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기억하는가?
동아리 합평에 냈던 것
지구를 기억하는가?
우주가 지워지고 있다. 다코타가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은 벌써 오 년 전이었다. 재앙은 별다른 계기도 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수프와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현관을 나선 다코타는 앞마당 밖으로 땅이 온통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다코타는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면식이 있는 이웃을 몇몇 만날 수 있었지만, 바깥은 이미 다코타가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이후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은 빙글빙글 돌아가던 커다란 기계와 아무리 노려봐도 바뀌지 않는 모니터 속 숫자들뿐이었다.
‘받아들이셔야 해요.’ 모니터 뒤로 몸을 숨긴 사람이 말했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얼핏 드러난 옷소매가 희끗희끗했다.
‘이젠 모든 것이 전과 달라질 거예요.’ 다코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외계인일까? 아니면 무너지는 지구를 연구하는 연구원인가?
‘점차 더 잊어갈 겁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을 때 남은 부분이라도 지켜야 해요.’ 그 말을 끝으로 땅이 무너졌다. 온통 기계와 숫자로 채워진 방이 다코타가 앉은 의자만 남기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어그러진 목소리가 긴 꼬리처럼 남았다. 다코타는 무심한 눈으로 목소리가 사라진 궤적을 쫓았다.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던 다코타는 고심 끝에 이주를 결심했다. 맨 처음 이주 계획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거세게 반대하며 다코타에게 집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무너진 땅에서 사는 법을 배워서 지구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다코타를 위해 땅 위에 나무판자를 깔아 놓았으니 판자가 놓인 길로만 다니라고, 그러면 안전하다고 했다. 다코타의 생각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코타는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은하를 건너 저 멀리 우주 끝으로 이주했다. 아무도 없는 데다가 창밖으로 장엄한 우주 경치가 보이는 작은 행성이었다.
다코타는 새로 정착한 이 외딴 행성이 꽤 마음에 들었다. 다코타는 지구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한가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프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낡은 목제 책상 앞에 앉아 홍차를 홀짝였다. 그때 어디선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행성에는 다코타밖에 없을 터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다코타는 아주 살짝 몸을 틀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유리창 너머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저 멀리 끝이 보이는 우주 공간만이 있었다. 다코타는 완전히 의자를 돌려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끊겨 있는 은하가 서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은하는 심하게 부식된 탓에 다른 은하와의 연결이 모두 끊기고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마치 다코타의 행성과 같았다. 다코타는 문득 생각했다. 지평선이 저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웠던가?
시계가 없는 집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족할 때까지 창밖을 쳐다보던 다코타는 문득 허기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가기 위해 오른쪽 벽을 짚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언제 가구의 위치나 집안 구조가 변할지 몰랐다. 비단 가구 위치나 집안 구조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지구에서의 생활과는 조금씩 달랐다. 길을 걸을 때는 물론이고 목욕을 하거나 식사를 차릴 때도 몇 번씩 되짚어보아야 했다. 가끔은 해결 방법을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하던 것을 멈추고 몇 시간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연스럽게 다코타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구에선 겪어볼 수 없던 삶이었다. 다코타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샐러드 포장을 벗기고 그릇에 옮겨 담아 드레싱을 뿌렸다. 그릇을 들고 식탁에 앉은 다코타가 거실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을 켰다. 다코타의 텔레비전은 늘 같은 채널에 맞추어져 있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처음 입주할 때 누군가 맞춰 놓은 채널을 관성적으로 보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 같은 것은 다코타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포크를 들던 다코타가 갑자기 들려오는 사람 말소리에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새벽 시간도 아닌데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회백색으로 물든 화면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들린 말소리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시오?”
다코타가 물었다. 그러자 텔레비전에서 고장 난 라디오처럼 잔뜩 잡음이 낀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르게 말소리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코타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거기 누구요? 어디서 온 사람이오?”
… … 당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요.
다코타는 잡음 너머 말소리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아마도 다른 행성의 언어인 듯했다.
다코타가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어째서인지 화가 치밀었다.
“이보시오! 당신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화답했다.
… … 돌아가요 … … 왔던 곳으로. 가야 할 곳으로 … …
“당신은 지구 사람이요? 아니면 지구를 기억하는 사람이요? 어느 쪽이든, 다시 말하지만 나를 내버려두시구려. 나는 이미 내가 떠나온 지구가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
… … 아직 끝이 아니잖아요 … …
“창밖을 보시오. 뻥 뚫리고 콱 잘린 은하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이미 나의 우주는 끝났소.”
… … … 아버지 … … … …
다코타는 목소리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텔레비전을 껐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집 안은 다시 잠잠해졌다.
다코타는 포크로 상추를 찍어 입 속에 넣었다. 아직은 성한 어금니로 상추를 씹었다. 별안간 다코타는 씹는 행동을 멈추고 입을 쩍 벌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입안에 쓴맛 나는 것을 욱여넣어서 뭘 어쩌려고 했을까?
다코타는 저도 모르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손발이 뚝 끊기고 고립된 은하가 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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