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뒤에 남는 것
동아리 문집글..
◈
언니는 홍대 클럽 지하 2층에서 인디밴드를 하다가 캐스팅됐다고 했다. 그건 어릴 때 얼굴 좀 반반했던 것만 믿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계약서에 도장 찍은 대다수 연습생 사이에서는 아주 독특한 이력이었지만, 기약 없는 미래에 세상을 삐뚜로 보는 것 말곤 아무것도 못 하던 당시의 우리는 그냥 ‘망하기 직전의 회사가 로또 한번 긁어보겠다고 아무나 데려오는구나’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니는 얼굴이 예쁘지도 그렇다고 노래가 특출나지도 않았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진 맨날 구부정하게 서서 기타나 치던 인간이었으니 춤은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신인개발팀 직원들도 언니의 입사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윗사람 한 분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해서 언니의 입사를 강경하게 밀어붙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러니 언니가 처음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우리의 반응이 어땠을지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떫은 티 못 감추고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 어설피 맞닿은 무릎. 그게 당시 언니와 나의 거리였다.
여느 아이돌 회사가 그렇듯 우리도 월말 평가가 있었다. 연달아 성적이 나쁘면 방출될 수도 있으므로 연습생들은 늘 수명을 깎으며 열심이었지만 그해 여름은 좀 더 특별하고 치열했다. 곧 데뷔조가 만들어지는데 이번 월평을 보고 멤버를 결정하겠단 소문이 돈 탓이었다. 평가일이 다가올수록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주변에 있는 모두가 적이었다. 당연히 동고동락한 동료가 잘되길 원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동료가 잘되면 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지배했다. 뜨거운 감자인 언니에 대한 관심도 견제도 미움도 모두 월말평가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니에 대한 견제가 준 것이 아니라 언니 대신 자기 주변 모두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에 가까웠다. 다들 무의식중에 언니를 견제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단 것이 눈에 보였다.
유일하게 언니만이 이 모든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언니는 우리가 경쟁자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굴었다. 우리가 좁은 연습실에서 각자 이어폰을 끼고 잔뜩 인상을 쓴 채 밤샘연습을 할 땐 나오지도 않더니 어느새 땀범벅이 되어 나타나서는 어디서 난 돈인지 모두에게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보컬룸에 처박혀 기타를 치고 있다가도 다른 연습생이 들어오면 군말 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노래까지 봐주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이유 없이 미움받던 언니는 월평을 준비하는 동안 반쯤 이미지를 회복했다. 반만 회복한 이유는 고용불안정에 시달리던 연습생들이 그것마저도 데뷔 안정권도 아닌 주제에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군다며 아니꼽게 봤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우리에게 연습생 특유의 비관도 욕심도 이기심도 없이 다 잘될 것처럼 구는 언니가 마냥 달갑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릿속이 오로지 월평으로 가득 차 언니에 대해 가타부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뭇 연습생처럼 나 또한 잠을 줄여 가며 평가 준비에 매진했다. 지난 월평 때 평가 도중 노래가 끊기는 치욕을 겪은 후 이번에 보란 듯이 뒤집어주겠다며 일부러 보컬이 강조된 곡을 선택하고 하루 종일 보컬룸을 들락날락하며 회사에 살다시피 했다. 보컬룸은 사람 서너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에 키보드와 작은 책상을 밀어 넣은 좁은 방으로, 회사 3층엔 이런 보컬룸이 열 개 정도 줄지어 붙어 있었다. 보컬룸은 연습생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숨으로 늘 눅눅했다. 방마다 에어컨이 있었지만 미적지근한 바람이 나올 뿐이었고 그마저도 밤 열 시가 지나면 가차 없이 꺼졌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손에 들어가는 작은 선풍기를 끼고 살아야 했다. 물론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보컬룸에 틀어박혀 연습하고 나면 늘 땀범벅이 되어 나오기 일쑤였다.
내가 보컬룸에 가는 시간은 주로 늦은 밤이었다. 해가 떠 있을 땐 회사에서 짜 준 시간표대로 레슨을 받고 저녁 자율 연습 시간엔 지하 연습실에서 춤으로 들어온 다른 연습생을 눈으로 힐끔대며 몸놀림을 훔쳤다. 그 후 몇몇 연습생들이 슬슬 숙소로 돌아갈 즈음이 되면 조용히 짐을 챙겨 보컬룸으로 향했다. 한밤에 시작한 연습은 새벽 절반이 지나고 나서야 끝나곤 했다. 월평 준비 기간 동안, 대개 그 시간까지 남아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노란 간접조명을 끄고 방음실을 나오면 사위가 적막했다. 어두운 복도를 혼자 걷는 감각은 무섭다기보단 기묘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약간의 승리감은 덤이었다.
