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신부
The Astraean Bride
아스틸과의 여행을 되돌아보면 퍽 일관성 없는 장면들의 나열이다.
광장 바닥을 수놓은 대리석 무늬, 기차 삼등석 통로를 도르륵 가로지르는 트롤리, 라벤더 꽃밭 위를 흐르는 구름, 미로처럼 얽힌 골목, 흰 포말, 갑작스러운 소나기.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 그러나 순간을 보존하듯 선명한.
혁명이란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혁명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혁명 뒤에 오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도모하고자 하는 지표 없이 사상과 신념은 눈가리개를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혁명가라는 것은 미래로 달려나가는 사람이라 하겠다. 현재에 발붙이지 않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질주하는 사람.
아스틸과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관광 목적의 여느 여행처럼 반드시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일정에 맞춰야 한다며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계획이 어긋나도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전력질주한 끝에 간발의 차로 기차가 눈앞에서 경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일이 있어도 몇 분 후에는 가벼운 농담거리 삼을 수 있다. 짐이 너무 많았나? 여기서 짐을 더 줄이면 당장 내일 입을 옷도 없어집니다만. 단벌신사 생활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은데. 경험담입니까? 글쎄요.
또렷한 목적이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현재를 더 선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래를 따라 부유하거나 과거를 향해 침잠하는 대신, 넓은 바다 위에서 섬을 하나 가리켜 보이며 당신이 있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소리내어 선언하는 것과 같다.
노을에 물들어 붉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지붕들, 그 끝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나누던 대화를 기억한다. 막 동행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고개를 돌리면 같은 풍경을 보는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직 낯설게 느껴지던 때.
당신과 오길 잘한 것 같네요.
아스틸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생경해서. 그런 시기였다.
좋잖아요. 지금을 기억할 사람이 세상에 한 명 더 있다는 건.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선을 응시하던 눈이 돌아보며 시선을 맞춰 왔다. 저녁 해는 지고 있지만 그 빛은 넘실거리며 쏟아져내렸다. 옅은 머리칼을, 흰 뺨과 어깨를 타고 흘렀다. 아마 자신의 아마빛 머리카락 위에도 같은 빛이 어려 있을 터였다. 색채 안에서, 황혼의 광채만큼이나 강렬한 기억을 공유하면서.
당신의 말이 맞다. 앞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노을이 지고 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감상하겠지만 지금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이 순간을 유일하게 만드는가. 그 안에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실낱같은 단서가 들어 있다.
동행이란 연속적이던 시간을 조각내어 나눠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로 살아가다가 문득 꺼내 보는 것이리라. 그 외의 방식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막연한 감각을 통해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그와 자신의 관계에는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레프가 바라본 창밖의 저녁 풍경은 그때의 바다와 노을을 연상시켰다. 해안선 대신 낮게 깔린 구름과 완만한 능선의 산맥이 시야를 메우고 있어 실상 아예 다른 풍경이었는데도 어쩐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산꼭대기를 거점 삼아 드문드문 쌓인 눈이 오렌지색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저 산이 노르웨이 국경의 일부라고 했다. 산 너머에는 핀란드의 라피 지역이 있다. 레프는 창밖에서 눈을 돌려 아스틸의 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스틸은 디저트로 주문한 아몬드 케이크를 반으로 잘라 접시에 나누는 중이었다.
핀란드는 아스틸의 양부모가 사는 곳이다. 아니, 지금은 아스틸과 그 부모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말해도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간 가끔 주고받아 온 편지에 의하면 아스틸은 반년에 가깝도록 핀란드의 라흐티에 머물고 있다.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스틸은 한 장소에서 몇 주 지내고 나면 훌쩍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곤 했다. 받은 편지가 같은 지역에서 날아온 일조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 몇 달간 아스틸이 쓴 편지는 늘 같은 주소가 적혀 같은 우체국의 직인이 찍힌 채로 배송되어 왔다.
레프가 일 때문에 노르웨이를 거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식사 약속을 잡는 연락을 보내 오긴 했지만 이 또한 평소와는 달랐다. 시간이 맞는다면 언제든 함께 여행하곤 했으니 노르웨이를 거쳐 다른 곳으로 향하는 여정의 일부를 함께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디서 여로가 갈릴지,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지를 의논할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겠다는 말은 없었다. 들고 온 가방도 여행용이 아니었다. 꼭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
편지가 왔다고는 해도 안부를 묻는 정도의 길지 않은 내용이었고 핀란드에 오래 머무는 것에 대한 설명은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던 탓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가족과 함께 살기로 마음을 정했는지도 모르고, 가족 가까이에서 정착해 지낼 만한 장소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응원을 보내야 마땅할 테지만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함께하는 날이 계속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혁명이라는 일을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와의 동행이 긴 주기를 둘지언정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암묵적 전제가 존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묻고 싶은 질문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던 결과 식사 내내 어딘가 핵심을 비껴가는 듯한 대화가 오갔다. 잘 지내고 있는지, 그동안 어떤 곳을 돌아봤는지. 레프는 북해와 노르웨이해의 정경에 관해 이야기했고 아스틸은 리투아니아의 트라카이 성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 안 있어 돌아와야 했지만요, 라고 덧붙이면서. 왜, 어디로 돌아와야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던 탓에 더더욱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레프는 아스틸이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제 쪽으로 밀어놓았을 때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계속 핀란드에 계시는 겁니까.”
아스틸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 거예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오래 지내고 있는 것뿐이고.”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긴 평소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래 전 가출에 가까운 형태로 집을 떠났던 그가 양부모를 다시 찾아갔다는 것은 알았지만—그가 핀란드에 돌아가 보기로 결심했을 때 곁에 있었으니 모를 수 없었다—가족과의 재회 이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듣지 못했다.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레프는 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청해도 괜찮을지를 고민했다. 망설이는 이유의 반은 상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캐묻고 싶지 않아서였고 나머지 반은 정말 대답을 듣고 싶은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아스틸은 포크로 아몬드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잘라 입에 넣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침묵이 어색한 것은 아니다. 함께 다닐 때에는 흥미가 생긴 주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날도 있었고 이렇다 할 대화 없이 같은 공간을 점유할 뿐인 날도 있었다. 굳이 정적을 목소리로 채우지 않아도 느껴지는 안정감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건 관계의 거리감을 가늠하는 듯한 미묘한 침묵이다. 평온한 공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
"사정이란 게–"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레프는 먼저 말하라는 뜻으로 아스틸을 향해 손짓했다. 그 행동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채로.
