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일기

상뱅쫑 폴리아모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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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종수야. 너 또 나 엿먹어보라고 작정했지?"

"뭐래. 잘도 하면서."

공중에 떠있던 종수라고 불린 남성이, 그 옆의 밝은 색의 옷을 입은 남성의 옆으로 내려선다. 그들 앞에는 잔해만 남은 괴물의 찌꺼기들이 널려져있었다. 그 둘은 익숙한 듯 그것들에게서 눈을 억지로 피하는 낌새 없이 서로에게 눈길을 주었다. 둘 다 안색이 창백했고,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몸은 멀쩡하건만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인 탓이다. 밝은 옷의 남성이 품에서 약통을 꺼낸다. 잔뜩 꺼낸 것 중 몇 알은 종수에게, 몇 알은 제 입에 넣은 뒤 무심히 씹어넘긴다. 아그작아그작, 그런 소리를 내며 둘은 서로에게 기대어 주저앉는다.

[센티넬 박병찬, 센티넬 최종수. 보고 바랍니다.]

"생체반응 없을거면서 뭘 물어? 죽기 전에 들고 가요~"

[추가 보고 사항이 있습니까?]

"없어요~"

깔끔한 음성이 나오던 무전기마저 침묵하면 남은 것은 둘의 느린 숨소리만 남는다. 몸값 비싸고 말은 험해도 하라는 건 하는 고등급 센티넬을 잃고 싶진 않을테니 아마 곧 있으면 헬기 소리가 들릴 것이다. 박병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종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 작게 내뱉는 감탄사에 최종수의 고개가 살짝 들린다.

"오늘도 못 죽었네."

"...그러게."


센티넬과 가이드는 인권이 있는 인간이다. 게다가 전세계의 반을 차지할만큼 수가 많으니 각 나라의 수뇌부들은 그 모든 새로운 종족들을 새롭게 관리할 방법을 정해야했다. 그 중 대한민국은 조건을 정한다. 정립된 센티넬 등급 중 A급 이상은 특수군에 복무, B급은 예비군으로서, C급 이하는 평범한 일반인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센티넬의 등급은 폭주 위험도, 능력의 세기, 능력의 활용도를 모두 종합하여 내리는 것으로 C급 이하의 센티넬들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칠만큼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다만 가이드들은 조금 특별한 위치였는데, 센티넬은 경우에 따라 위험한 흉기를 든 인간과 같은 취급이라 국가가 나서 제제하는 것에 대해 여론이 나쁘지 않았으나 가이드들은 그런 위험성이 전혀 없었다. 국가가 무언가를 강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가이드들에게 강제할 수 없으니 국가는 아주 높은 연봉과 좋은 혜택으로 가이드들을 꼬셨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이드라는 것은, 편히 살아갈 수 있는 보증 수표와 같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철밥통?

센티넬은 능력 개화를 해야 발현 여부를 알 수 있었고 가이드는 센티넬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발현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국가에서 열심히 검사하GO! 혜택받GO! 따위의 슬로건을 내걸어도 다른 누군가와 계속 접촉해야한다는 사실을 반길 사람은 많지 않다. 능력이 개화된 센티넬이야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들어가겠지만 가이드들은? 기회가 된다면 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것도 가능했다. 대부분은 자신도 뭔가 특별한 무엇이 되고 싶어 검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아예 검사를 받지 않는 사람도 널렸다는 뜻이다. 그리 쉽게 마음을 정한 사람들도 제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하는 괴물들과 무참히 죽어나가거나 죽지 못해 제게 살려달라 말하는 센티넬들을 마주하면 도망을 갔다. 당연한 일이다.

기상호는 가이드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다른 누군가와의 접촉은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집은 적당히 사는 탓에 그 대단하다는 월급이나 혜택에도 관심이 없었다. 기상호는 공부를 잘 했기에 평범히 살아가도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가이드는 했다가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두는 사람이 속출하는 직업이었으니 노동강도가 짐작이 갔다. 기상호는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인생의 사건이라는 것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편이다. 괴물이라는 것들은 예고없이 나타난다. 이 세계에서 도시라는 것은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 안전구역이 아니다. 센티넬들이 항상 상주하는 건물이 있어 운이 좋으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구역이지. 기상호는 평소와 같이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10분 만에 저 멀리서 맹렬히 뛰어오는 괴물을 보고 바로 반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없다. 괴물의 대처법은 간단했다. 보이면, 최대한 조용히 반대로 뛰어라.

다행인 점은 기상호가 그 괴물보다 느리지 않았다는 점이고 불행인 점은 기상호가 그 괴물보다 빠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상호는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괴물이라는 것들이 왜 괴물인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무언가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기상호는 점차 지쳐갔고 괴물은 지치지 않았다. 와, 기껏 그 비싼 등록금을 냈는데 얼마 다니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기상호는 숨이 차 흐린 눈으로 저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두 남자들에게 소리쳤다.

"저, 헉, 도망... 가세요!!!"

와중에 사람을 걱정하여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더니 안간힘을 쓰고 있던 기상호의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난 뒤졌다... 괴물이 나를 처먹는 동안 저 사람들이라도 도망가야할텐데... 기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곧 덮칠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고통은 오지 않았고, 바람이 살랑 부나 싶은 감각이 느껴진 뒤 부드러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예~ 오늘도 적중!"

"그거 적중 못하면 등급 떨어져."

"그럼 덜 나갈테니까 좋네."

기상호는 눈치챈다. 아, 센티넬이구나. 다행이다... 숨을 몰아쉬던 기상호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가까이온 남자들이 보인다. 둘 다 편한 일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가슴에 센티넬들이 하고 다닌다는 뱃지가 보였다. 잘 웃는, 밝은 옷 색의 남자가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고생했어요~ 아직 근처에 괴물이 있으니까 안전한 곳까지 같이 있을까요?"

"네... 흡, 켈록... 네..."

기상호는 그 손을 맞잡았다. 그대로 센티넬이 끌어올리자 저항없이 끌려올라간다. 와, 센티넬들은 그냥도 힘이 쎄다더니 날 끌어올리네. 그대로 끌어올려진 기상호는 그대로 저를 꾹 안아오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에? 어?

"ㅈ, 저 다리 멀쩡한데..."

그리 말해도 그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옆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차림의 가라앉은 남자는 그를 살펴보다가 저를 바라보았다. 그는 딱히 말릴 의사가 없는 듯 했다. 기상호는 어정쩡한 자세로 계속 안겨있다가 그 남자에게 뭐 좀 해보라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검은 남자의 어깨를 툭 건들였다.

그러자 검은 남자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제는 가까이 다가와 앞 뒤로 저를 꾹 껴안는 게 아닌가. 안아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기상호는 저기요, 이봐요. 뭐하시는 거예요... 같은 말을 내뱉으며 조금 버둥거려 봤으나 그 둘은 미동이 없어 결국 넋을 놓은 채 한참을 붙잡혀 있었다.


한참을 껴안고 있던 남자들은 어쩐지 개운한 기색이었고, 기상호에게 서로의 이름을 얘기해주었다. 밝은 옷을 입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는 박병찬, 새까만 옷에 가라앉은 얼굴을 한 남자는 최종수. 그리 붙어있던 둘은 저에게 가이드냐고 물었고, 기상호는 모른다고 답했다. 이런 문답을 주고 받으면 알게 된다. 나 가이드구나... 하지만 그 사실은 기상호에게 커다란 변화를 주기엔 모자르다. 기상호는 제 앞에 가만히 있는 멀대같은 이들을 보며 제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저가 바빠서 가봐도 될까요."

