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reversibility
LEVLIC HALLOWEEN 2024
“아스틸 씨?”
세 번, 가볍게 두드린 문이 잠시의 정적 후 열렸다. 문 뒤에 선 아스틸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찾아가겠다는 연락을 할 시간이 없어 다소 갑작스럽게 방문한 것이었으니 뜻밖일 만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놀란 얼굴과 마주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레프는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목 뒤를 쓸어내렸다.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스틸은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돌아왔다.
“…아니에요.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나답지 않게 놀란 걸 보면 당신이 보고 싶긴 했나 보죠, 그렇게 농조로 덧붙이는 목소리는 제법 평소다웠다.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잠깐 지내다 갈 여행자의 방이었다. 배치된 것들은 딱 생활에 필요한 가구뿐이었고 꾸민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아스틸의 방이지만 여기 그가 소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전부터 그런 점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람처럼 산뜻한 동시에, 세상과 직접 닿기보다는 스쳐지나가는 편을 택할 것 같은 일종의 서늘함을 지닌 사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함께 안으로 들어가며 무난한 투로 건넨 말에 문을 닫으려던 아스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나야 늘 잘 지내고 있죠.”
어쩐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기색이었다. 또는 입안에 떠도는 말을 겨우 삼킨 것 같기도 했다. 그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레프는 아스틸이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 감정을 감지하는 것에 탁월해졌다. 서로를 대하는 것이 익숙해진 결과이기도 했고, 상대가 보여주는 감정의 폭이 늘어난 영향이기도 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확인하려 건넨 말은 아스틸이 내민 손에 가로막혔다. 레프는 저도 모르게 검은 장갑을 낀 한쪽 손을 겹치듯 그 위로 올려놓았다. 지금 쓰고 있는 장갑은 언젠가 아스틸이 생일을 기념한다며 선물해 준 물건이다.
“잘 가지고 있네요.“
아스틸은 레프의 손끝을 쥐어 한 번 쓰다듬고 놓아주면서 웃었다. 그건 자주 짓곤 하는 평이한 미소와는 다른, 어딘가 긴장이 풀린 듯한 솔직한 웃음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라는 말과 함께 장갑이 든 상자를 건넬 때에도 꼭 이런 표정이었기에, 이 사람은 진심으로 기쁠 때는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하고 어렴풋이 깨달았었다.
삶은 비가역적이다. 이를테면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 타인과 함께할 때의 안온함과 꾸밈없는 미소와 순수한 호의 같은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원한 적 없었는데도 자연스레 존재했다가 필요를 따지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것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가끔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더라도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이런 미소에 담긴 것도 그중 하나일 터였다. 그래서 과거를 쫓지는 않지만 과거에 놓고 온 것을 돌아볼 수 있고, 그리워하던 시절의 자신을 언뜻 비춰 볼 수 있는 동행이, 아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영웅이라고 불린다.
“아시겠지만 그분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세요. 그래서 놓치는 것 없이 기록하고 싶거든요.”
아스틸은 진지하게 설득을 이어가는 젊은 작가를 보며 어떤 태도를 보는 것이 최선일지를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 불편한 자리였다. 상대가 약간 과할 정도로 열정적이었기에 특히나.
“그분이 이끄셨던 혁명이 몇 명의 삶을 개선했을지에 대한 추산은 전문가별로 다르지만 몇천 이하로 잡는 사람은 없어요. 물론 사상 면에서도 전세계적인 영향을 끼치셨죠. 앞으로 역사를 돌아볼 때 그분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어마어마할 거예요. 저는 이 흐름 속에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은 거고요.”
그런 식의 설명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실 그가 언급하는 레프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은 이미 접한 것들이었다. 그는 영웅이고, 전략가인 동시에 행동가이며,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꿔 역사에 남을 위인이라고.
하지만,
아스틸은 레프의 전기를 쓰고자 한다는 눈앞의 작가를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 이전에 사람—당신과도 나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한 명의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록하는 이의 입장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자잘한 일화 하나하나조차도 빠짐없이 엮어서 될 수 있는 한 선명한 초상을 그리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는 것도 안다. 내가 인간으로서의 레프 아스트라이아를 아끼듯 당신은 혁명가로서의 레프 아스트라이아를 아끼고 있을 테고 그건 저울에 올려놓아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까지도. 그렇지만 자신이 아는, 레프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기가 어려워서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여태껏 타인의 감정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마음에 자신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는데.
아스틸은 왼쪽 손목에 찬 은색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레프에게 상담했다면 무슨 답이 돌아왔을지를 상상했다. 레프는 아스틸 씨가 편한 대로 해도 괜찮다고 했을 테고, 자신은 이건 당신의 일이기도 하니 조금 더 신경쓰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을 테고, 그럼 뭐든 아스틸 씨가 사실이 아닌 나쁜 말을 하진 않을 테니 괜찮다는 답이 돌아온 뒤에 약간 자신 없는 표정으로 혹시 나쁘게 생각한 면이 있다면 가감없이 말해도 괜찮다는 말이나……
“그냥 확 험담이나 해 버릴까 보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뇨, 아뇨. 혼잣말이었어요.”