"혹시 향후 10년 안에 결혼할 계획 있어요?"
"예?"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고 있자 때마침 아스틸이 친절하게 다시 한 번 반복했다.
“향후 10년 이내에 결혼할 예정 있냐고요.”
앞뒤 맥락 없이 튀어나오기에는 지나치게 특수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조건까지 붙어 있다. 향후 10년. 계획을 물으면 물었지 왜 10년이란 말인가. 결혼이라는 행위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어쨌든 레프는 최대한의 성의를 발휘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없습니다. 그런 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렇게 답하고 나서도 영 명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레프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왜 물어보신 겁니까?”
"음."
아스틸은 말없이 테이블 한쪽에 놓인 물병을 들어 잔에 물을 끝까지 채운 뒤 레프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무슨 의미로 하는 행동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이내 가벼운 투로 답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딱히 계획이 없다면 나랑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예?”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면 무슨 헛소립니까, 같은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거절해도 괜찮아요. 정말로."
"아니, 잠깐..."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에 시선이 갔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부터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할 예정인데 들으면 목이 타는 기분이 들 테니 미리 준비해두겠다, 는 미래예지적 배려였던 건가. 레프는 찬물을 몇 모금 넘기며 이럴 때에는 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자문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말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무슨 헛소립니까’ 를 적당히 순화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해가 안 가는데…”
“요약하면 프러포즈인가? 더 짧게 줄이면, 청혼이네요, 네.”
청혼이라는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발음한 직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지금 이 말은 놀리려 한 것일 가능성이 다분해 보였다. 항의의 눈빛을 보내자 아스틸이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올려 보였다. 장난치다 들켰을 때의 버릇이다.
“사실 자세한 설명은 따로 있는데, 당신이 왜 물어보냐고 해서 일단 결론부터 말해줘야 할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본론을 생략하지 마십쇼, 제발…”
아스틸은 잠깐 웃음을 참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핀란드에 오래 있게 된 이유 말인데… 사실 지금 좀 끈질긴 결혼 권유를 받고 있거든요.”
결혼을 장려하는 일은 어느 문화에서나 으레 있기 마련이니 특이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아스틸이 그 당사자가 되는 것은 어쩐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아한 점은 그가 그 끈질긴 권유를 떨쳐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거절하지 않으신 겁니까?”
“양부모님이, 특히 어머니께서 간곡히 부탁하셔서요.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못 들은 척하고 떠났을 텐데, 그분들을 상대로 말없이 도망치는 건 이미 전례가 있으니까.”
담담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말은 약간 힘이 빠진 것처럼 들렸다.
“여행을 자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셨는데 아마 그래서 더 걱정되신 모양이에요. 아무리 그런 생활이 익숙하더라도 혼자 떠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니 반려가 생기면 그제야 안심이 좀 되실 것 같다고, 좋은 사람을 수소문해 볼 테니 당분간은 여기 지내면서 만나보라고.”
“그래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게 그런 부탁을.”
“그런 셈이죠. 정말 서류에 남겨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적당히 식을 올리는 척을, 이지만.”
“그걸로 되는 겁니까?”
“…해줄 의향이 있는 거예요?”
아스틸은 긍정적인 답변이 나올 줄은 몰랐던 듯 눈을 깜빡이며 레프를 바라보았다. 물론 쉽게 수락할 수 있는 제안은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절차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번거로운 과정이 동반될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미래의 배우자 행세를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며 원치 않는 사교의 장에도 나가게 될 것이다. 거절할 이유는 수없이 많고 수락할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다. 상대를 돕고자 하는 마음. 예상되는 모든 불편을 무릅쓰고라도 기꺼이 선의를 베풀고 싶은 상대인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일이 끝나면 몇 주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겁니다. 좋은 결혼 상대로 소개하기에는 결격사유가 많습니다만, 그래도 상관없다면.”
“그런 부분을 어떻게든 하는 건 내 전문이지만… 좀더 생각해 봐도 되는데요. 여차하면 고민 상담이라도 한 셈 치고 잊으라고 말하려 했는데.”
드물게 당황이 배어나오는 어조를 듣다 보니 아스틸이 자신을 놀리려 드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레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간결하게 답했다.
“더 생각해도 무르게 될 것 같지는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스틸 씨는 괜찮은 겁니까?”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해 버린 것은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평소 말이 생각을 앞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음에도 그 말은 저절로 흘러나왔다. 부탁한 사람은 아스틸이고 수락한 사람은 자신인데, 괜찮냐고 확인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무엇을 묻는지도 모르는 채 던진 질문이 핵심을 꿰뚫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스틸은 천천히 미소지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모든 걸 말해주지도 않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레프가 핀란드에 도착하게 된 것은 그 대화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였다. 아스틸의 양부모가 살고 있는 장소는 작은 마을의 중심에서 숲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일전에 숲 바깥까지 동행한 일은 있었지만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을까지 마중을 나온 아스틸과 함께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법한 좁은 길을 20분가량 걸어 숲 안쪽을 향했다.
숲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자작나무였다. 나무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져 점박이 무늬를 이루고, 흰 바탕과 검은 점들이 빼곡하게 시야를 메우고 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비슷하게 보이는 탓에 길을 잃으면 그대로 헤매게 될 듯했다.
“그러고 보니 호칭 말인데. 이름으로 통일할까요? 나이도 비슷한데 한쪽만 존칭을 붙이는 건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 논리대로라면 아스틸 씨가 존칭을 붙이는 걸로도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레프 씨?”
“…역시 그냥 제가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런 식의 별 것 아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라기보다는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림직한 우아한 건물이었다. 수려한 철제 울타리가 정원과 집을 둘러싸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아치형 정문에는 섬세한 조각까지 새겨져 있었다. 아스틸은 익숙하게 문을 열고 안쪽으로 손짓했다. 이름을 전부 열거하려면 한참이 걸릴 정도로 다양한 꽃과 식물이 만발한 정원을 가로질러 다다른 현관을 열자 고풍스러운 장식과 함께 복도와 계단이 펼쳐졌다. 유복한 집안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쪽이에요.”