"잠깐 센터에만 들러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 정식 검사도 아니고, 전 가이드는 관심 없어가."

거절하면 잡을 방도가 없다. 센티넬은 의무이지만 가이드는 의무가 아니니까. 두 센티넬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 같더니 박병찬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내민다. 뭐지?

"그럼 번호만 주고 받을 수 있을까요? 센터에 와달라는 귀찮은 연락 안 할게요."

기상호는 매우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그냥 상냥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흠. 수작임을 알지만 기상호가 그것에 순순히 넘어가준 것은, 일단 그들에겐 강제성이 없다는 점. 그런 귀찮은 연락을 하면 차단을 박으면 된다는 점. 또한... 제 앞의 사람들이 어쨌든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점이었다. 기상호는 은혜를 안다. 센티넬들이 그런 일을 하는 직종이라고 당연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센티넬들은 이미지 관리를 잘 하는 편이라 기상호같은 보통의 인간들에겐 소방관, 군인, 경찰 같은 직종의 위치였다.

기상호는 순순히 제 번호를 찍어주었고, 박병찬은 고맙다며 눈웃음을 보였다. 최종수라는 사람도 고개를 한 번 까닥여보인 뒤 둘은 정말 깔끔하게 떠났다. 그러고보니 안전한 데에 데려다준다고 하지 않았나...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다 영 조용한 주변에 그냥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둘이 깔끔히 떠났다고 그게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병찬에겐 연락이 자주 왔다. 주로 강의 사이에 빈 시간이 남았을 때나 공강일 때. 밥을 사주겠다는 말에 용돈이 매우 쪼들리지는 않아도 아껴서 나쁠 거 없는 상호는 순순히 나갔고 그러면 그 잘생긴 남자들이 저를 마중나와있는데... 상호는 어쩐지 그게 나쁘지 않았다. 병찬은 대놓고 호의가 가득한 얼굴이었고 종수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제가 실없이 건네는 말을 하나하나 답해줬다.

친절한 사람에게 쉬운 상호는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쉽게 응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제 양 옆에 선 남자들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병찬의 얼굴에 서린 예민함이 점차 가라앉았고, 종수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조금 걷혔다. 다 큰 남정네들 셋이서 기차놀이를 하는 것마냥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는 꼴은 좀 웃겼지만... 가이드라는 건 이런 존재구나. 마음이 바뀌진 않았지만 자기한테 친절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감각은 괜찮아서, 상호는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 근래에 이들과 노는 것을 좀 더 기대하게 된 탓이다.

처음은 1주일에 한 번, 이제는 거진 매일 연락이 오는 탓에 상호는 종수의 번호까지 받아 셋만 있는 단톡방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었고 상호는 간단한 것들을 물었다. 적당히 뭘 하는지, 좋아하는 게 있는지. 그러다가 자신의 일상을 말해주기도 하고 병찬과 종수의 일상을 묻기도 했다. 병찬은 답장이 빨랐고 종수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종종 튀어나와 대화를 적었다. 오, 이거 좀 친구 같아.

[햄들은 맨날 오는데 안 혼나요?]

[할 일 다 하고 나가는 거라 괜찮아~]

[바쁜 거 아닌가 몰라]

[바쁘지만 상호 보러 갈 시간은 있지.]

[곧 임무 끝나는데 시간 돼?]

[음... 마침 다음 강의가 휴강이긴 한데.]

[오예~]

[먹고싶은거생각해놔]

밥 잘 사주고, 이야기 잘 들어주고, 반응도 잘해주면서 저가 좋아서 껴안거나 치대면 더 좋아해주는 잘생긴 형들. 솔직히 상호가 아니라 누구에게 그 둘을 붙여놔도 홀랑 넘어갈건데 상호는 그 중에서도 아주 쉽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둘이 슬쩍 센터 얘기를 꺼내면 대놓고 못 들은 척을 했지만 이 형들이라면 뭐, 찾아올 때 잠깐 손을 잡아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상호가 종강을 맞이하고 새로 개강을 할 때도 셋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상호는 둘에 대해 점점 알아갔다. 일단 둘은 희귀하다는 S급 센티넬이었으며 짝을 이루어 다닌다는 것. 종수의 능력은 강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병찬만이 그 거대한 흐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 어떠한 가이드랑도 매칭률이 20%를 넘지 않아 효율이 떨어지는 탓에 보조적으로 도움주는 약품을 먹었다는 것. 그 탓에 병찬은 종종 제 예민함을 숨기지 못했고 종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문제가 상호를 만난 뒤 해결되었다는 것도.

병찬은 순순히 자신들이 가졌던 목적도 말해주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꼬셔서 가이드를 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만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네가 어쩐지 부러웠다고. 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각성하여 일반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는데, 일반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네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워졌다고. 이젠 가이딩보다는 너랑 만나는 게 재밌을 뿐이라고. 병찬은 그런 이야기를 해주며 웃는 얼굴로 잡고 있는 상호의 손을 꾹 잡아주었고 종수는 얌전히 그 말들을 듣다가 끝에서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동의했다.

글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상호는 뭘 생각했더라. 제가 가이드인 걸 알고 나서 찾아봤던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센티넬들은 능력을 쓸수록 정신적으로 고통받는다. 그것을 가이딩으로 해소하며 매우 큰 안정감과 해방감을 느끼는데 그 탓에 센티넬들이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흠. 자세히는 몰라도 그 능력 덕에 친구가 생겼으니 나쁘지 않지. 상호는 그냥 웃었다.


병찬과 종수는 점점 바빠졌다. 센터에서는 상호의 존재를 몰랐으나 어쨌든 둘은 상호 덕에 매우 큰 효율로 가이딩 수치를 높일 수 있었고 둘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안정된 것을 확인한 센터는 좀 더 위험하고 많은 임무를 맡기기 시작했다. 센티넬은 거부권이 없다. 거부감은 있을지라도 거부는 못한다. 둘은 아주 어릴적부터 그렇게 배웠으니까.

"아, 상호 보러가고 싶은데."

"...나도."

"이번 달에 애가 좋아하는 영화 개봉한다고 안 했나? 이벤트로 나오는 특전들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4월 12일부터 한 달간."

"다행이네. 한 달이면 한 번은 가겠다."

둘은 어느순간부터 둘만 있을 때 상호의 이야기를 많이했다. 걔는 뭘 좋아하더라, 뭘 좋아하던데, 뭐 하고 싶어하던데. 이미 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그런 이야기라도 곱씹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은 무너지는 정신을 억지로 기워내며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있음을 한탄하는 것 뿐이라, 괜히 상호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일주일 뒤에 시간 비워볼까? 어. 그런 단촐한 대화 후 둘은 헬기에서 같이 떨어졌다. 둘의 발 밑에 종수의 거대한 흐름이 생기고 병찬이 그것을 이용해 공중에 둘의 몸을 띄웠다. 언제나처럼 일을 해야하는 시간이었다.

