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던가
째깍째깍, 띠디딕. 요란한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그 사이에는 한 명의 앳된 소녀가 있었다. 그 옆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듯.
다나에는 최근 천국의 시간부서와 서기관의 손을 빌려 협업 중이다. 듣자 하니 과거 기록에 불확실한 것이나 상관 관계가 맞지 않는 역사들이 있어,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시간 이동 장치가 필요하댄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만큼은 다나에 부장님도 함께 해주었으면 합니다. 악감정 따위는 없습니다. 나는 천국으로 오자마자 기록이나 하던, 뭣모르는 하늘의 사관일 뿐이니까요."
"과연... 보잘 것 없는 지식 하나 없는 저라도 이해는 됩니다. 저 따위라도 위대한 메타트론 서기관님의 도움이 된다면 영광입니다만, 저희 '신'님께선 허락하시덥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을 뺏지 않고 스스로 이행하겠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흔쾌히 허락하시더군요. 그 콧대높은 지옥의 왕이 그럴 리가 없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래 전에 그쪽 회사의 어느 부장님 둘이 사고를 쳤다더군요. 그때의 일을 알고 싶다던가..."
다나에는 자신이 벌인 소동은 없는지 기억을 되짚어봤다. 다행히 없나...? 최원호 님이 멋대로 수명을 늘린 일 때문이던가...
"걱정 마세요. 다나에 부장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은 어떱니까."
"감히 저 따위가 메타트론 서기관님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죠. 예의를 범하지 않도록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그 격식차린 말처럼 곧바로 저승으로 내려간 다나에의 뒷모습을 본 메타트론이 무심코 천국의 역사서를 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 지금까지도 연재되는 수필 장편소설의 저자는 당연하다면 당연히 서기관 메타트론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겠다 하였다. 다나에 부장은 화자에게 눈길을..."
... 이 사람이군요. 우리를 부정하고 탄압한, 잔혹하기 그지없었던 냉혈안.
"그대여, 과거를 마주할 용기는 있는가.
그대여, 고결함을 잃지 않을 각오는 마쳤는가.
그대여, 무엇이든 용서할 자비를 갖췄는가.
그대여, 중립을 지켜낼 공정을 가졌는가.
그대여, 모든 것을 관용할 인성을 드러냈는가.
그대여, 즐곧 믿고있던 신념을 지켜냈는가.
그대여, 너의 희망은 온전히 보존되었는가."
그대여.
"우와, 대박. 이게 그 시간 여행 장치예요? 쩐다."
"무슨 조상님 앞에서 말을 그렇게 합니까?"
"그러니까 저는 조상이라고 불릴 만큼 위업을 남긴 인물도 아니고, 그렇게 선한 사람도 아니라니까요."
그것이 다프네의 첫 감상평이었다. 확실히 현대인에겐 익숙한 클리셰인가... 생각하던 카론은 습관처럼 다나에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자, 그래서. 제 미천한 프로젝트 완수 따위를 위해서 기꺼이 봉사해주실 분을 한 분 모셔와야 하는데요... 실례인건 알지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엇, 저요."
뜻밖에도 손을 든건 아칸이었다. 다나에도 마침 의문을 표하려던 찰나 말을 이었다.
"아니아니, 저 말고. 할 짓 없는 놈이 한 명 있거든요. 다나에 공 원수인데, 하일리 가문이라고 아시려나?"
"엇."
아칸이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할 일 없으니까, 라는 핑계로 불러내는 귀족들의 장난이 낮설었던 다나에가 그 자리에 멈췄다.
"시간관리국 부장이더니 진짜 시간이 멈춰버렸네."
"시간관리국이 아니라 시간관리부서요. 그리고 아마 그건 아닐걸요. 저기, 다나에 부장님?"
"아, 예. 유감스럽게도 잘 살아있습니다. 무슨 용무로 저 따위를 부르셨나요?"
"제가 사회생활 할 적에도 그렇게 낮추진 않았거든요...? 진짜 하일리 씨 오시면 태울겁니까?"