복도를 지나던 도중 레프는 벽에 걸린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온화한 얼굴의 부부가 어린 아스틸의 어깨를 감싸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아스틸은 한쪽 앞머리를 살짝 늘어뜨려 검은 눈을 가리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원피스를 차려입은 채였는데,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어딘가 경직된 자세에 창백한 피부가 더해져 꼭 도자기 인형을 연상시켰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싶어 걸음을 멈추고 있자 아스틸이 레프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별로 볼 만한 사진은 아닐 텐데.”
“마음에 안 드십니까?”
“솔직히 좀 부끄럽네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아예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닌 듯싶었다. 아스틸이 먼저 걸어가 버리는 탓에 레프는 이유를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이내 다다른 곳은 복도 맨 끝에 있는 흰 문 앞이었다. 아마 응접실일 것이다. 아스틸은 아주 잠깐 주저했다가 곧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말씀드렸던 사람이에요.”
레프는 그 어조가 못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평소 알던 아스틸의 말투와 꽤 다르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열린 문 안쪽에 있던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소파 위에 앉은 부인은 작게 탄성을 흘렸고 그 옆을 지키던 머리가 희끗한 신사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복도에서 보았던 사진 속의 모습에 비해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어머나, 이 분이….”
“직접 나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내가 최근 거동이 불편한 탓에.”
그 말을 듣자 비로소 부인의 손에 지팡이가 들린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다정해 보이는 얼굴 곳곳에도 수척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빈말로도 건강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 같았다. 이번에 아스틸을 붙잡은 것도 그런 이유일까. 몸이 더 약해지기 전에 자식이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은 그리 드문 바람은 아닐 터였고, 아스틸이 거절하고 떠나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간다. 굳이 향후 10년을 강조한 이유도.
“괜찮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들으셨겠지만 아스틸 씨의…”
레프가 적당한 단어를 생각하다가 주저하는 사이 아스틸이 대신 말을 받았다.
“약혼자인 레프 아스트라이아예요.”
가명을 댈지 본명을 그대로 밝힐지에 대해서는 꽤 고민했는데 혁명가 레프 아스트라이아의 이름을 알더라도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결론 하에 본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살면서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 호칭—약혼자—때문에 드는 기묘한 기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만은 단점이었지만.
“딸아이를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스트라이아 씨. 그동안 여러 사정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결정하시기까지 어려움이 있으셨을 텐데 이 아이를 택해 주신 것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아스틸과 레프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남편 쪽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동안 레프는 재빨리 아스틸에게 눈빛을 보냈다. 대체 어떤 설명을 한 겁니까? 같은 뜻이었는데 평소라면 어깨라도 으쓱해 보였을 아스틸은 얌전히 정면을 주시할 뿐이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결국 레프는 최대한 무난하게 구성한 문장으로 답했다.
“…저야말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제게 부족한 점이 많은데 곁에 있어주시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감동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딸아이도 좀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자주 여행을 다니더라도 거점을 두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요. 이 아이는 한동안 어린 시절의 치기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탓에 걱정이 많았답니다. 의지할 수 있는 배우자가 있다면 방랑벽도 분명 덜어지겠죠. 그렇지 않니, 아스틸?”
레프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 번 아스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아스틸이라면 결코 수긍하지 않을 법한 문장이었다. 정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그동안의 여행을 단순한 치기로 치부하는 말이 기꺼울 리 없다. 그런데도 단정한 미소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고 심지어 살짝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어머니.”
그 모습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는 아스틸은 온데간데없고 이 저택에서 자라 온 아가씨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함께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크게 의식하지 못했지만 아스틸은 장식이 달린 셔츠 단추를 꼼꼼하게 잠그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평소보다 한층 깔끔한 차림이었다. 그 부분마저 위화감의 큰 축을 차지한 탓에 레프는 시선을 돌리고 정면을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큰 특징 없는 문답이 몇 번 더 오가고 곧 신사 쪽이 자리를 정리하는 손짓을 했다.
“먼 길을 오셨을 테니 우선 위층에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딸아이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예, 감사합니다.”
내내 나긋한 투로 진행된 대화였음에도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는 솔직히 안심이 들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있자니 꼭 전략적인 담판을 짓고 있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겠지만.
2층에 준비된 손님방으로 가려면 복도 가운데로 돌아가 나선형 계단을 올라야 했다. 아스틸은 계단을 끝까지 오르는 동안 침묵했다가 방문 앞에 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여기서 혼자 지내도 괜찮아요. 난 예전에 쓰던 방이 있거든요.”
사실 그간 부득이한 이유로 한 방을 쓴 경험이 전무한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각방을 고집할 이유도 없긴 했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라 레프는 별다른 말 없이 끄덕였다.
“편하게 지내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치고는 경직된 표정이었던 탓에 레프는 잠시 생각하다 그 점을 지적했다.
“아스틸 씨도 편한 표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들켰네요. 이젠 당신도 내 표정을 제법 잘 읽게 된 것 같아요. 어쩐지 분한데.”
피로한 기색이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걱정되는 한편으로도 아스틸의 말투에 비로소 평소다운 농조가 섞였다는 점에서 이유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눈앞의 상대가 전혀 모르는 낯선 존재에서 비로소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일까.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당신에게 이런 걸 보여주고 싶진 않았거든요.”
아스틸은 제 뺨에 손을 올려 보더니 곧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거라면 정확히 어떤?”
“…….”
그는 대답을 미루면서 레프를 대신해 문을 열어주었다. 침실은 널찍했고, 침대는 물론 소파와 발코니까지 딸려 있어 호텔의 스위트룸을 연상시키는 구조였다. 혼자 지내기에는 다소 화려한 풍경이었던 탓에 눈을 깜빡이고 있자 아스틸이 물었다.