둘은 거진 5년 넘게 함께 해온 베테랑이었고, 상호가 높여준 가이딩 수치 덕에 예전보다 더한 위력으로 깔끔히 쓸어버렸음에도 둘은 꽤나 멀쩡하게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당장 상호를 보러 갈 수 없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싶어 언제나처럼 서로 가이딩 약을 나눠먹었다. 근래에 덜 먹어서 그런건지, 상호랑 놀러다니면서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을 먹어서 그런건지 약이 참 썼다. 병찬은 상호가 먹어보겠냐며 들이밀어 얼떨결에 한 입 마셨던 딸기 스무디의 맛을 기억했고 종수는 상호가 이것도 안 먹어봤냐며 입에 들이미는 통에 받아먹었던 크림 파스타의 맛을 기억했다. 배고프네. 어. 둘은 다시 상호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주고 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둘을 보고 상호는 조금, 아니 많이 경악했다. 둘 다 당장 입원실에 누워있어도 모자르지 않을 꼴이었기에. 박병찬은 오른쪽 무릎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최종수는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얼굴과 목덜미에도 이리저리 감겨져있는 붕대나, 얼굴의 반을 가리는 반창고들은 아무래도 좋을 정도였다. 이 꼴로 놀러가자고요... 상호는 차마 그 말도 못 내뱉고 그들을 보다가 언제나처럼 손을 내밀고, 어디 잡을 곳도 없어보이는 모습에 다시 손을 내렸다. 그러자 둘이 먼저 급하게 손을 내밀어 상호의 양 손을 각자 하나씩 잡아쥔다.

"이 꼴이면 약속을 미루지 왜 미련하게 나왔대요."

"그래도 약속했잖아~ 그리고 이래보여도 꽤 멀쩡해. 센티넬들 엄청 튼튼한 거 알지? 일반인 기준으론 생채기야."

맞다는 듯 종수가 고개를 끄덕여보였지만 기상호는 바보가 아니다. 그 튼튼한 센티넬이 이 꼴이 되었으니 일반인보다 더 한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상호는 한탄하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조금만 덜 친했더라면 신경쓰지 않았을텐데 이 둘과는 너무 친해졌다. 병찬과 종수는 자주 상호의 일상을 듣고 싶어했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들려주면 즐거운듯 재잘대며 자신들도 그랬으면 어땠을까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기에 상호는 너무 물렀다.

상호는 조금 입을 어물거리다 결국 마음 먹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종수가 먼저 선수를 친다.

"하지마."

"네?"

"가이드 하지마."

"어떡... 아니, 왜요?"

"넌 그냥 네 인생 살아."

"맞아, 상호야. 너는 그냥 살아. 가끔 우리가 오면 이렇게 손만 잡아줘."

"아니 그래도... ...저도 찾아봤단 말이에요. 가이딩 받으면 더 빨리 낫는다고..."

"그러지말고 그냥 살면서, 우리한테 이야기해줘. 네가 얼마나 평범하게 사는지."

상호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 모습에 병찬은 걱정하는 얼굴을 했고, 종수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처음엔 저를 꼬셔서 데려가려던 사람들이 이제는 제가 가이드를 하겠다고 말할 낌새를 보이자 득달같이 말린다. 상호는 그것이 어쩐지 서운하고 슬펐다. 둘은 저를 만나서 행복한건지. 괜히 내가 쓸데없는 것을 알려준 건 아닌지. 고개를 푹 숙이자 둘이 다가와 저를 꾹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준다. 이제는 특별할 것 없는 다정에 상호는 미안해졌다.

되돌려보내려고 해도 영화 보는 거 처음이라 기대했다는 말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상호는 결국 언제나처럼 둘의 손을 잡으며 거리를 걸었다. 병찬이 목발을 짚는 탓에 걸음이 느렸는데, 네가 불편하면 종수보고 업어달라고 할게. 따위의 말을 하는 걸 보고 상호는 그냥 천천히 걷기로 했다. 센티넬이라지만 다친 사람이 다친 사람을 업는 걸 보고만 있는 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제가 업고 다니자니 병찬은 센티넬답게 무겁고 단단한 사람인지라 자신이 없어 결국 느리게 걷기로 했다.

병찬은 속도 없는지 내내 웃었고 종수는 언제나처럼 무감한 낯이었지만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있었다. 상호는 매우 커다란 팝콘과 음료수를 세 개 샀고 그걸 들고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나란히 앉고서도 손을 계속 잡고 있는지라 상호는 팝콘을 제 다리사이에 두고서 제가 다 씹으면 씹는대로 병찬이 입에 넣어주는 것을 얌전히 받아먹었다. 종수도 멀쩡한 팔은 상호와 잡고 있는지라 병찬이 입에 넣어주는 것을 받아먹고 있었다. 영화는 애니 극장판이었는데, 애니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아 병찬은 조곤조곤 왜 저러는지, 저게 무엇인지 물었다. 상호는 우물거리며 그것을 조용하게 대답해주었다. 종수가 옆에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는 기대했던대로 보는 맛이 있었고, 거진 다 먹은 팝콘과 음료수를 적당히 버리고 나온 상호는 조금 고민하다둘의 손을 이끌고 이것저것 파는 스토어에 들어갔다. 상호는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찬찬히 살피다 곧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 제대로 살피기 위해 손을 놓고 그것들을 면밀히 살피고 있으니 양 옆에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것이 느껴진다. 처음엔 남자들끼리 남사스럽다고 당황했는데, 이제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한참 물건을 고르던 상호는 다이어리 세 권을 골라들고 계산을 했다. 그 뒤 하나씩 쇼핑백에 넣은 상호는 밖으로 나와 그것을 둘에게 내밀었다. 내미니 얌전히 받은 둘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기에 상호는 부러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다이어리에요. 한 장에 하루라서 일기처럼 써도 돼요. 앞으로 저희 못 만날 때마다 어떤 하루였는지, 뭐 재밌는 거 있었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나중에 만나면 뭐하고싶은지 적어놓고 나중에 바꿔서 읽어요. 말하자면 교환일기 같은 거예요."

"교환일기?"

"네. 서로 일기 쓰고 교환하는 거예요. 매일 편지를 쓰는 건 좀 귀찮고 편지를 쓰면 뭔가 각잡고 쓰게 되잖아요. 할 말 찾아야하고... 저도 햄들이 뭐하면서 지내는지 궁금해요."

둘은 눈을 끔벅이다가 이내 수긍한듯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종수의 것은 병찬이 같이 들어주었다. 셋은 다시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상호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형들은 약속한 듯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상호는 웃었다. 그러곤 천천히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호는 생각한다. 이제와서 그들을 끊어낼 수는 없으니 그들에게 조금 더 평범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종수와 병찬은 갈수록 잘 만나지 못했으나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만났다. 올 때마다 점점 피곤해지고 예민해지는 얼굴들 탓에 언젠가부터 상호는 더 이상 놀러다니지 않고 그 둘을 제 집에 초대했다. 나란히 침대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제 품에 기대는 둘을 가만히 토닥여주면, 둘은 서서히 망가진 정신을 수복했다. 그리곤 가져온 다이어리를 내미는 것이다.