가끔은 고독을 만끽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이제는 거의 고정석이나 다름없는 연습실에서 나오자마자 복도 바깥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가 쓰던 반투명한 보컬룸 문은 기하학적 문양을 따라 투명하게 드러난 틈이 있었다. 그 조그마한 틈새로 방 안쪽을 들여다본 뒷모습은 언니였다. 뻗친 머리 아무렇게나 묶고 기타는 소중하게 품에 안고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민트색 바람막이는 바닥에 내팽개칠 사람은 우리 중에 언니밖에 없었다. 낮에는 연습실에서 잘 볼 수도 없더니, 누가 뒤에서 보는 줄도 모르고 자기 할 일에 매진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비슷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나는 늘 비슷한 밤에 보컬룸에 들어가 비슷한 새벽에 보컬룸을 나섰고 그럴 때마다 언니는 환하게 불을 켠 채 연습에 한창이었다. 어느새 연습이 끝난 후 언니가 있는 방을 슬쩍 훔쳐보고 가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언니는 매번 다른 옷에, 매번 같은 기타를 안고, 매번 다른 방에서, 매번 같은 자세로 노래했다. 허접한 생김새에 비해 방음 하나는 끝내줬기 때문에 언니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문을 열면, 문을 열고 언니의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을까? 언니가 어떤 멜로디를 어떤 가사를 소리 내어 발음하는지 알 수 있을까? 언니가 몸을 흔들 때마다 뒤통수 끝에 매달린 하나로 묶은 머리가 같이 살랑거렸다. 나는 그 뒷모습에 이끌리듯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을 거두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쩐지 이 모든 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언니의 머리가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볼 것처럼 움직였다. 나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끝까지 언니가 부르던 노래를 알 수 없었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도망치듯 떠난 다음 날, 언제나처럼 연습이 끝나고 보컬룸을 나선 나를 맞이한 것은 들릴 듯 말 듯 한 노랫소리였다. 누군가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니였다. 이 시간 이 공간은 언니와 나의 전유물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둑한 세상 속 유일하게 빛나는 곳을 향해 소리 죽여 걸어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기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위로 언니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처음으로 작은 보컬룸 안 언니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언니는 빈말로도 노래를 잘한다고 할 수 없었고, 얼룩덜룩한 손끝에서 나오는 기타 소리는 둔하기 그지없고, 선풍기 하나 없이 땀에 절어 있는 얼굴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언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관객도 없이 서툴게 노래하는 언니가 행복해 보인 까닭이 아니었다. 다 무뎌진 소리를 내며 기타 줄을 튕기고 발을 구르고 내가 알 수 없는 가사를 말하는 언니는 마치 그것만이 의무이자 사명이자 삶의 방식인 것처럼 보였다. 비로소 나는 처음으로 언니의 세계를 알고 싶었다. 언니가 궁금했다.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이윽고 복도 벽에 몸을 맡기고 앉아 몰래 언니의 노래를 훔쳐 들었다. 언니가 발산하는 허밍에 맞추어 나 또한 호흡을 내뱉었다. 언니가 만들어내는 박자에 맞춰 내 심장이 뛰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다음날 경비아저씨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복도 끝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여덟 시였다. 연습에 써도 모자란 시간을 자는 데 허비했다는 사실에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그때 발치에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민트색 바람막이였다. 나는 상황 파악이 채 되지 않은 머리로 천천히 떨어진 옷을 주웠다. 언니 냄새가 났다.
내가 그달 월평 전에 보컬룸에서 언니를 본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언니가 돌연 시간대를 바꿔 내가 댄스 연습을 하는 시간에 보컬 연습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언니와 얽히게 된 것은 월평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우리는 연습생 숙소 거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언니는 자기 몸집만 한 기타를 메고 숙소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언니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언니는 우리가 궁금해할 줄 몰랐는지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자. 이거 받아.”
어디 가냐는 물음엔 대답하지 않은 언니가 반바지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 건넸다. 언니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죄로 연습생 막내 소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펼쳤다. 그 애는 언니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이게 뭐예요? 웬 포스터?”