“레프, 사람의 본질이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레프는 제법 신경을 기울여 생각했다. 그는 본래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악한 사람도 선해질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현명해질 수 있으며 유약한 사람도 강인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각 개인이 어떻게 해도 움직여지지 않는 천성을 타고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운명을 낱낱이 쪼개 다시 이어붙이려 들어도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 인간의 어떤 부분이 운명이라는 직물 위에 수놓인 무늬라면 어떤 부분은 날실과 씨실 자체에 새겨져 있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음을, 분리하려 해도 불가능함을 그는 직접 경험한 일이 있다. 그래서, 나온 대답은 짧은 동시에 단호했다.
“바뀌는 것이라면 본질이라고 부르지 않겠죠.”
“…역시 그렇죠.”
열린 문 바깥에서 레프와 함께 방 안쪽에 시선을 둔 채로 아스틸은 짧게 웃었다.
“당신에게만은 본질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스틸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무슨 의미인지 자세히 물을 새도 없었다. 레프는 복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방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것을 바라보다가 제 몫의 손님방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그동안 함께 여행하며 지냈던 숙소들을 옆에 늘어놓는다면 죄다 볼품없이 보일 정도로 세련된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아스틸의 말뜻을 이해할 것 같아졌다.
아주 오래전,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스틸은 흘리듯 ‘그림같이 좋으신 분들’ 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림 같은 집에서 그림 같은 미소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 한때 그들을 떠나 방황하다 돌아온 딸이 믿을 만한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안온하게 살아간다면 그걸로 족할 사람들. 온전한 선의로만 이루어진 아름다운 가족이다. 그러나 그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도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문득 아스틸을 붙잡아 묻고 싶어졌다. 그림 같은 이들 사이에 어우러지기 위한 노력의 일부라고 해도, 당신 자신마저 액자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 온당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상대는 이미 벽 너머에 있었다.
실상 문 하나만 열면 닿을 거리임에도 그 어느 때보다 먼 간격이 가로놓인 기분이 들어 레프는 방 안에 머물렀다.
그 후 며칠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예식을 앞둔 예비 부부의 일과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아스틸의 양부모—그들의 성이 헨니넨임을 나중에야 알았다—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 후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가야 했다. 도심부와 떨어진 시골 마을이다 보니 이웃끼리 속속들이 아는 사이였고 근사한 숲속 저택의 외동딸이 외국에서 결혼 상대를 찾았다는 이야기에는 모두가 흥미를 보였다. 그 집 아가씨가 한때 가출해서 오랜 시간 종적을 감췄다가 돌아왔다거나, 친딸이 아니라 입양된 아이인 탓에 성도 다르다거나 하는 소문도 재차 사람들의 관심을 부추기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기대 섞인 눈빛을 받으며 인사를 마치고 나면 예식장의 확인이니 예장 피팅이니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택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할 무렵에는 심리적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 탓에 단둘이서 시간을 보낼 기회는 평소보다도 적어 느릿하게 흘러가던 동행의 일상이 약간 그리워졌다.
아스틸이 대외용으로 작성해 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두 사람의 직업은 작가와 상담사 (주로 쓰는 글은 시위 참여 독려문 내지는 선동문이고 주로 참조하는 상담 근거는 유사과학이라는 부분만 빼면 사실에 가깝다),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에서 만난 뒤로 (왜 하필? 낭만적인 여행지 1순위라고 하더라고요.) 첫눈에 반해서 (이건 정말 왜? …달리 댈 핑계가 생각이 안 나서? 아니, 생략해도 무방한 부분이잖습니까. 설마…. 네? 절대 당신이 이런 말을 하면서 괴상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었던 게 아니고요. 하……. )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아 왔다. 그러나 작가 활동의 무대인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레프가 망설이는 사이에 아스틸은 부모의 권유로 핀란드에 돌아와 지내며 상대를 잊으려 노력했는데 결국 두 사람은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떨쳐내고 재회를 결정했다……. 놀랍게도 그 누구도 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은 스토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짜낼 필요는 없었고, 설정에 맞춰 적당히 연기하는 데 전념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친절한 이웃이 곧 결혼할 두 사람을 만나볼 겸 주최했다는 다과회에 참석하게 된 날에도 둘은 정해진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레프는 헨니넨 부부가 선물한 정장을 갖춰 입은 채였고 아스틸은 예의 똑바른 미소를 지은 채로 레프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정말 예스러운 방식이군요.“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선 사람들을 건너다보던 레프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아스틸이 미안한 기색으로 그를 마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나쁘게 말하면 구식이죠. 앞으로 며칠은 더 이렇게 지내야 할 텐데 괜찮겠어요?”
“이 정도 일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저는 괜찮습니다. 아스틸 씨는?”
“반년이나 버텼는데 며칠쯤 더 못 할 것도 없—”
아스틸이 갑자기 말을 멈추며 정면을 바라보는 바람에 레프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까와 같은 한가로운 다과회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 레프의 눈에 별다른 이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스틸은 빠르게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서 적당한 기둥의 그림자 뒤로 몸을 숨겼고 손이 잡힌 채였던 레프도 얼떨결에 끌려가게 되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테이블 뒤에 있는 사람 보여요? 녹색 조끼 차림의.”
“갈색 머리의 저 사람 말입니까? 무슨 문제라도.”
“되도록 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도와줄 수 있어요?”
“아스틸 씨가 피해 다니고 싶은 사람도 다 있습니까?”
비록 내내 평소답지 않은 태도를 견지했다고 해도 대화를 피하는 모습만은 보인 적 없는 아스틸이었다. 곤란한 상황을 잘 넘기는 데에는 자신보다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이런 말을 하는 그는 제법 생소했다. 진심으로 난처한 표정이었기에 더더욱.
“…전 구혼자.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요.”
“…아.”
이유를 듣고 보니 난처할 만도 했다.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요. 설마 별일이야 있겠나 싶지만 일단은,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은 당부를 마지막으로 아스틸은 다시 레프를 이끌고 그늘에서 나와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 찬사와 질문이 쏟아졌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어디서 처음 만났느냐,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
“…식이 끝나면 함께 여행을 떠나보려고요. 긴 여행이 되겠지만 그 이후에 천천히 자리를 잡아서….”