정말 없는 험담이라도 쏟아내면 포기하려나, 하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정도로 양심이 없는 인간은 되지 못했다. 결국 아스틸은 애매한 회피조로 답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도 있을 텐데요. 함께 일했던 동지들 쪽이 좀더 적임자 아닌가.”
“하지만 그분이 생전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방문을 하셨던 곳이 아텔릭 씨가 머무르시던 장소라고 들어서요.”
당신의 죽음은 역사에 기록된다.
그의 죽음은 국경을 넘기 전 잠시 시간을 내 찾아온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눈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들은 소식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어서, 그 자리에 못박힌 채로 오랫동안 부고를 알리는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레프의 삶을 추적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스틸의 존재를 발견했다. 전과 다름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었던 아스틸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개인적인 방문이라는 말은 꽤 오해를 살 것 같은 표현이네요.”
“그럼 어떻게 표현하면 될지?“
“굳이 표현하려고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스틸은 긴 한숨 끝에 말을 이었다.
“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의 신념에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도 아니고. 보다시피 그냥 여행하는 사람이니까. 그를 묘사할 때 내 증언이나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성을 갖진…“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라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입안이 쓴 것도 같았다. 그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서로가 중요하지 않았다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들이 많다.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도 괜찮으니 당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도, 그럼에도 때때로 곁에 있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 그날,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이 기뻤던 것도.
그저 이 모든 기억을 타인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스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입을 열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어쨌든, 역시 나는 큰 도움은 못 될 것 같거든요. 다른 사람을 찾아봐요.“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삶은 비가역적이다. 이를테면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가끔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더라도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헛것을 볼 정도로 이 사람을 좋아했던가, 아니면 오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온 탓에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스틸은 멍해진 머리로 잠시 생각하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날 같은 미신은 원래도 믿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납득이 갈 것 같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나야 늘 잘 지내고 있죠.”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여전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요.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냐면……. 입속에서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다가 꾹 삼킨다. 대신 손을 내밀어 잡히는 감촉을 확인했다. 자신이 선물했던 장갑이었다.
“잘 가지고 있네요.“
“오늘은 답례품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생일 선물? 아직 한 달쯤 남았는데요.“
“…당일에 전달하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레프가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은색 장식이 달린 단순한 모양의 팔찌였다. 이미 익숙한 물건임에도 아스틸은 아무 말 없이 왼손을 내밀었다. 팔찌를 끼우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리는 것을 바라보면 어쩌면 자신도 가끔 저런 식으로 웃는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든다.
“고마워요. …곧 가야 하죠?“
“예. 오래 걸릴 겁니다.“
미리 연락하지도 못할 만큼 빠듯한 시간을 짜내어 찾아왔음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자신도 그렇지만 그는 늘 떠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 운명의 소유자니까.
아스틸은 닫았던 문을 다시 열어주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래서, 그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더라. 이게 꿈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을 텐데도 여전히, 가로막으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은 가질 수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분명 자신의 공간이지만 자신이 소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 있어주면 안 되나요,
라는 말도 결국 건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대신 한 발짝 거리를 좁혀 상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조금의 위안을 느끼는 것도 잠깐… 아주 잠깐. 소유할 수 없을 사람과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주는 것에 납득한다.
당신은 —사랑한다. 그 운명을 지울 수 없다.
아스틸은 레프의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들고 최선을 다해 웃어 보였다. 노을에서 밤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하늘을 닮은 눈을 마주본다. 눈을 감았다 뜨면 새벽에 녹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이다.
“가끔은 돌아와요.“
그러겠습니다, 라는 대답이 실제로 들렸던가 아니면 기억 속이었던가.
어느 쪽이라도 괜찮았다. 당신의 대답을 바라는 마음만은, 비가역적으로 소유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으므로.
레프청년… 단명할 상이어서 한 번 죽여봤습니다 쏘리. 선물 교환하는 레프릭 보고 싶어~라고 생각하다가 레프에게 악세류 받은 게 있다면 왼팔에 착용할 것 같음 < 다소 어이없지만 이 생각이 계기가 돼서 썼습니다. TMI지만 텔은 왼손잡이라서 자주 쓰는 손에는 팔찌 안 한다는 설정이 있거든요… 악세사리를 사거나 받는 건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아끼는 건 아니라서 쉽게 줘버리거나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레프에게 선물받으면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따로 왼손에 빼둘 듯… 소중히 하겠음!! 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언제 만나든 늘 지니고 있긴 할 것 같다는 점이 레프←릭의 압축판 같다고 생각하다가,,, 음? 할로윈인데 가보자고?? 하고 구상했더니 전혀 다른 게 됐네요 심지어 할로윈에 맞추지도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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