언니가 내민 의문의 종이는 공연 포스터였다.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 이름이 접힌 자국이 하얗게 일어난 틈에 끼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언니가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했다던 밴드라고 알아챘다.
“뭐야, 언니 공연해요?” 소희가 물었다.
“응. 공연은 내일이니까 다들 시간 되면 보러 와. ”
그렇게 말하며 언니가 멋쩍게 웃었다. 다들 언니를 쳐다보는 틈을 타 나는 조금이라도 언니가 속한 밴드 이름을 훔쳐보려 포스터를 든 소희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언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더니 이내 철컥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언니가 나가자마자 소희가 포스터를 바닥에 던졌다. 주름진 종이가 먼지 낀 숙소 바닥을 뒹굴었다.
“내일모레가 월평인데, 이딴 거 누가 가.” 소희가 말했다. 그 애는 어쩐지 분해 보였다.
“소희 말이 맞아. 다들 연습이나 가자.”
너도나도 맞장구치며 연습생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팽개쳐진 포스터와 연습생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곧 무리에서 떨어질까봐 겁먹은 사슴처럼 허겁지겁 그 애들 틈에 끼어 연습실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포스터에서 본 공연 시간과 장소가 인이 찍힌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
보컬이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조명은 관객들 눈을 모조리 멀게 하는 게 목표인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쏟아졌다. 아마추어 기색이 물씬 나는 연주 소리며 흥분한 관객들의 환호에 고막이 먹먹했다. 난잡한 환경에 눈을 찌푸릴 새도 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엉거주춤하게 손을 올리고 콩콩 뛰었다. 내 의지로 발을 떼지 않아도 알아서 바닥에서 떨어지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던 포스터 내용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결국 오후 시간이 되자마자 연습실을 뛰쳐나와 버렸다. 연습을 빼먹은 것은 연습생이 된 후로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데뷔가 걸린 월평을 하루 앞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언니를 보러 오다니, 여름의 더위에 절여져 바보가 된 것이 틀림없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모자를 눌러썼다. 빠져나가려는데 무대를 끝내고 내려오던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
우리는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나를 보는 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잠깐만 기다려. 언니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나가는 것도 다시 들어오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언니에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잠시 후, 언니는 땀으로 엉망이 된 채 키가 멀대같은 남자를 끌고 등장했다. 어깨에 기타를 메고 있는 모양새가 왠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 내느라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바라봤던 모양이다. 견디지 못한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언니와 같은 시기에 들어왔던 우리 회사 남자 연습생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래, 둘이 친하게 지내. 이쪽은 한세강이고, 아, 같은 회사니까 알고 있으려나? 아까 무대에도 있었는데. 이쪽은 여자 연습생 수현이야. 세강이 너보다 두 살 어려.”
아니, 어지간히 발 넓은 사람 아니면 이성 연습생은 잘 모르죠. 무대는 언니밖에 안 봤는데 다른 사람 얼굴을 어떻게 기억해요. 목구멍 너머로 반박을 삼켰다.
“누나가 소개를 다 해서 내가 할 말이 없네. 음, 나는 한세강이고, 말 편하게 해도 돼.”
남자는 한결 긴장이 풀어진 표정이었으나 여전히 쭈뼛쭈뼛한 태도였다. 언니랑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전혀 아닌 것도 같았다.
“네. ……세강 오빠.”
“좋아. 소개도 끝났으니 이제 가자.”
언니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큼직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어딜 가냐고 묻고 싶은 것은 나뿐이었는지 세강 오빠는 군말 없이 언니의 옆에서 걸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을 보자 기묘한 울렁거림이 발끝부터 차오르는 바람에 나 또한 가타부타 생각할 겨를 없이 둘의 걸음을 쫓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가는 동안 이야기한 것은 언니뿐이었다. 세강 오빠는 간간이 맞장구를 치거나 언니의 말을 보충해 주는 정도로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거의 언니의 말에 따르면 세강 오빠는 원래 언니와 같은 인디밴드에서 기타를 쳤는데 언니와 함께 둘이 손잡고 캐스팅되었다고 했다.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다짜고짜 명함을 내밀어서 당황했다느니 어쩌니 하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언니의 옆에서 세강 오빠는 내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진짜로 손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알지?”