아스틸이 적당한 대답을 꾸며내는 동안 레프는 아스틸이 말했던 녹색 조끼의 남자를 흘긋 확인했다. 그는 멀리서 이쪽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을 뿐 직접 다가와 말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진갈색 곱슬머리가 둥근 뺨을 감싸는 유순한 인상에 검은 안경이 퍽 잘 어울리는, 모범생 같은 인상의 청년이었다. 자신이 구혼하던 상대가 곧 결혼할 사람과 함께 인사하는 자리가 불편하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찾아온 것은 어째서일까. 설마 미련이라도 있나? 상대가 아스틸이라고 생각하니 역시 자세한 사정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잠시 더 지켜보고 있자 그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레프는 아스틸 곁에서 이따금 한 마디씩 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데 집중했다. 이런 일도 며칠 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전처럼 거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부담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다과회가 한창 진행될 무렵, 입가에 함박웃음을 띤 젊은 여성이 아스틸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였다.
“…해서, 오늘 오후는 이쪽에서 보내면 어떨까 싶은데. 네게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다른 사람들도 있고.”
“아, 하지만….”
“앞으로 둘이서 시간을 보낼 일은 많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랑 지낼 일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응? 반년 동안이나 이곳에 있으면서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쏙 빼놓다니. 아스트라이아 씨, 아스틸을 빌려 가도 괜찮겠죠?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올게요.”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지난 반년간 아스틸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아스틸이 그를 얼마나 친밀하게 여겼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인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묵묵히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혼자 이 자리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 배쯤 부담스러워졌지만 그건 아스틸도 피차일반일 터였다.
“난 이분들과 함께 있다가 저녁 식사 후에 집으로 돌아갈 테니 당신은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이 말은 분명 ‘타이밍을 봐서 도망쳐 나와도 괜찮다’ 정도의 뜻이리라. 짧게 시선을 주고받은 후 레프도 비슷한 의미로 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아스틸이 여자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고 나자 다가오는 사람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어졌지만 사교의 장에서 묵묵히 서 있는 것도 껄끄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레프는 열려 있는 발코니 쪽으로 나가 풍경을 감상하는 척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결과적으로 두 배는 더 껄끄러운 만남을 초래하게 되었다. 발코니에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레프 아스트라이아 씨, 맞으십니까?”
녹색 조끼의 남자였다. 이럴 때 ‘번지수 잘못 찾으셨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예, 맞습니다. …용건이라도?”
“아…. 저는 조나단 콜린즈라고 합니다. 엘리카 양에게, 그… 들으셨을까요.”
레프는 이보다 어색한 대화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지를 잠시 생각하다 결국 애매하게 답했다.
“대략적으로는.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불쾌하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그저….”
조나단은 안절부절못하며 안경을 치켜올린 후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오래 생각한 말을 한 번에 쏟아내려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몇 달 전 엘리카 양에게 거절의 이유를 물었을 때 사실은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답을 들어서요. 사정이 있어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지만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몇 달 전이라면 레프가 노르웨이에 도착해 아스틸을 만나기도 전의 일이니 그저 거절할 구실을 찾다가 한 말이 아닐까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얼굴을 붉힌 채 속사포로 말을 이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끼어들 여유도 없었다.
“저는 엘리카 양과 같은 학교에 다녔었습니다. 당시에는 다가가기 어려운 면이 있어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죠. 하지만 그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금방 익혀 적응하고, 조금 소극적이지만 신중하게 노력하는 모습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려 큰 소동이 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것은 10년이 더 지나고 나서였고, 제대로 대화를 나눈 건 고작 반년 전부터지만,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여전히 신중하고 온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함께하며 행복하고 안전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엘리카 양의 부모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대로, 그녀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돕고자 구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연달아 말한 조나단은 잠시 숨을 몰아쉬면서 레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프 아스트라이아 씨, 사실 작가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
“전 언론사에서 일합니다. 손바닥만 한 규모의 변변찮은 직장이지만 그래도 유명인의 이름이나 소식 정도는 남들보다 자주 접하는 편입니다. 엘리카 양이 당신에 대해 ‘누구인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던 것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열한 뒷조사라고 욕하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당신의 신변을 가지고 협박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조나단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했다. 수치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호소하고 싶어지는 동력이란 무엇일까.
“당신이 하는 혁명이라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 곳에 엘리카 양을 데려갈 생각입니까? 이런 말이 무척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당신이 그녀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안전하게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겁니까?”
따지자면 그 질문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우선 아스틸이 레프의 혁명에 동행하리라는 것부터가 사실이 아니고, 레프와 아스틸은 조나단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조차 아니니까.
그러나 그의 주장이 레프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아스틸의 안전을 철저히 보장하고자 한다면 애초에 관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선택이겠지만 지금껏 그렇게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교류는 이어지고 있고 동행은 띄엄띄엄 계속되어 왔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로 결심했던 날, 아스틸과의 인연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하던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어느 쪽이든 레프는 자신이 조나단에게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근본적인 부분을 반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게 무엇일까. 아스틸이라면 어떤 답을 원했을까. 조나단이 아는 신중하고 온화한 사람이 아닌, 레프가 아는 대담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답할 수 있는 말은 하나로 좁혀졌다.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 무조건적인 보호만은 아닐 겁니다.”
조나단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소중한 사람을, 뻔히 알면서도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겁니까?”
“그게 상대의 의지를 존중한 결과라면.”
“당신은….”
그 자리에 멈춘 채 레프를 바라보던 조나단은 마침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완전히 납득했을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달리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조나단도 그 이상의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레프는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그의 곁을 지나쳐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 *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아스틸은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레프는 조나단의 말을 곱씹으며 2층의 손님방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신변으로 협박할 생각은 없다고 했으니 제 직업에 관한 것이 알려질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정말 아스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뿐, 결혼에 훼방을 놓거나 아스틸을 적극적으로 만류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납득한 레프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멈춘 뒤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 방을 혼자 쓴 지도 며칠이 지났지만 지나치게 넓은 공간이 주는 공백감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 저택에 처음 발을 들인 아스틸 또한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레프는 복도의 사진 속에서 본 인형 같은 아이가 이 집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그림 속의 아가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노력은 결국 허무로 돌아가고 어린 아스틸은 저택을 빠져나와 담 너머의 자작나무 숲을 향해 혼자 걸어갔을 것이다. 주위에는 표지판 하나 없고 인도해 주는 것은 오로지 별뿐인데도 그게 가장 익숙한 사람처럼.