병찬과 종수는 대단한 일이 없었고, 대부분의 일에 함께 다니는데다 종수는 글로도 말 수가 적었기에 어느순간부터는 같은 다이어리에 적기 시작했다. 다이어리가 한 달 짜리인 문제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을 만나는데 그것이 저번 달 2일에 만났더니 다음달 17일에 만나기도 해서, 다이어리의 장 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둘은 주로 병찬이 먼저 이것저것 적어두면 그 밑에 종수가 간단한 코멘트를 적어두는 것으로 일기를 대신했다. 둘의 이야기는 거의 비슷했다. 임무를 나갔다. 가서 빨리 끝내거나 늦게 끝내거나. 그러고 푹 쉬고. 그나마 다른 점은 매일 무엇을 먹었는지, 병찬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정도. 그리고 대부분은 상호와 함께 했던 추억 중에 무엇을 곱씹었는지 같은 것들.

병찬과 종수의 다이어리는 심심한 것에 비해 상호는 하루를 잔뜩 적어두었다. 어디에 갔고 뭘 먹었고 뭘 구경했고 오늘은 무슨 공부를 했고... 처음 다이어리를 교환했을 때 둘은 상호의 다이어리를 읽는다고 정신이 없어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몇 번을 그렇게 집에만 있으니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병찬과 종수는 다시 놀러다니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하여 서로의 다이어리를 교환하여 돌아간 뒤 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놀러나가면서, 함께 하는 일과의 마지막은 항상 다이어리를 같이 사러가는 것이 추가되었다. 병찬과 종수의 다이어리를 각각 골라주면 병찬과 종수 또한 상호의 다이어리를 두 개 골라주었다. 언제나 돈은 둘이 결제해주었기에 상호는 가격을 가리지 않고, 둘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것들을 골라주었다.

다이어리가 대략 10권정도 쌓였을 때, 돌연 종수 혼자 상호의 앞에 나타났다. 한몸처럼 붙어다니던 병찬은 어디갔는지. 종수는 누구보다도 불안정해보이는 상태로 연락도 없이 상호의 앞에 나타나 상호를 끌어안았다. 저녁이었고, 어디 갈 곳이 없었던 상호는 집에 있었다. 종수는 상호를 끌어안은 상태로 한참을 그러고 있었고 퍼뜩 정신을 차린것처럼 말했다.

"기상호. 박병찬이 아파."

"많이 아파요?"

"폭주했는데...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어떻게 해? 박병찬이 너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걔 없으면 안 돼... 어차피 걔도 내가 폭주하면 널 찾아올거야. 그러니까..."

"알았어요. 종수햄. 얼른 가요."

종수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상호를 껴안고 하늘을 날았다. 병찬이 있다면 안전히 제어해주었겠으나 종수만 능력을 쓰니 둘은 거의 돌풍에 휩쓸린 사람들처럼 날았다. 착지도 불안정하여 거의 종수가 몸으로 땅에 떨어진 수준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상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난자되어있는 괴물들, 그 가운데에 병찬이 있었다. 피범벅으로 더럽혀진 그는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에 들었던 설명이 떠오른다. 병찬의 능력은 무언가의 힘을 다루는 것이라 폭주시 본인만 위험하고 주변엔 피해가 없다고. 그래서 종수가 착지 직전에 힘을 없앤 게 분명했다.

상호는 일어나 병찬에게 달려간다. 묻은 피는 병찬의 것이 아니어보였지만 병찬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누가봐도 정신이 나간듯 축 늘어진 몸을 상호는 있는 힘껏 껴안는다. 껴안고 가만히 있으면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병찬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종수는 멍한 눈으로 둘을 내려다보았다. 병찬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호는 절박하게 종수를 올려다본다. 종수는 그 눈을 마주하다 천천히 상호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턱을 잡아내려 병찬의 입을 벌린 종수가 말한다.

"키스해."

"...키스요?"

"안쪽 살에 닿는 게 제일 효율이 좋아. 잘 할 필요 없어. 그냥... 적당히 안을 핥아주기만 해."

상호는 그 말에 바로 입을 맞춘다. 이러면 살릴 수 있는 게 맞나. 가이딩은 스킨쉽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효과가 좋다는 말은 들었다. 이걸로 되나? 불안한 탓에 상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낀 종수가 상호의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춘다. 상호가 시선만 들어 종수를 쳐다본다. 이쪽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면서 상호를 생각해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였다.

"괜찮아. 안정되고 있어."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병찬의 숨이 편안해진 것을 느낀 상호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떨어진다. 그러다 소매를 올려 입을 닦아주었고 종수는 그런 병찬을 편히 눕혔다. 아까보다 눈에 띄게 편안해진 안색. 상호는 고개를 숙여 병찬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댔다. 안정된 심장박동이 들린다. 그대로 뒤로 털썩 주저 앉았다. 짧은 적막. 상호는 어느새 차오른 눈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고 종수는 다가와 상호를 가만히 껴안아주었다. 가이딩을 받는 게 아니라 제 등을 서툴게나마 천천히 쓸어주는 손길에 눈물을 흘렸다. 그제서야 제 앞의 사람이 정말 죽을 뻔 했구나 하는 현실감이 몰려온 탓이다. 

"미안해... 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종수는 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렀다. 탓에 상호는 더 크게 울었다. 놀라기는 본인도 놀랐을 것이 뻔한데 와중에 상호가 겪었을 감정을 걱정하는 것이 다정했다. 종수는 상호가 진정할 때까지 한참을 토닥여주었다.


기상호는 가이드 적성 검사를 했다. 결과는 A급이었다. 가이드의 A급은 그 위상이 다른데, 대부분의 센티넬들과 준수한 매칭률을 보이는 가이드가 받는 결과였다. 못해도 50% 이상. 그런 가이드는 굉장히 귀했다. 센터는 바로 높은 연봉과 좋은 혜택을 내밀며 상호에게 센터 소속 가이드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내밀어진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본 상호는 생각한다. 아, 이거 꽤 노예계약서 같네. 계약 기간이 5년으로 길었고 그 사이에 그만두면 굉장한 불이익이 있었다. A급 전용 계약서라고 적혀있는 것을 미루어보아 1년 만에 그만두는 가이드들은 좀 더 낮은 등급인 모양이다.

상호는 떠올린다. 정신을 차린 병찬이 결국 일을 쳤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것. 이어 일어나서 종수의 얼굴에 한 대 날린 것. 무력히 넘어진 종수가 변명도 없이 고개를 숙인 것. 이어 병찬 또한 망연자실하게 있다 눈물을 흘린 것들을. 종수와 병찬은 상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이드 한다고 하지마. 절대로.

하지만 셋 다 알았다. 병찬과 종수는 이제 상호가 없으면 안 된다. 상호는 이 모든 전말을 알았다. 둘을 아끼는 상호는 아마 노골적인 노예 계약서를 내밀었어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상호는 이제 둘을 너무 아꼈으니까. 상호는 그 계약서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쉽게 싸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센터쪽에서 먼저 입을 연다. 매칭률이 높으니 대부분의 센티넬들과는 손만 잡아주면 된다. 네가 전담으로 케어할 것은 친한 박병찬 센티넬과 최종수 센티넬이 될 것이라고.

센터는 기상호의 존재를 알자마자 신변검사를 했고 이제까지 최종수와 박병찬과 함께 많은 만남을 가진 것을 파악했다. 상호는 작게 헛웃음을 짓는다. 둘은 절박하게 말하면서도 이미 이 결말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들이 사랑했던 것은 상호의 다정함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상호는 느릿하게 제 이름을 적어넣는다.