나는 해 질 무렵의 긴 노을과 붉게 물든 하늘과 그 한가한 자연을 뚫고 들리는 자동차와 사람과 매미의 삼중주에 신경을 쏟다가 한 박자 늦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왜 세강 오빠가 내 눈치를 보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짜증이 날 뿐이었다. 다시 앞서가는 언니의 뒷모습으로 눈을 돌렸다. 언니의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걸음을 멈추었을 땐 이미 벌겋게 찢어지던 해가 푸르스름하게 바뀌어 있었다. 도착한 곳은 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나무가 즐비한 산책로를 가로질러 돌계단을 성큼 내려가면 바다만큼 펼쳐진 강 너머로 반대편 도시가 얼핏얼핏 보였다.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땀이 번진 몸이 단번에 식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 셋 중 언니만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만약 언니가 춥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겉옷을 벗어 주어야 할까? 세강 오빠도 후드 집업을 입고 있으니 입어도 오빠 옷을 입으려나? 하지만 그건 어쩐지 좀 싫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싫었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몸이 상해서 내일 월평을 못 본다면, 그래서 언니가 데뷔조에서 탈락하거나 최악의 경우 방출된다면,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니가 문득 목소리를 높였다.
“아, 번데기다.”
언니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말로 근처 고목 나무 중간에 매미 번데기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번데기가 아니고 애벌레 껍데기 혹은 허물이지만, 굳이 언니를 불러세워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언니가 저것을 번데기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껍데기였던 번데기에 다가간 언니가 손을 뻗었다. 왜인지 다음에 하려는 행동을 알 것만 같아서 다급하게 외쳤다.
“어어, 하지 마요!”
“응?”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돌아보았다.
“떼지 마요! 안에 매미가 들어 있으면 어떡해요.”
“에이. 걱정 마, 없을 거야.”
“있으면 어떡해요!”
“내기할래? 난 없다는 쪽에 걸게.”
“네? 내기라니……어떻게 확인할 건데요?”
“그야 번데기를 열어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봐야지.”
“하지 마요, 진짜로!”
“하하, 농담이야! 수현이 네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해, 난.”
여차하면 붙들어서라도 말리기 위해 기겁한 표정으로 다가가자 언니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니의 말에 멈칫하는 사이, 언니는 풀밭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적당한 자리를 찾더니 자연스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팔다리가 훤히 드러났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익숙한 일인지 세강 오빠는 한숨을 쉬며 그러다 병 걸려도 모른다고 잔소리하면서도 언니와 조금 떨어진 곳에 털썩 앉았다. 따라 앉아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나를 본 세강 오빠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더니 자기와 언니 사이 바닥에 깔았다. 나는 배려에 못 이기는 척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하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 두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돗자리도 없이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 셋이 쪼르르 앉아서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문득 내가 오후 내내 내일 있을 월평 걱정을 하지 않았단 것을 깨달았다. 지난 몇 주간 내 일상을 전부 차지하던 것이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수현아, 너는 뭐 때문에 연습생이 됐어?”
잔잔히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보며 언니가 물었다. 그러나 나는 어째서인지 언니가 보고 있는 것이 눈앞의 경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의 눈에 비치는 게 무엇인지 가늠해 보려고 애쓰며 내가 답했다.
“그냥 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어릴 때 얼굴 좋단 소리 많이 들었거든요. 어릴 땐 다 예쁜데, 제가 주제도 모르고 입 발린 소리에 넘어간 거죠.”
“그래?”
“네.”
여기까지 걷는 내내 한마디도 안 한 것이 무색하게 말이 술술 나왔다. 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부러 초점이 어긋난 대답을 내놓은 주제에 대화가 끊긴 것이 못내 아쉬워 언니가 되물어주길 기다리며 한참을 언니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우리를 힐끔 본 세강 오빠가 기타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근방에 있는 강물 위 고가도로에서 들리는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여름 매미와 각종 풀벌레 소리가 협연하는 위로 맑은 기타 소리가 얹혔다.
생각해 보면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은 전부 말도 안 되는 것뿐이었다. 아주 중요한 월말평가 전날에 연습을 땡땡이친 것도 모자라 진즉에 월평 준비를 관둔 사람을 따라 이름도 모르는 공연장에 와서 생판 관심도 없는 공연을 보고, 그 사람을 눈에 담고, 남자 연습생이랑 말을 나누고, 즉흥적으로 한강에 와서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어제까지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비일상적인 여름에 용기를 빌려 물었다.