"진짜찐짜 만약이지만, 본인이 수락한다면 어쩔 수 없이 태워야겠죠...?"
카론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 지옥에나 떨어질 윗대가리 놈들..."
어쩌다가 끌려온 카란이 자연스레 각잡힌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냐. 자제하라고 배운적 없어? 뭔하면 저걸 아작내는데?"
"네네, 죄송합니다... 네."
"조상님이라고 대충 넘기지 말고. 애초에 하는 짓 보면 조상도 아닌 것 같은 놈이 뭘 하겠다고..."
왜 이렇게 됐냐 하면, 이유인 즉슨, 오자마자 사고를 친 카란이 감시하던 다프네에게 딱 걸린거다. 하필 사고를 쳤다는게 유지 장치를 부숴먹었고.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더 견고히 만들었어야 이런 불상사도 없었을텐데 죄송합니다."
"진짜로 죄송합니다. 그... 다나에 공. 괜찮으면 제가 사죄 겸 시험해봐도 됩니까?"
"하일리 님께서? 굳이 이런 저급한 일에 휘말리실 필요는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잔소리를 피할 구실이 생긴 카란이 이때다 싶어 다나에에게 구구절절, 사교계에서 주워들은 갖가지 화려한 수식언까지 붙혀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요, 제가 여기에 오기도 훨씬 더 된 몇십 년 전, 다나에 공이 억울하게 화형당한 것도 먼 미래의 소란일 정도의 아득한 오래 전은 거의 희미하게나마 겨우 기억하는 지라... 이런 보잘 것 없는 사정은 둘째 치더라도. 이미 몰락한지도 수백 년이 넘어 좁쌀보다도 조금 더 적게 간신히 남아있는, 병력 차가 수만 대 수백 정도로 압도적인 바람에 미래가 뻔히 보이는 전쟁처럼 별 보잘 것 없는 하일리 가의 명예라도 전부 걸고서, 이 하일리 카란, 사고로 행방불명이 되거나 객사해버리더라도, 그와 동시에 사죄를 한다는 명분도 있으니 꼭 시험해보고 싶다, 이 말입니다. 감히 다나에 공 앞에서 이렇게 추하고 불성사나운 모습 보여드려 다시 한 번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쉽게 말해 다나에 씨한테 대가리 박을 겸 옛날 첫사랑이라도 찾고 싶다 이거잖아. "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게 맞긴 한데."
다프네의 한마디에 뻘쭘해진 카란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옛날 기억이 안 나는건 사실이라서. 이래봬도 그거때문에 살아있었을 때도 힘들었다고. 다들 기사단에 들어온 계기를 말하는데 나만 모르고... 이건 양반이지. 우리 집안은 쓸데없이 엄격했어서 직계 아들인 나도 기사단에 가입하려면 입단 시험을 봐야 했는데, 음... 요즘 말로 하면 면접이지. 그 면접에서 입단 동기를 물었는데, 뭐가 기억이 나야 말하지. 결국엔 한 번 떨어졌어. 다음에는 형님이 준비해둔 지루한 대본 같은걸 줄줄이 외워서 합격했고."
"그 정도면 동기는 충분해요. 아무리 수녀 나부랭이인 저라도 귀담아 경청했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어떻게든 희생하려고 하시는군요. 그래봤자 좋을건 없는데도."
조용히 기계를 작동시킨 다나에가 카란을 일으켜주었다. 몇 장의 양피지로 이루어진 안전수칙 매뉴얼을 받아든 카란은 덤으로 받은 기계장치의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디자인은 대단하네... 다음에 참고해볼까."
스팀펑크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기계였다. 사람 한 명 들어갈 것 같은 비좁은 탑승구에 올라 코 앞에 있는 천장을 살피면 특유의 시계 형상이 새겨진 황동이 빛날 것이다. 겉보기에도 물론 고풍스러운 자동기계였다. 톱니바퀴와 황동 조각으로 이루어진 기계. 과부화로 멈출 것 같으면서도 기름칠 몇 번으로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갈 기계. 이중으로 설계된, 그렇지만 1차로 막은 외부의 황동 보호막은 얇은 판을 언제 부숴져버릴지 모를 자물쇠로 잇고 있었다. 그 안의 2차 방어막은 자신의 너머를 보여주지 않을듯 견고하되 두꺼웠다. 그 어떤 공격도 뚫리지 않을 두꺼운 막이, 방금 막 자물쇠가 풀림으로서 드러났다.