상호가 싸인을 하자마자 배정받은 방은 구조가 조금 기이했는데 숙소의 방문을 열면 덩그러니 침대가 놓여진 작은 방 하나, 그리고 맞은 편의 문을 열면 다시 상호가 지낼 방이 나오는 구조였다. 중간의 방은, 가이드 룸으로 가이딩을 원하는 센티넬들이 찾아와 그 방에 머무르면 상호의 방에 알람이 울리는 것으로 나름 가이드의 사생활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글쎄. 정말 존중하고 싶었으면 그냥 다른 곳에 만들지 않았을까... 상호는 그 생각을 대충 넘겼다.

그 후 병찬과 종수는 매일마다 들렀다. 하지만 마주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상호였다. 모든 센티넬과 준수한 매칭률을 보이는 A급 가이드가 놀고 있을리 없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센티넬을 맞이했고, 잠을 자기 전까지 가이딩을 했다. 많은 센티넬들과 만났다. 대부분은 비굴해보일만큼 소심했고, 상호의 눈치를 봤다. 잘 대해주지 않으면 가이드들이 그만 둘 수 있기에 자연스레 몸에 밴 태도였다. 그것이 거북하여 상호는 센티넬들에게 아주 친절히 대해주려 노력했다. 센티넬들은 약간 핀트가 나가는 상호의 말에도 잘 대답하려고 애썼다.

가끔 시간이 날 때 밖으로 나오면 다른 가이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센터에 남은 가이드들은 크게 세 가지였다. 자신이 갑인 위치를 즐기는 사람들, 억대연봉과 각종 혜택을 노리는 사람들, 그리고 책임감 때문에 그만두지 못한 사람들. 후자의 사람들은 언제나 피곤해보였다. 책임감으로 스킨쉽을 하고 센티넬들을 달래고 안정이 될 때 동안 있어주는 것은 애를 어르는 것과 비슷하다. 등급이 낮은 가이드도 결국 가이드이며 약물보단 효율이 좋았다. 둘 다 같이 쓰면 더 좋았고. 그렇기에 그들은 아주 오래 있던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기상호는 들어올 때부터 후자의 사람이었고, 들어온 뒤엔 더욱 그랬다. 이래서 가이드를 하기 싫어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호는 오늘도 모르는 센티넬을 다정히 안아주었다. 겁에 질렸던 센티넬이 서서히 진정하는 것이 느껴진다. 병찬과 종수만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덜 동정할 수 있었을텐데. 기상호는 왜 둘이 그렇게나 가이드를 하지 말라고 말렸던 것인지를 진정으로 실감한다. 상호는, 마주하는 센티넬들의 감정들이 저를 좀먹는 것을 느낀다. 그 둘은 제게서 꽤 많은 것을 숨겼던거구나.

대부분의 센티넬에겐 담당 가이드가 있었다. 담당 가이드는 그 센티넬과 가장 높은 매칭률을 보이는 가이드다. 병찬과 종수의 전 담당가이드는 12%라 약물로 부족함을 보조해줘야했다. 상호의 매칭률은 훨씬 높았다. 병찬과는 97%, 종수와는 98%였다. 폭주를 하지 않으면 손만 잡아도 충분할 정도였지만 둘은 상호를 차지할 수 있는 타이밍이 오면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 처럼 품을 파고들고 힘껏 껴안았다. 그러면 상호는 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둘은 상호의 허락 하에 상호의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센티넬들이었다.

병찬은 이후 가이딩을 해도 자주 불안해보였고, 종수는 어쩐지 더욱 조용해졌다. 상호는 그런 이들을 보며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둘은 어떻게든 작게 웃어보였다.

상호가 센터에 들어오면서 둘은 더 자주 임무에 나갔다. 그 전엔 적정 가이드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나갈 수 있는 임무는 매우 위험한 소수의 임무 뿐이었지만 상호의 존재를 알게 된 센터는 둘을 좀 더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둘은 자주 나갔고, 이제는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빼앗기 위한 싸움에도 차출되었다. 괴물들이 너무 많아 버려진 구역에 단 둘이 내버려지는 경우가 늘어났다. 둘은 언제나 살아돌아왔으나 상처가 많았다. 매일마다 가이딩 수치가 바닥을 쳤다. 그래도 괜찮았다. 상호가 있으니까.

가이딩을 하면 상처가 빨리 낫는다. 상처가 치료되기 보다는 자체 치료 속도를 빠르게 하는 구조였다. 센티넬은 원래도 보통 인간보다 치료 속도가 빨랐다. 상호가 손만 잡으면 얇게 베인 상처가 나았지만 상호와 키스를 하면 부러진 다리가 거의 나았다. 그럼에도 병찬과 종수는 포옹까지만 받았다. 아주 가끔, 그 몰골을 보다 못한 상호가 먼저 입을 맞춰오면 거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요구하지 않았다. 상호는 그 둘의 눈에 서린 공포감을 읽는다. 둘의 존재로 인해 마모되길 선택한 상호가 언젠가 자신들을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상호는 그 모습에서, 낮에 제게 조심스럽게 매달리던 다른 센티넬들을 떠올렸다. 센티넬들은 다 똑같구나...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 잠든 이들의 얼굴은 평화로워보였다.

A급 가이드는 센터를 벗어날 일이 없었지만 C급과 B급은 다르다. 원래 규정상 가이드는 센티넬들의 임무에 파견되어야한다. 센티넬이 예기치 못한 폭주를 한다면 그것을 막아야하니까. 그래서 C급과 B급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센티넬들이 임무를 나갈 때마다 따라나갔다. 하지만 A급은 혹시라도 죽는다면 큰일이었기에 차라리 센티넬을 폭주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수지타산이 맞았다. 상호는 그렇게 말하는 가이드를 보며 힘껏 때리면 얼마나 날아갈까, 잠깐 계산했다. 한 30cm정도가 최대일 것 같았다.

한 해가 지나자 많은 위험구역이 소탕되었다. 병찬과 종수를 죽어라 굴린 덕이었다. 종수는 한 번 폭주했고, 병찬은 두 번 폭주했다. 종수보다 병찬의 가이딩수치 소모가 더 빠른 탓이었다. 그 둘의 폭주마다 상호는 호출 당해 그들이 가까스로 살아있는 현장으로 보내졌고 처참한 광경들을 마주했다. 병찬의 폭주 한 번은 종수의 폭주에 상호가 다치지 않도록 무자비하게 뻗어나오는 힘을 갈무리하다 터진 것이다. 상호는 둘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다시 울었다. 어째서 병찬과 종수가 그리도 제 일상을 동경하고 사랑했는지를 깨닫는다. 센터는 거대한 구덩이 같았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만이 겨우 살아갈 뿐이다.


웬일로 병찬과 종수가 임무가 없었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둘은 상호를 독점했다. 경고가 떨어졌지만 듣지를 않아 상호는 그냥 쓰지 못했던 휴가를 쓰기로 했다. 둘의 손을 잡고 아주 오랜만에 도시로 나왔다. 종수와 병찬이 능력을 써서, 상호는 그 날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경험을 했다.

전처럼 영화도 보고, 오락실도 가고, 노래방도 갔다 술까지 사와 상호의 방에서 나눠먹었다. 셋 다 술은 처음이었는데, 종수 외에는 꽤 멀쩡해서 둘은 종수를 실컷 놀렸다. 그러다 결국 종수가 삐지면 다시 안아주고 뽀뽀해주며 한참을 달래줬다. 기분이 풀린 종수가 병찬의 품에 파고들어 눈을 감는다.