“언니는 왜 연습생을 해요?”
말을 뱉자마자 황급히 언니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내가 다른 연습생들처럼 언니를 탐탁잖아한다고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언니는 딱히 아이돌이 되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그 정도는 딱 보면 알아요. 이번 월평이 중요하단 걸 알면서도 밴드 공연을 한 것도 결국은 데뷔가 간절하지 않은 거잖아요.”
언니는 한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내가 신기해할 틈도 없이 언니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나를 향해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 나는 왜 연습생을 할까?”
“……무대가 그렇게 좋아요?”
“뭐?”
답을 줄 듯 말듯 회피하는 모습에 아주 약간 짜증이 나서 추격하듯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양 되묻는 언니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 아주 잠깐 보았던 그 표정이 다시 보고 싶었다.
“그렇잖아요. 밴드 하다가, 아이돌 되겠다고 연습생 됐다가, 다시 밴드도 하고. 결국 언니는 어디든 자길 비춰줄 스포트라이트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어디선가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시야를 가로막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피해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그 짧은 새에 언니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언니처럼 찰싹이는 강물 표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와 같은 방향을 보면 언니가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언니가 궁금했다. 진짜 언니가 궁금했다. 언니가 가는 길을 따라 걷고 언니가 보는 것을 따라 봐도 알 수 없던 언니의 생각이, 모든 것이 궁금했다.
“무대 때문일까?”
침묵을 깨고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게 어쩐지 참을 수 없어진 나는 고개를 반만 들고 언니를 향해 손을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언니는 이미 밖에서는 닿을 수 없는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아니……아니야. 무대라는 건 말이야,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일지도 몰라. 어쩌면 돈이나 인기보다 훨씬 더 쓸모가 없는 거야. 형체도 없고, 낭만도 없고, 효율도 없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한 기색이던 목소리가 점점 확신을 띄었다. 나는 잠자코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래. 무대를 위해 달리는 건 아니야. 무대는 너무 무용하잖니.”
등 뒤에서 사라져가는 석양이 언니를 붉게 물들였다. 새까만 눈동자에 하천의 풍경이 들어찼다. 언니의 눈 안에서 새빨간 잔물결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대는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하고, 환호 또한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야. 그런 것을 위해 산다고 하면, 글쎄, 우리는 납득 할 수 있으려나?”
◈
그때 언니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것은 몇 년 후 데뷔하고 나서였다. 그 월평으로 데뷔조를 정한다는 말은 헛소문이었고 그로부터 또 얼마가 지난 후에야 회사는 대형 기획사 출신이라는 새 연습생을 센터 삼아 그 애와 결이 맞는 멤버를 골랐다. 나는 트레이너 선생님들의 갸우뚱한 표정과 함께 데뷔조에 들었다. 그리고 꼬박 두 달 동안 매일 밤새워 죽어라 연습하고 또 연습한 끝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게 되었을 때, 내리사랑이랍시고 작은 쇼케이스 공연장 객석을 반쯤 채워준 선배 그룹의 팬들과 심드렁한 표정의 기자들 앞에서 두 달간 어쩌면 지난 몇 년간 준비한 것을 한 시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선보였을 때, 그리고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그 모든 것이 꺼지고 다음 날 다시 연습실에 서 있었을 때 나는 어렴풋이 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되어 음질이 선명하지 못한 연습실 스피커에서 반복 재생으로 틀어놓은 데뷔곡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동안 무릎을 감싸 안고 주저앉아 멍하니 거울만 쳐다보았다. 데뷔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다. 문득 언니 생각이 났다. 데뷔가 결정된 후 단 한 번도 언니와 나눴던 나날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잊고 있을 수 있냐는 듯 그 모든 것이 선명히 떠올랐다. 무대는 무용하고 환호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끝이 떨리는 목소리와 윤슬을 반사하며 잔잔하게 반짝이던 눈과 바람에 날리던 머리카락과 얇은 옷자락 밑으로 느껴지는 풀밭의 감촉과 여름밤을 찌르르 울리는 매미 소리와 세강 오빠가 작게 튕기던 기타 소리와 조용히 뛰기 시작하는 내 심장의 고동까지 모든 것이 마치 지금 당장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생생했다.
