그에게 나는 제안했다.

“지금 나는 에스라스를 치기 위해 움직일 예정이야. 협력자가 있어…. 괜찮다면 너도 이 일에 함께하지 않을래?”

“가겠어.”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 모양이다. 표정에 망설임이 드러났다.

“왜?”

“아니, 아니야.”

하지만 루에리는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내 제안에 승낙했다.

우리는 접선장소로 이동했다. 센마이 평원. 사람이라고는 살고 있지 않은 황폐한 초원이다. 유적지처럼 주거지의 흔적만 남은 평원의 끝자락에서 나는 협력자를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의외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물건을 팔던 떠돌이 상인 프라이스. 던바튼에서도 종종 보였는데 굳이 광장이 아니라 학교 옆에 자리를 잡아 이유를 궁금케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루에리와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루에리의 얼굴을 보고 놀라했다. 하긴, 그렇겠군. 리안과 쏙 빼닮은 얼굴이니. 설명할 필요를 느낀 내가 나섰다.

“이쪽은 루에리. 당분간 저와 협력할 거예요. 아, 신용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보장할게요.”

“…프라이스라고 편히 부르도록 하게나.”

찜찜하게 소개를 마친 우리는 이멘마하 성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들고온 마리오네트 포션은 증거품으로 프라이스에게 넘기고 프라이스는 우리에게 서신철을 보여주었다.

에스라스가 콜바라는 자와 오래 전부터 주고받은 기록이다. 하지만 마법의 힘으로 본래 내용이 가려져 있어 해독 마법이 필요했다. 원래는 티르 코네일의 학교선생인 라사에게 의뢰를 부탁할 예정이지만 다행히도 나는 더 적합한 자를 알고 있었다.

바로 엔더.

밀레시안이니 위험할 일도 없고, 비밀이 새어나갈 일도 없다.

그러고 보니 그와 약속했던 수업은 팔라딘 훈련을 받느라 취소했고, 그 이후로 만난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곧바로 소식을 듣고 던바튼으로 가 엔더를 찾았다. 그는 십중팔구 도서관에 있는 사람이라 찾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엔더!”

“오랜만이네요. 솔라 씨.”

엔더는 내게 가볍게 안부를 묻다가 잠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나로부터 몇발자국 떨어진 채 멀뚱히 서있는 루에리를 발견하고 물었다.

“저 분은….”

“일행이에요. 골치아픈 일에 휘말려서, 당분간 동행하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사실 당신이 뭔 일에 휘말린 건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요?”

엔더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소근거렸다.

“이멘마하의 영주가 당신을 비밀리에 찾고 있어요. 아니, 정확히는 재상인 에스라스겠지만.”

“음, 대놓고 수배할 줄 알았는데.”

내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배를 위해 죄목을 나열하기엔, 솔라 씨는 여러모로 유명하더라고요. 어차피 던바튼 쪽에는 그 영향력이 닿지 않으니 너무 걱정마세요.”

침음을 흘리던 나는 그제야 정신 차리고 용건을 꺼내들었다.

“이 책에 역마법을 걸어주실 수 있나요?”

“으음. 이건…솔라 씨 능력으로는 조금 부족했겠군요.”

긴 손가락으로 책을 훑은 그의 눈이 총명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원리의 마법은 아닙니다. 글자 위에 글자를 덮는 일종의 속임수이죠. 해독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일입니다.”

엔더가 마나를 운용하며 페이지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글자로 이루어진 페이지의 한 겹이 벗겨졌다. 드러난 건 전혀 새로운 내용.

“자,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별일 아니에요. 그보다 얼마 전에 블래시를 만났는데, 그가 종종 얼굴 좀 비춰달라 안부를 전하더군요. 삐지지 않게 한 번쯤은 만나주세요.”

“하하하…. 그럴게요.”

다시 한 번 인사하고 루에리에게 가려는데, 엔더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끼는 친우한테 그러하듯이 말이다.

“언제나 조심하세요.”

“아….”

잠깐 당황했지만 이 걱정이 기꺼워 나는 활짝 웃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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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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