"자, 하일리 님. 오랜시간 지루하게 하여 송구합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원하시는 때에 들어가 안착해주시길 바랍니다. 비룩 불편하시어도 잠시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빨리 끝났군요. 즐거운 여행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기대하는 만큼 그리 즐겁진 않을테니 미리 사과드리죠. 아까 보고드렸듯, 제 불찰로 그리 견고하지 못한 탓에 유지 장치가 망가져 버려서요. 길어봐야 몇 분이 고작일 겁니다."
"...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을 뒤로 두꺼운 황동 벽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톰니바퀴와 시곗바늘이 멋대로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조상님 진짜 개쩐다."
"아뇨, 이런건... 저 따위는 아주 조금 배운 기계학의 기초일 뿐인걸요."
"그러니까 쩐다고요."
카란은 자신이 앉을 내부를 조심스레 살폈다. 누군가를 신경쓴 듯한 의자의 굴곡이 눈에 띄었다. 아마 나겠지. 다나에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눈치를 본 카란이 얌전히 자리에 착석했다.
"잘 다녀와 조상님. 첫사랑 꼭 기억하고."
"안전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운행 도중에는 별 일 없길."
"굳이 걱정을 해줘야 하나... 화이팅. 적응 잘 해라."
다나에가 이것저것 만지더니 기계장치 옆에 달린 레버를 힘껏 당겼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이 느리게 닫혔다.
"부디 평안한 여행이 되시길. 언제나 신이 함께합니다."
쿠구궁, 금속이 맞물리는 굉음 속에서 카란은 천장을 응시했다. 정가운데에 새겨진 세밀하고 정교한 시계의 시침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무슨 무가의 아들이 예술이야. 그런건 하등 쓸모없다니까."
"겨우 강아지 한 마리 살리겠다고 그렇게 군거야?"
"학문도 겨우 떼는 주제에 어딜 나돌려고."
"잡초에 핀 들꽃이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려무나."
"아직도 예술이니 하는 헛소리나 하느냐?"
"가문의 명예를 기억해라, 하일리."
희미하게 들리는 환청에 조심히 눈을 떴다. 나는 출발하기 전이었을 아까와 다름없이 황동에 새겨진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시침이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4시였던 시침은 1시를, 정각에 멈춰있었던 분침은 32분을 가리켰다. 진짜 성공했나?
"이야, 이거... 겉멋이 아니었구나. 제대로 작동도 할 줄이야. 그러니까, 나가는게..."
설명서를 따라 입구에 채워둔 빗장을 잡아빼고 두꺼운 벽을 힘껏 밀었다.
"... 설마 진짜로 나 어린 시절이야?"
그 녀석을 처음 만났던 그 시장 골목과 완전히 같은 곳이었다. 다나에 공 최고다. 조심히 거리를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도 않는 기척이었다. 뭔... 뭐더라, 타임 팰리스? 그걸 막으려고 이런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날 만난 기억은 없으니까...
사실 유년기 시절 기억은 그 녀석 연관된 일 빼곤 아예 없으니까. 그걸 찾으러 온거지. 자, 그럼. 어떤 기억들이 있었는지 볼까.
무의식 중에 기계장치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른채 잠든 내가 있었다. 뭔데. 어떻게 한건데. 다나에 공 이거 진짜 뭐에요??
다시 정신을 다잡고 주변을 돌아다닌다. 이거 추억회상도 되고 좋네. 아무 생각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게 무슨 노래였더라,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금방 가까이 위치한 검푸른 저택의 뒷마당에서 같은 노래가 들렸다.
하일리 가문의 고유 기사단, 청랑의 군가.