상호는 다시 술을 한 번 홀짝인다. 종수는 아직 잠들지 않았고 병찬은 조금 졸린 눈이었다. 상호의 요청으로 침대는 굉장히 넓었다. 상호는 흐음, 작게 소리를 내더니 먹던 것들을 대강 정리하고 침대에 앉아 둘을 불렀다. 워낙 덩치가 큰 탓에 셋이 누우니 침대가 꽉 찼다. 그래도 빈틈없이 꾸겨져서 자야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상호는 가만히 그 사이에서 눈을 꿈벅였다. 병찬과 종수도 상호를 껴안은 채로 점점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구명줄인 것 마냥 서로의 손을 잡아 그 사이의 상호가 완전히 묶인 상태였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며 짧게 웃는다.

둘을 재운 상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계속 붙어있던 탓에 한 눈에 보기에도 상처가 많이 나아있었다. 그렇게 기워놓으면 또 다시 위험한 곳에 던져질 것이다. 혼자 있는 동안 저는 이런저런 정보를 요구할 수 있었다. 병찬과 종수는 저와 만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임무가 많아졌고, 제가 센터에 입소한 뒤에는 거의 대부분의 임무에 차출당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이드의 수는 어쩌든 적었고, 그 말은 센티넬을 적게 돌려야한다는 뜻이다. 원래도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있는 센티넬들이 자주 고생을 했는데 고등급 센티넬에게 최고급 충전기가 생겼으니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상호는 그게 무거웠다. 언젠가는 제가 그들을 살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 존재가 그들을 더욱 위험한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이 거절했다면 이렇게까지 몰리진 않았을까. 상호는 의미없는 가정을 하며 평화로워보이는 센티넬들을 내려다본다. 저번 주 제 앞에서 담담하게 도망가는 것도 무섭다고 말했던 B급 가이드가 생각났다. 그 가이드 또한 특정 센티넬과 매우 높은 매칭률을 보였고 그 탓에 그 센티넬은 많은 임무에 밀어넣어졌었다. 차라리 그만두면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그를 센티넬은 꾹 안아주며 제발 자기를 버리지 말아달라 빌었다고 한다. 병찬햄도, 종수햄도. 나를 잡을까? 상호는 어쩐지 그러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더욱 무겁다.


상호는 점점 마모되었고, 병찬과 종수는 점점 두려워했다. 더 이상 상호는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 모든 센티넬에게 부드러이 웃어주었으나 그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책임감에 남아있는 다른 가이드처럼 상호의 얼굴엔 짙은 피로감이 드리웠다. 그럼에도 항상 둘을 챙겼다. 상호의 계약기간이 반 년 정도 남았을 때, 병찬과 종수는 오랜만에 처음처럼 싸웠다. 임무를 나가 상호의 이야기를 하던 차였다. 종수는 성질대로 힘을 썼고 병찬은 그것을 흘려내며 동시에 종수를 공격했다. 다치기는 종수가 더 다치는데,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병찬이었다. 병찬이 폭주의 기미를 보이자 그제서야 종수는 그만둔다. 둘 다 어지간히 만신창이었다.

"걔를 그만두게 해야해."

"종수야.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거 알잖아."

"그래서? 우리 살겠다고 걔를... 우리처럼 만들어?"

"..."

"너도 알잖아... 우리는 전처럼 돌아가도 여전히 버티면서 살겠지. 근데 걔가 그래야하냐고."

"방법 있어? 걔가 우릴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방법이 있냐고. 걔가 진심으로 상처 안 받고 그만두게 할 수 있냐고."

"받더라도 떨어트려야 해. 우릴 싫어하게 되더라도."

"...난, 나는... 못해. 내가 걔한테 상처주는 건 못해..."

"난 할 수 있어. 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거야. 너만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다 할게, 응?"

병찬의 눈이 떨리고 숨이 가빠진다. 정신적으로 몰려 점차 숨이 가빠지는 것을 보고 종수는 가까이 다가가 한동안 먹지 않았던 약을 꺼내어 입에 넣어주었다. 병찬은 그것을 씹어삼켰고 두려운 듯 덜덜 떨었다. 병찬이 눈물을 흘리기에 종수도 눈물을 흘렸다. 상호가 더 이상 대신 울어주지 못하자 병찬과 종수는 자주 둘이서 울었다. 그 둘은 그만 울고 싶었다. 부디...


상호의 계약기간이 2달 남았을 때, 센터에 새로운 A급 가이드가 들어왔다. 당연히 모두가 반겼다. 상호는, 피곤한 가이드들은 반기지 못했다. 새로운 가이드가 그나마 덜 마모되는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이변이 생긴다. 최종수의 강력한 요청으로 새로운 A급 가이드는 병찬과 종수의 전담 가이드로 바뀌었다. 자세한 매칭률을 당사자들만 알고 있었으나 상황을 보아하니 상호보다 더 높은 매칭률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3% 미만은 별 큰 차이가 아닌데. 상호는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둘은 상호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전담 가이드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호는 목 안이 꺼끌거렸다. 불쾌한 감각이 머리를 울린다. 무언가가 비틀려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둘을 만나고 싶었는데 연락이 되질 않았다. 센티넬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가이드를 찾아갔기 때문에 가이드들은 자신의 숙소에 있으면 되었다. 가이드가 센티넬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상호는 다급함에 센티넬 숙소를 찾아갔으나 둘은 언제나처럼 임무 탓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상호의 계약기간이 2주가 남았을 때, 종수가 가이드를 받으러 찾아왔다. 상호는 멍하니 찾아온 종수를 보다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상호의 방까지 들어가려 하니 종수가 멈춘다. 상호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종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에 상호는 멍하니 서있었다.

"햄. 오랜만에 봤는데 왜 아무 인사도 안 해줘요."

"..."

"...이번 가이드랑 종수햄이 사귄다던데 정말이에요?"

"..."

"나보다 매칭률이 높다면서요..."

"맞아."

"..."

"이제 굳이 너랑 안 해도 되겠더라."

"..."

"너 밖에 없을 때랑 달라. 박병찬이 걔한테 가이딩 받느라 바빠서 잠깐 왔을 뿐이야."

"..."

종수는 상호가 떠올릴 생각을 알았다. 상호는 점차 마모되기 시작하면서 종종 그들이 잠들었다고 생각 할 때에 이런저런 속 얘기를 털어놓곤 했으니까. 병찬도 종수도 잠귀가 아주 밝았다. 상호는 긴장이 풀린 상태라 그것을 몰랐다.

'센티넬은 별 수 없이 가이드를 좋아한다 카대요. 햄들도 그냥 내가 가이드라서, 매칭률이 좋아서 좋아해줬던 걸까요. 아닌 거 아는데... 그냥 오늘따라 그래 생각이 드네.'