그때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물어볼 걸 그랬다. 바보 같이 입을 다물고 남의 청춘을 엿보는 불청객처럼 힐끔댈 것이 아니라 물어봤어야 했다. 그럼 언니는 무얼 위해 연습생이 되었냐고. 무대도 환호도 돈도 인기도 그 무엇도 목적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불확실한 미래를 좇고 있냐고.
그것만이 연습생 시절에 남기고 온 후회의 전부였다.
◈
내가 데뷔조에 들기 얼마 전이었다. 언니가 연습 대신 실장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불 꺼진 연습생 숙소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려도 언니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던 어느 날, 언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라졌다. 나에게 주었던 민트색 바람막이를 허물처럼 남긴 채.
◈
지하 공간에서 파티션 하나로 다른 아이돌 그룹과 자리를 나누던 신인 시절을 거쳐 소파까지 있는 넓은 대기실까지 올라오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대기실 한구석에 마련된 탈의실에서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자 스타일리스트 언니가 바디체인을 건네주었다. 한 줌 온기라도 날아갈라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이었다.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익숙하게 바디체인을 착용하고 무대에 나갈 준비를 마무리했다. 다 모이라는 리더의 구령에 맞춰 힘 빠진 구호를 외쳤다.
불 꺼진 무대에 올라가 프롬프터와 함께 마음속으로 카운트 다운을 센다. 무대는 여전히 무용하다. 채 10분도 안 되는 이 무대를 위해 몇 주를 혹은 몇 달을 갈아 넣는다. 환호는 여전히 순간이다. 조명이 켜지고 나를 보며 소리 지르는 관객들은 잠시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아이돌의 이름을 부르고 똑같이 환호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무대를 갈구하고 환호에 산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돈이니 인기니 하는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저 신기루를 좇아야만 만족하는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러 아이돌이 나오는 합동 콘서트는 음악방송과 다를 바 없다. 자기 무대가 끝나면 대기실로 내려가 전체 출연자 순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컴백한 지 얼마 안 된 그룹이라면 친분 있는 그룹과 챌린지를 찍으러 대기실을 순회하고, 연차가 낮은 그룹은 복도에 일렬로 서서 지나가는 모든 생물에게 인사하며 눈도장을 찍는다. 내가 있는 그룹은 적당히 연차가 있는 데다가 보통 챌린지를 담당하는 멤버가 정해져 있었다. 내가 할 일은 대기실을 어슬렁거리거나 음료수 심부름을 하는 것 정도였다.
“수현아!”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고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세강 오빠였다. 오빠는 끝내 다른 회사로 옮겨 나보다 이 년 늦게 데뷔했다. 회사를 나갈 때 분명히 서로 연락하고 지내자고 했건만, 연습생이란 신분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없었을뿐더러 머릿속이 온통 연습과 월평과 데뷔로 가득 차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건 아마 세강 오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오빠가 회사를 나간 이후로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주고받지 않았다.
신기한 것이, 그토록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연습생 때 알게 된 지인들을 만나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신변잡기나 연습생 시절의 추억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애당초 우리 둘을 이어준 것은 언니였으니 대화 속에서 언니 생각이 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나는 언니의 행방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비록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갔지만, 세강 오빠라면 언니가 왜 떠났는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었다.
언니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세강 오빠가 눈썹을 움찔했다. 덩달아 내 고개도 갸웃 돌아갔다. 세강 오빠는 아, 나 어, 따위의 말로 시간을 끌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래, 넌 못 들었겠구나. 누나는 지금……”
◈
여름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간다. 녹아내릴 듯한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바쁘게 길을 오갔다.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의 문자판에 오후 세 시를 나타내는 숫자가 떠올랐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로수 그늘 아래 숨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모두 직장이나 학교에서 바쁘게 보내고 있는 이 시간에 산책하는 것이 최근 나의 취미였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도착한 후에야 숨을 돌릴 겸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심 속 앙상한 가로수와는 달리 두 팔을 크게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두꺼운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홀린 듯이 나무 앞에 선 내가 발견한 것은 매미의 허물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투과되어 밝은 황토색을 띠었다. 속이 비어 있다는 증거였다. 매미가 짧은 생을 위해 날아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레 허물을 떼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벌어진 틈새로 안이 엿보였다.
팔 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는 다시 그 여름날의 청계천에 앉아 있다. 나는 여전히 언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언니는 여전히 답을 주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원히 승자를 알 수 없는 그날의 내기와는 달리 이제는 번데기가 갈라진 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뿐이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