이 노래를 여기서 들을 줄이야. 솔직히 좋은 기억은 없어서 무시하고 있었는데 무의식에까지 침투한게 짜증났다. 내가 뭐 얼마나 놀았다고. 이게 들린다는건 우리 집안 사람들이 행진할텐데.
"..."
아무말 없이 기다렸다. 군가의 2절이 들리도록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단체로 어딜 가기라도 했나. 내 기억상에 군사 일정으론 별 일 없는데.
혼란스런 머릿속을 대충 정리하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혹시나 싶어서 실험해봤는데, 난 여기서 유령 비슷한 존재인 것 같다. 상호작용도 못하는 그런 존재. 발길이 닿는대로 향하니 작은 동산에 도착했다. 10대 청소년 정도가 뛰놀기에 넓고 탁 트인 동산이었다. 예전엔 그 녀석이랑도 같이 놀았었는데. 멋대로 그림도 그리고, 그러다가 부모한테 혼나고. 그런 것도 좋을 나이였다. 지금은 그런 기억따위 잊었지만. 애초에 가능하면 잊는게 상책 아닌가. 무슨 일이었는진 몰라도 이렇게까지 싫은 기억만 있으면 무조건 잊어버려야지.
누군가 군화로 잡초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주위를 살폈지만 이상 무... 는 아니었다. 저 멀리, 한껏 세계를 즐기다 온 방랑자 신세의 소년이 있었다. 아닌가, 방금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체구. 내가 저맘때 쯤 저랬다.
설마.
방랑자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누군가를 기리는 듯, 동시에 절망한 듯, 어느 쪽인지 알 수 없게 그저 그러고 가만히 있었다. 본능적으로 방랑자에게 달려갔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나에 공, 이건 너무하잖습니까. 아무리 어릴 때의 기억을 보고 싶다고 해도, 가장 어렸을 때를 보여주시면 어떡합니까.
전신을 가린 망토를 덮은 방랑자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일까... 나는, 너를 찾고 있었어.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몇 천년이나 지나버린 지금 전하러 갈거야. 움직이지 마. 너는 지금 그대로가 어울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차피 전략은 특기가 아니야. 우선 지르고서 생각한다면 몰라, 생각 같은건 다른 가문 녀석이나 하는 짓이다. 소용 없다는걸 알면서도,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럼에도 단지 외칠 뿐.
너는 나쁘지 않아.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된 건 세상이야.
울지 말고 일어서. 일어서서 검을 쥐어. 그렇게 강해져서 세상에 복수해.
네 멋대로 굴게 두지 못한 세상에 너 자신을 새겨내.
최후까지 저항해. 믿음을 칼날로 바꿔서, 눈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베어내라고.
그게 너의 꿈이잖아.
그러니까 울지마. 울지 말아줘.
너는 강하잖아.
지킬 수 있었잖아.
놓치지 않았잖아.
포기하지 않는구나.
도대체 왜 포기하는데.
너는 아직 지킬 것들이 많지.
네가 뭘 놓쳤다고 포기하는데.
허영심에 물들지 말고 현실을 살펴봐.
그렇게 자책이나 하다가 흘려보낼 셈이야?
너 말고는 할 수 없으니까.
네가 뭘 잘났다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하일리 카란.
내 말 들어.
"너는 이제부터 제멋대로 살테니까,"
태엽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망각했다.
사람 한 명 들어갈 것 같은 비좁은 탑승구에 올라 코 앞에 있는 천장을 살피면 특유의 시계 형상이 새겨진 황동이 빛날 것이다. 겉보기에도 물론 고풍스러운 자동기계였다. 톱니바퀴와 황동 조각으로 이루어진 기계. 과부화로 멈출 것 같으면서도 기름칠 몇 번으로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갈 기계. 이중으로 설계된, 그렇지만 1차로 막은 외부의 황동 보호막은 얇은 판을 언제 부숴져버릴지 모를 자물쇠로 잇고 있었다. 그 안의 2차 방어막은 자신의 너머를 보여주지 않을듯 견고하되 두꺼웠다. 그 어떤 공격도 뚫리지 않을 두꺼운 막이, 방금 막 자물쇠가 풀림으로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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