종수는 기꺼이 상호의 마음에 대못을 박기를 자처했다. 상호의 얼굴이 깨어져나가는 것을 보며 구토감이 올라왔으나 참는 것은 종수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울 일이 적어진 상호가 오랜만에 눈물을 흘린다. 서럽게 울던 아이는 어디가고 망연자실하게 눈물만 흘리는 꼴이, 그간 얼마나 울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으나 종수는 그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병찬과 오지 않기를 잘했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든든한 사람인 것처럼 굴면서 견딜 수 없는 충격에는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었으니까. 글쎄. 센티넬이 아니었더라면 실제로 든든했을 것이다. 큰 폭으로 널뛰는 가이딩 수치는 병찬의 정신을 많이 갉아먹었으니까. 그 전의 병찬이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는 종수만이 기억했다. 언젠가는 그런 이야기도 상호에게 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해주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둘이 무슨 감정을 가지든 닿고 있으면 가이딩은 계속 된다. 종수는 점점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던 이는 어느새 눈가가 붉어진 채 가만히 아래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다. 괴로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괴물에게 처맞아 진창을 구르고 상처에 괴물의 진액이 닿아 불에 댄 듯한 고통을 느낄 때 보다 더 괴로웠다.

"햄."

"..."

"이제 내가 없어도 돼요?"

종수는 드디어 원하는 질문을 얻어냈다. 제 목소리가 혹시나 떨릴까 긴장하면서도 몸의 힘을 천천히 푼다. 해야할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어. 넌 이제 우리한테 필요없어."


상호는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센터를 나갔다. 새로운 전담 가이드와의 매칭률은 다른 센티넬들과 똑같았다. 50% 전 후의 매칭률. 종수와 병찬이 나가는 임무는 조금 줄었다. 그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상호를 반기는 것은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은 돌아온 아들을 보고 놀랐다. 가끔 주고받는 편지에선 행복한 것 같던 아들이 말라비틀어진 눈으로 웃지도 못한 채로 왔으니. 부모님이 무슨 일 있냐고 호들갑을 떨어도 상호는 그저 건조하게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을 만나니 제가 얼마나 메마른 사람이 되었는지 와닿는다.

집으로 돌아온 상호는 3개월 동안 폐인처럼 방에 틀어박혔다. 경상도의 남자애답게 무뚝뚝한 면이 있어도 제 부모에게 능글맞게 치대며 용돈을 요구할 줄도 알던 아이는 핸드폰도 보지 않고 침대에 온종일 누워만 있었다. 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나오긴 하는데, 그저 묵묵히 먹는 모습은 거의 살기 위한 꼴이라 부모님은 그 꼴을 보다못해 결국 자신들이 아는 아들의 친구, 혹은 친구의 어머니에게 사정을 했다.

탓에 상호는 아주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고교 동창이던 희찬이 친하게 지냈던 다은과 태성까지 끌고 나왔다. 재유선배는 바빴고 준수선배는, 같은 센터에 있었으니 여기 올 수가 없다. 반갑게 인사하는 셋이 얼굴을 굳히는 걸 보면서도 상호는 마주 웃어줄 기력이 없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세 쌍의 눈이 아닌 척 꽂히는 게 느껴진다. 그 시선에는 악의는 없이 호의만 가득함에도 상호는 어쩐지 피곤했다.

그럼에도 희찬의 주도로 넷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찍고, 새로 나온 재밌는 영화도 보고, 그러다가 다이아몬드 타워에도 올랐다. 정말이지 우습게도, 상호는 그게 좀 힘들었다. 예전에 세상 물정 모르는 몸만 큰 어린 센티넬들을 데리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작 5년 동안 보지 못했던 거리가 생경했으며 제게 구김살 없이 다가와 웃는 사람들이 뜨거울 만치 다정했다. 중간에 들렀던 카페에서 먹었던 딸기 스무디는 정말 맛있었다. 희찬이 여긴 이게 맛있다며 시켜준 크림파스타도 입맛에 딱 맞았다. 사진을 찍을 때에 저를 신경 쓰면서 더 환히 웃는 희찬을 볼 때엔 그린 듯이 웃는 병찬이 생각났고 그 호의를 보면서도 기어코 웃지 못하는 제 얼굴을 마주하면서 종수가 생각났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면서도 상호가 여전히 시들해 보이자 희찬은 안달 난 맘을 숨기고 나중에 또 놀자며 채근해왔다. 옆에서 내내 따라다니며 어떻게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보려던 다은과 태성도 다음엔 더 재밌는 거 하고 놀자며 별일 없는 듯이 권유했다. 상호는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렸다.

"응. 나중에 또 놀자. 연락할게."

센터에서 지내며 높낮이가 많이 사라진 밋밋한 어조가 어색하게 흘러나온다. 상호가 달라진 점 중 하나였다. 헤어지는 길에 희찬이 먼저 상호를 꾹 안아왔다. 그걸 보던 다은이 같이 안아주었고, 징그럽다며 투덜대면서도 태성 또한 안아주었다. 다정에 잠식되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것을 제게서 겪었을 둘이 생각나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상호는 일부러 신문지나 포털 사이트에 나오는 기사들을 무시했다. 그런 기사들은 센티넬이나 가이드의 사망 소식을 꼬박꼬박 알렸기에 혹시나 한 마음이었다. 집에서 구독하던 신문지는 마침 아버지가 펼쳐둔 신문에 작게 어떤 센티넬이 사망했는지를 적혀있는 것을 보고, 제가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리자 구독을 취소했다. 하필이면 이름이 익숙했다. 맞는 가이드가 없어서 상호에게 많이 의지했던 센티넬이었다. B급인데도 능력이 쓸 곳이 많아 센터에 입소했고 상호에게 자주 찾아왔었다. 적절한 전담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들이 그렇듯 제게 특히나 비굴했으며 눈치를 많이 보면서도 착했던 사람이었다.

누워있으면 더 생각이 나는 것 같아 상호는 다시 대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 전의 대학교는 가고 싶지 않아 퇴학 처리를 진행하고 인터넷 강의를 찾아봤다. 공부를 하니 머리가 비워지는 것 같아 상호는 온종일 앉아 공부만 했다. 5년 동안 이렇다 싶은 공부를 한 적이 없었음에도 기본 머리가 있었던 덕인지 다시 채워지는 속도는 빨랐다. 평범하게 살자. 평범하게. 상호는 아직 살고 싶었다.

상호는 정말 평범하게 살았다. 시간이 흘러 수능을 다시 보고(이 미친세상에도 수능은 계속 봤다) 당당하게 부산에 나름 이름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전처럼 집이 가까워 자취방은 구하지 않았고 중간중간에 희찬이네와 많이 놀았다. 셋 다 취업 준비 중이라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기상호는 나이가 꽤 많았지만 조용하고 얌전하면서 괜찮게 생긴 얼굴로 나름 인기가 좋았다.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아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는 탓에 일부러라도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강의도 잔뜩 들었다. 조기졸업이라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대학원까지 진학하자고 권유를 받았지만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면접을 가기 위해 나온 상호의 앞에 마법같이 병찬이 나타났을 때. 상호는 생애 처음으로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 얼굴을 보고 병찬이 쓰게 웃는 것에 상호는 울렁거림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 도망갔다. 상호야. 그리 부르는 목소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적어도 그들의 이름을 신문에서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멀끔해 보이는 얼굴이 어쩐지 서운해져 그것에 질색하며 도망갔다. 나 없이 잘 지내면 다행이지. 그러길 바랐으면서...

