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폐혜리] 말할 수 없는 비밀
자캐 커뮤니티 고백로그 / 2012. 02. 18
제목은 동명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에서 유래했습니다.
노을이 가라앉는 저녁녘엔 배가 고프기 마련이었다. 조금쯤 참아보려고 했지만, 인간의 3대 욕구는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런 이름을 붙이겠는가. 결국, 나는 식욕을 참지 못하고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 안은 저녁임에도 벌써 차가운 밤 공기가 내려앉은 바깥과 다르게 따뜻하고 나른했는데, 그래서인지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안의 분위기에 잔뜩 취해버린 나는 굳이 하나만 사도 되는 따뜻한 캔커피를 지갑을 탈탈 털어서 두 개나 사버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뭐 어떠랴. 지나가다가 먹고 싶어 하는 사람 보이면 착한 일 한 번 했다 치고 줘 버리면 되지. 머릿속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 간 것 같지만, 굳이 더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거기에 대한 이유조차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매점을 나와 교실로 걸어가던 도중, 갑작스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라고 해봤자 펑펑 내려온 세상을 덮어 버릴 수 있는 많은 양도 아니었다. 가볍게 세상에 내려앉다가 녹아서 사라져 버릴 그런 눈이었다.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보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첫눈도 아닌데 눈에 의미를 담을 필요가 과연 있을까. 평생 하지 않을 것만 같던 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웃겼지만 웃을 순 없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모두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애당초 눈 내리는 가운데 멍하니 서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희극의 한 토막 같았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 같아 가볍게 스트레칭 할 겸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조금 전에 산 캔 커피 두 개.
'줘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들었는지 나 스스로 따지는 것처럼 물어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가 필요해, 그냥 좋아하면 되는 거지. 만약 거절당해도 괜찮아. 그동안 사람들에게 내가 말해 둔 게 있어서 쪽팔려서라도 얼굴은 당당히 못 들고 다닐 게 분명하지만!
일단 줘야겠다고 생각하자 몸은 마치 잘 짜인 연극에 등장하는 한 인물처럼 척척 굴러갔다. 아마 교실에 있을 것이라고 확실에 가까운 예상을 하곤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삐걱대는 소리 하나 없는 계단을 하나 둘 오르고 잘 닦인 복도의 끝에는 누군가 살짝 열어둔 창문 틈새로 쏟아지는 노을빛을 그대로 받아 불그스름한 기운이 도는 2학년 2반 교실 문이 보였다. 과연 지금 교실에 있을까. 차갑기 그지없는 철제문 손잡이를 잡는 것은 수월했다. 문을 여는 것도 수월했다. 손안에서 땀방울이 여물었다. 아무런 소리없이 열리는 문 덕분에 예상했던 대로 교실 안에 있던 그 아이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오르는 긴장감 때문에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잘해야 돼. 최대한…… 머릿속이 팽팽 돌고 머리가 아파져 오고 토할 것 같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 걸음이 10km를 거뜬히 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 아이의 곁에 다가섰다.
"야."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붙였다. 아이는 굳이 대답하지 않으려는 듯, 표정으로 대신 답했다. 키 차이가 나서 나는 그를 올려다봐야 했는데, 올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목 주변이 뻐근해짐과 동시에 거북함이 더 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지만, 그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는데, 그 건 오히려 지금의 나에겐 매우 좋은 일이었다. 만약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머리가 핑핑 돌아서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나는 침을 삼키고 정적을 끊었다.
"……야, 황 민폐."
……정적, 또 정적.
"……나 있잖아, 네가 좋아."
그 후 정적. 이번 정적은 누가 끊을지, 나도 모른다.
/ 자올고등학교 양혜리→황민폐 고백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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