우연히 시선이 닿은 곳에는 채 닫히지 않은 창문이 있었다. 틈 사이로 새어드는 바람 때문에 커튼 자락이 느리게 흔들렸다. 창문을 닫으려 가까이 간 레프는 문득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아스틸 씨?”
벌컥, 완전히 열려 버린 창을 통해 들어온 차가운 밤공기가 그대로 피부에 닿았다. 아스틸은 정원 한가운데에 선 채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프의 목소리에 천천히 돌아본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왔어요.”
“거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그냥, 생각을 좀.”
“저도 그쪽으로 내려가는 게 나을지.”
아스틸이 끄덕이며 손짓하는 것을 확인한 레프는 나선 계단을 내려간 뒤 뒷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 그의 곁에 섰다. 아침에 입고 나갔던 니트 카디건을 허리에 대강 두르고 블라우스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올린, 그다지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지만 레프에게는 그쪽이 한결 익숙하게 느껴졌다.
정원은 아주 고요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부딪히는 소리를 듣다 보면 검은 숲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바깥은 위험하니 집 안에 머무르라고 경고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스틸은 그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듯 싱긋 웃더니 레프를 바라보았다.
“잠깐 둘이서 나갔다 올래요?”
* * *
숲에서 마을까지 향하는 길을 걸으며 아스틸은 오늘 나눈 대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양부모와 이웃 사이였던 그들은 조금 극성스럽기는 해도 아스틸이 핀란드에 머무는 내내 잘 대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둘러대는 과정이 신경쓰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레프는 조나단 콜린즈와의 일을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을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의 술집이었다. 둘은 평일 밤인 탓에 거의 텅 비어 있는 가게의 카운터 구석 자리에 앉아 적당히 음료를 주문했다. 네그로니, 그리고 진 피즈.
나란히 앉아 있자니 익숙한 거리감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가끔씩 이런 식으로 사람이 없는 가게를 찾아 함께 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그런 밤에는 진지한 토론에서 실없는 농담에 이르기까지 온갖 화제가 입에 올랐다. 아주 드물게는 과거의 이야기가 몇 마디 나오기도 했다. 핀란드에서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를 짧게 들은 기억도 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아스틸이 자란 곳에서는 누구도 거리의 부랑아를 제대로 된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스틸이 헨니넨 부부에게 입양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스틸의 동행인이 그를 화재 사고에 휘말려 가족을 잃은 평범한 아이로 위장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동행인이 계획이 성공하리라고 믿었는지는 불분명했다. 혹독한 겨울을 버티는 동안 그는 제대로 된 판단력을 상실하다시피 한 상태였다고 했다.
당시의 아스틸은 필사적으로 제 출신을 숨기려 애썼다. 헨니넨 부부가 어떤 딸을 원하는지 파악한 뒤에는 빠르게 스스로를 그 틀 안에 맞춰 나갔다. 그러면서도 늘 거리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동행인에 대한 원망, 그가 벌인 일의 결과로 혼자 좋은 삶을 얻었다는 죄책감, 그런 것들이 뒤섞인 결과였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저택에서 늘 스스로를 빼앗긴 기분으로 살았다. 어느 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레프가 만나 본 헨니넨 부부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이 알고 사랑하던 모습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 없었어요?”
아스틸의 물음에 레프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꼭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아스틸은 칵테일 잔을 양손으로 감싸듯 잡고 있다가 말없이 미소지으며 레프의 답을 기다렸다. 그가 이미 짐작한 일이라면 말하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조나단 콜린즈라는 사람과 이야기했습니다.”
“역시 그렇게 됐나…. 그 사람의 마음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단 말이죠. 어떻게든 거절한 뒤로는 상당히 어색해졌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제 직업에 대해 알고 있다는…, 아, 그걸 악용할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겁니다. 다만.”
레프는 첫 마디를 듣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좁힌 아스틸을 안심시키듯 손을 내저어 보인 뒤 잠시 말을 멈췄다. 어쩐지 쉽게는 입밖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상대를 소중히 여긴다면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느냐고.”
“아하…. 그런데 왜 그 말에 신경쓰는 표정을 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 그런 표정입니까?”
“약간?”
“못 속이겠군요….”
레프가 조나단의 말을 몇 번 곱씹어 본 것은 사실이었다. 레프는 그 자리에서 아스틸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건 아마 조나단에게 존재하되 자신에게는 없는, 사람을 향한 강렬한 열정과 거기서 비롯되는 절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혁명이나 투쟁은 결코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투쟁함이 옳다고 믿기에 행한다. 그러니 레프 아스트라이아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이건 본질의 영역이며, 아스틸이 한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동질의 이치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위해 온 마음을 바치겠노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는 명분이 적어지는 기분이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이는 마음의 크기가 주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당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가. 그저 옳고자 싸워 쟁취한 가치들이 조금이라도 당신의 삶을 다채롭게 했으면 한다. 당신이 어디에서나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당신을 목적으로 둘 수는 없지만, 당신이 결과 안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이런 마음은… 열렬한 맹세에 비하면 부족한가.
“그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결혼 상대로서가 아니더라도, 저는 함께하기에 안전한 사람이 못 되며… 아스틸 씨에게 드릴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으니까.”
“글쎄, 사람간의 관계가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아스틸 씨의 의지를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납득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대답이네요. 거기까지 했다면 더 신경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데 정확히 무엇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된 레프는 잔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칵테일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아스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전히 이상한 데서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버릇이 있다니까요. 난 내가 선택해서 당신과 함께 있을 뿐이에요. 당신을 좋아하니까.”
“저를 친우로서 가깝게 여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딱히 친우로서, 라고 한정한 적은 없는데.”
“…예?”
레프가 잠깐 말문이 막혀 그의 말을 복기해 보는 사이 아스틸은 잔을 들어 몇 모금을 더 마시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 고백은 청혼하기 전에 하는 거겠죠? 어쩌다 보니 순서가 반대가 되긴 했네요.”
…그러니까 지금 이게 고백이라는 겁니까? 그렇게 되물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 레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목이 탈 때를 위해 준비된 찬물 같은 건 없었고 도수 약 25도의 네그로니가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채로 테이블 위에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겨우 짜낸 대답은 이랬다.
“그 말은 솔직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스틸은 예상하던 답이라는 듯 장난스레 미소짓더니 손끝으로 레프의 잔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음. 이럴 때는 일단 술에 맡기고 그 다음에 변명거리를 찾는 방법이 있긴 한데.”
“진심입니까?”
“설마요. 농담.”
아스틸은 표정을 가다듬고 레프와 시선을 마주쳤다. 한없이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외모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흠이라고 할 수 있을 검은 눈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 사람을 낱낱이 꿰뚫어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스틸 자신조차도 객관적으로 보기 좋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사실 레프는 검은 눈이 가져다 주는 특유의 분위기마저도 아스틸다움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의 시선을 불편하게 여긴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건 당신에게서 뭔가 기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설명하는 쪽에 가까운걸요. 이를테면 나는 당신을 제법 자주 떠올려요. 당신과 함께하지 않는 순간에도.”
정갈하게 적은 편지를 소리내어 읽는 것처럼 반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린 아마 미래를 기약하지는 못하겠죠. 어쩌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더이상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당신의 삶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가요?”
사랑, 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스틸은 한없이 낯설고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 또한 낯설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가 묘사하는 감정들이 더없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한층 또렷한 단어로 풀어 쓴 것처럼. 동시에 그의 질문은 자신이 오늘 품어 온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이런 마음은 부족한가, 내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은,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을 우선하겠다는 말을 건네지 못한다는 이유로 밀려나야 하는가. 아스틸의 질문은 수사적이었고 그는 아마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도 스스로의 자격을 따지지 말아요.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가끔 보면 당신은 정말 독심술을 할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짧게 소리내어 웃은 아스틸이 잔을 들어올렸다. 레프는 잔을 마주치며 주홍색 액체가 조명 아래에서 흔들리는 것을 응시했다.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지만 마음속에는 기묘하게도 위화감 대신 안정감이 자리잡았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의무, 충족시켜야 할 기대는 없다. 반드시 건네야 하는 말도 없다.
이건 지금까지 나눠 온 수많은 술잔 중 하나에 불과하며 지금껏 보내 온 수많은 밤과 다를 바 없는 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중요성이 덜해지지는 않는 밤이다. 명명하지 않아 생기는 공백은 때로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 무명의 관계가 이름 있는 관계보다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잔에 반사된 빛이 아스틸의 눈가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레프는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예식은 전통에 따라 교회 안에서 진행되었다.
아스틸은 얼굴을 가리는 흰 베일을 쓴 채로 양아버지와 함께 카펫 위를 걸었다. 자수와 레이스가 어우러진 순백의 드레스는 과하게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느낌이라 교회의 엄숙한 분위기와 퍽 잘 어우러졌다. 레프는 검은 정장과 넥타이 차림을 한 채로 자리에 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장갑을 즐겨 착용하는 그였지만 오늘만은 맨손이었다.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서 신부를 인도받아 베일을 걷어내는 것이 식의 시작이었다. 사락거리는 얇은 천이 손에 감겨오는 것을 느끼며 베일을 넘기자 아스틸은 천천히 시선을 올려 레프를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는 평소보다 한층 섬세하게 정돈된 채였고 한쪽으로 내린 머리칼이 왼쪽 눈을 가리듯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백색에 가까운 반대쪽 눈동자의 투명함이 도드라졌다. 뺨에는 생기를 더하기 위해서인지 연한 홍조가 얹혀 있었다. 아스틸 자신보다는 주변인들의 취향이 반영된 모습이리라. 레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몇 초 뒤 손을 뻗어 아스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그러고 나니 완벽한 신부의 분위기는 옅어졌지만, 아스틸은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미소짓고 레프의 손바닥 위로 제 손끝을 올려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아스틸을 에스코트하는 느낌은 생소했다. 지금껏 많은 풍경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지만 이렇듯 형식에 맞춰 걸음을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교회의 대리석 바닥에 가죽 구두의 굽이 닿는 소리와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주례를 맡은 목사와 단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여러 갈래로 산란한 빛이 발 아래로 쏟아졌다.
신랑과 신부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서로를 위해 영원토록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까?
목사의 경건한 목소리는 마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처럼 교회 안을 채웠다. 맹세에 응답하고 나자 반지를 교환할 시간이었다. 레프는 부드러운 곡선이 아로새겨진 금색 반지를 아스틸의 약지에 끼웠다. 같은 방식으로 아스틸이 제 손에 끼워 준 반지를 보고 있자니 무척 낯설게 느껴졌지만 감상을 정리하는 것보다 빠르게 성혼선언문의 낭독이 이어졌다.
…이로써 결혼이 성립되었고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 * *
식을 마친 이후에는 하객들이 모두 참석하는 피로연이 저녁까지 진행되었다. 그동안 만났던 이웃들은 물론 레프와 아스틸의 사정을 전해 들은 몇 안 되는 공통의 지인들도 와 준 자리였다. 레프는 조나단 콜린즈도 와 있는지 확인하려 둘러보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음식과 디저트, 노래, 춤, 끝없이 이어지는 음악.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헨니넨 부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지팡이를 짚은 헨니넨 부인은 몇 번이나 레프와 아스틸의 손을 힘주어 잡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남편 또한 인자한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결혼의 형태가 실상 충족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조금의 죄책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 그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아스틸은 잘 살아갈 사람이었다. 아스틸은 타인이 바라는 행복에 안주하기보다는 불확실한 세상 속으로 몇 번이고 뛰어들 사람임을 그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피로연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신랑과 신부가 먼저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헨니넨 부부나 다른 사람들은 레프와 아스틸이 짧게 눈을 붙인 뒤 아침 일찍 밀월을 위해 출발하는 줄로만 알 것이다. 실제로는 중간 지점—헬싱키의 공항에서 각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날 예정이었다. 레프가 일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보낼 수 있는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헨니넨 부부는 아스틸에게 긴 작별인사를 건넨 후 오늘 밤은 신혼부부에게 양보하겠다며 저택을 비워주었다.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저택을 바깥에서 바라보자 비로소 긴 여정이 마무리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드디어 끝났네요. 고생했어요.”
그렇게 말한 아스틸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정원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직 드레스와 베일을 벗지 않아 달빛이 흰 옷자락을 물들이는 것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교회의 샹들리에 아래나 왁자한 피로연의 한가운데보다도 이곳이 그와 어울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밤하늘 아래, 붙잡는 사람이 없어 언제든 숲으로 향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 레프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을 따라가 곁에 섰다.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지나간 기분이긴 합니다.”
“동시에 굉장히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둘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보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비로소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일전에 조나단 콜린즈 씨와 이야기했을 때 아스틸 씨가 거절한 이유를 들었습니다만.”
“아아.”
거기까지만 듣고도 아스틸은 질문의 요지를 이해한 표정이었다. 베일 끝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돌린 아스틸은 간단하게 인정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당신 이야기였죠. 핑계기도 했고, 진담이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사실 굳이 당신에게 이런 일을 부탁한 건, 당신을 좋아해서도 있지만.”
잠시 별을 헤아리듯 하늘을 향했던 아스틸의 시선이 한 번 더 돌아와 레프를 향했다.
“내가 평생 밤하늘만 올려다보며 살아온 사람이듯, 당신도 하늘 위의 이상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이라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길 수 없는 천성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잖아요.”
아스틸은 나지막하게 말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정원의 풀들이 흔들리고 은은한 꽃향기가 바람에 섞이고, 저택은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스틸은 평소 독립적일지언정 외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때 그가 억지로 속해 있던 장소를 배경으로 두니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고독하게 보였다.
“그래서 당신이 아니면 안 됐어요.”
레프는 잠시 말을 고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아스틸 씨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수락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당신이라도 좋다는 말과 이런 당신이기에 좋다는 말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실상 전혀 다른 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의 당신이 눈앞에 있고, 그런 당신의 본질을 각별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인 것이다. 레프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아스틸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방금 그 말은 제법 신혼부부다웠던 것 같은데.”
“실제로 식을 올리고 돌아온 건 맞으니까.”
“좀더 결혼한 사이에 할 법한 일도 해볼까요?”
“…잠깐, 뭘…”
한 걸음, 간격을 좁히며 다가온 아스틸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무게를 싣는 바람에 레프는 순간 휘청일 뻔하다 중심을 잡았다. 앞을 바라보자 아스틸의 눈은 지금껏 봐 온 그 어느 순간보다 가까이 있었다. 이내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기 직전, 아스틸은 몸을 떼고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진짜로 했다간 혼날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한순간 몸이 굳었던 탓에 뒤늦게 한숨을 내쉰 레프는 아직 제 어깨 위에서 떠나지 않은 아스틸의 손을 잡아 내리며 겨우 한 마디를 했다.
“…혼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
“…….”
“조만간 다시 시도해 봐야겠는데요.”
“놀리려는 의도인 것 압니다….”
아스틸은 악동 같은 웃음을 지었지만 도무지 밉게는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라 레프도 결국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둘은 잠시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숲 너머,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지금쯤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핀란드에서의 마지막 밤이 끝나 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막 해가 뜰 무렵 도착한 헬싱키의 반타 공항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붐비는 편이었다. 아스틸과 레프의 출국 시간에는 몇 시간 정도의 차이가 있어 아스틸이 비행기 시간이 빠른 레프를 배웅하는 형태가 되었다. 아스틸은 익숙한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다. 레프가 아는 대로라면 아마 간소한 옷 몇 벌과 생활에 필수적인 물건들이 전부일 것이다. 떠날 시각이 되어 비로소 서로가 가장 잘 아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둘은 게이트 앞에 섰다.
“고마웠어요,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아스틸이 내민 손을 잡자 문득 어제 교환했던 반지가 떠올랐다. 지금은 장갑에 가려져 있었지만 아직 빼지 않은 채다. 그저 식을 올리는 것까지 함께했을 뿐, 정말 결혼한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쌓아 온 관계가 변화한 것 또한 아니었으니 더 지니고 있을 필요는 아마 없겠지만…. 레프는 얽힌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 작은 물건이 영원을, 헌신을, 미래를 상징할 수 없더라도 무언가의 지표가 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공유, 관계의 공유. 동행이란 손 안에 쥔 당신과의 지금을 이따금씩 꺼내 보는 일이므로.
그대로 캐리어의 손잡이를 쥔 채 걸음을 내딛는다.
공항의 소음과 밀려드는 인파에 휩쓸려 본래 있었던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아스틸의 손에서 금색으로 반짝인 빛이 잔상처럼 오래, 시야 한켠에 남아 있었다.
위장결혼 레프릭~~~ 늘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저째…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결혼이란 걸 하자. 결혼시키자. 하면서 시작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의도했던 건 결혼(이라는 사회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끼리의 이해~ 유대감~ 동질감~ 같은 걸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쓰다 보니 열렬하지 않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 가끔씩 서로 떠올려보는 관계는 평생 함께하자는 맹세를 하는 관계보다 덜 소중한 걸까? << 라는 질문에 (아니야!! 라는)답을 찾아가는 걸 넣고 싶어서 거의 처음부터 다시 쓰다시피 했던 듯.
저는 텔 > 레프를 완전히 로맨스 캐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게 사회가 규정하는 “사랑” 과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본인은 너무 당연하게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음 ~~ < 이 부분을 언젠가 다뤄보고 싶었어요. 왓 이즈 러브… 딱히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고백이라거나~ 사랑을 수면 위로 끌고 와서 논해도 굳이 달라지지 않을 관계성이라거나~ 이런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뻘하지만 챗지피티에게 이 글을 읽게 만들고 가상의 팬 토론회 게시판을 만들었는데 웃기더라고요… 레프는 과하게 신중해서 씨피적 발전을 하려면 텔이 힘내야 함"<< 이런 캐해라거나 “연애감정을 속박으로 여겨서 로맨틱한 성사는 불가능할 듯” < 이런 캐해도 있어서 재밌었네요… 저는 그들을 정말 꽤 많이 좋아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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