한참을 도망가봤자 상호는 이제 일반인이었고 병찬은 훈련을 받은 군인이다. 기어코 지쳐 멈춰선 상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병찬은 상호가 다시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상호는 한참 숨을 골랐고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왜 갑자기 앞에 나타났냐고 해야지. 이제 당신들은 지긋지긋하다고 해야지. 상호는 이를 악물고 병찬에게 꼬인 속을 쏟아내려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모습에 머뭇거렸다. 저 얼굴을 알고 있다. 병찬의 폭주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던 그때. 겨우 일어난 병찬이 종수를 보며 지었던 표정이었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 다가갔다. 병찬은 얌전히 기다렸고, 이어 상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주 안아주자 그제야 안심하며 안겨들었다. 상호도 떨고 있었고 병찬도 떨고 있었다. 닿는 순간 깨닫는다. 병찬이 무언가 이상했다. 상호는 병찬을 떨어트려 얼굴을 살펴보고, 이어 입을 맞췄다. 병찬은 유순히 그것을 받아들인다. 천천히 혀를 얽히면서 상호는 깨달음에 확신을 얻었다. 한참 뒤에야 떨어진 상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병찬은 무너지듯이 웃었다.

병찬이 망가졌다, 정확히는 가이딩 효율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전담 A급 가이드가 아무리 애를 써도 가이딩 수치는 70%를 넘지 못했는데 능력을 쓸 때 낮아지는 수치는 전보다 세 배는 빨랐다. 그 탓에 폭주를 겪으면, 효율이 더 낮아져 이제는 써먹지 못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병찬 하나를 보고 A급을 위험한 곳으로 내보내기엔 문제가 컸다. A급 가이드는 귀한 자원이다.

병찬의 효율이 그렇게 떨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가이딩 수치라는 것은, 다른 의미로 말하자면 센티넬의 정신력 수치였다. 무던하고 정신력이 강할수록 수치가 낮아지는 비율이 적어졌고 긍정적이며 자가 회복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수치가 빠르게 증가한다. 병찬은 지속적으로 미쳐갔고 폭주를 겪을수록 심화하였다. 새로운 가이드와는 유대를 쌓지 못했다. 병찬은 정신이 망가졌다.

탓에 병찬은 기어코 쓸모없음 판정을 받고 강제로 전역당했다. 그는 이제 S급이 아니라 D급 판정이었다. 그래도 능력을 쓰지 않으면 수치가 낮아지는 일이 없어 일반인으로 살아갈 수는 있었다. 그 모든 일을 말해준 병찬은 상호를 꾹 껴안고 말했다. 네 옆에 있어도 돼? 그리 물어오는 것에 상호는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상호는 병찬을 꾹 끌어안았다.

그래도 그동안 굴려 먹은 것이 있어 병찬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은 없냐 물으니 어디 사는지도, 연락처도 모른다고 답해 상호는 제 자취방에 병찬을 재웠다. 병찬은 아주 조용히 있었다. 상호가 집에 있던 없던 얌전히 소파에 누워 시체처럼 있었다. 그러다 상호가 부르거나 다가와 안아주면 그제야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전처럼 다가오진 못했다. 병찬은 얌전히 상호가 다가와 주길, 손을 뻗어주길,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렸다. 그 모습이 상호를 더 지치게 했으나... 상호는 결국 그런 병찬을 받아들인다.


기어코 몇주가 흐른 뒤 상호는 병찬에게 묻는다.

"햄이 여기 있으면 종수햄은요?"

"...걘 아직 센터 소속이야."

"종수햄은 자기 능력 잘 못 다루잖아요. 병찬햄이 항상 조정해줘서."

"쓸 줄은 아니까. 나처럼 비효율적으로 망가지지도 않았고."

그것 참, 꼭 쓸모를 다 한 도구와 아직은 쓸모 있는 도구를 셈하는 것 같다고. 기상호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종수가 능력을 다루기 어려워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S급이나 되는 센티넬 둘이 같이 다닌 이유가 뭐겠는가. 종수가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병찬의 도움이 없으면 S급 센티넬 하나가 만신창이가 되니까. 그렇게 다치고 나면 가이딩을 더 받아야 빨리 나으니까...

하지만 종수는 A급 가이드를 데려왔고, 듣기론 저보다 효율이 좋았다고 했으니까... 그럼...

생각을 끝낸 상호는 병찬을 쳐다본다. 병찬이 왜 계속 불안정했는지를 깨닫는다. 병찬은 이제 종수의 옆에 있어 줄 수 없었다. 무던해 보이지만 그저 버텨낼 줄 알 뿐이지 셋 중 그 누구보다 섬세한 사람은 종수였다. 불안정한 병찬을 위로하면서도 병찬의 존재에 의지하던 것도 알았다. 그럼 상호도 병찬도 없이 혼자 남은 종수는...

상호는 어느 순간 다가와 제 입을 천천히 열게 만드는 병찬을 보고서야 자신이 숨을 참았다는 것을 알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키자 조심스레 닿았던 병찬이 떨어진다. 모든 것이 끔찍했다. 정말 모든 것이... 이제 혼자 남은 것은 종수다. 상호가 둘 없이 버텨내기 위해 타인으로 씻어내리던 감정들을 종수는 오롯이 혼자서 버텨내야 했다. 상호는 기어코 다시 울었다. 살아있는 것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어째서 병찬이 말해주지 않았는지를 짐작했다. 말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끔찍한 것을 뱉어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심지어 그 끔찍한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아마 상호가 묻지 않았더라면 병찬은 계속해서 그 사실을 혼자 짊어진 채 계속해서 망가져 갔을 것이다. 상호는 더 빨리 묻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다 말았다.

더 이상 울기만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병찬은 더 이상 관리받는 센티넬이 아니다. 무슨 뜻이냐. 목에 아무런 장치가 없다는 뜻이다. 일정 등급 이상, 혹은 폭주 시 위험해지는 센티넬들은 다 목에 자폭 장치가 달려있었다. 종수와 함께 다닐 때야 종수와 같이 폭주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장치를 달고 살았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상호는 병찬의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한다. 그것만 없다면...

상호는 머리를 쓰기로 했다. 병찬의 돈도 쓰기로 했다. 일반인이야 더러운 곳을 모른다지만 병찬은 알았다. 상호가 전담 가이드가 되고 나서는 인간의 일에도 쓰였으니까. 센터의 인간들은 어릴 때 잡혀 와 배운 것 없는 병찬이 뭘 알겠나 싶었겠지만 병찬도 종수도 머리가 기민했다. 병찬은 더러운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병찬은 상호가 원하는 것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상호와 병찬은 사는 곳을 옮겼다. 위험구역 근처의 민가였다. 워낙 위험한 곳이라 비어있는 집이 많아 살 곳을 찾는 건 쉬웠다. 위험구역 근처답게 크리쳐들이 자주 나타났으나 S급 센티넬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종수와 병찬이 서로 있을 때 가장 효율이 좋았던 거지, 병찬 역시 S급 센티넬로 인정받은 이유가 있었다. 흐름을 다룬다는 것은 힘의 이동에 관여한다는 뜻이다. 병찬은 가벼운 조작으로 크리쳐들을 서로 상처 입게 만들었고 자신의 몸을 다루어 빠르게 움직였으며 또한 엄청난 힘으로 묵사발을 냈다.

그러고나면 병찬은 개운한 듯이 다가와 상호에게 조르듯 붙어왔다. 준비를 하면서 병찬의 가이딩 효율은 눈에 띄게 늘었다. 병찬은 다시 밝아졌다. 상호가 말해주는 미래를 기대했다. 병찬은 전처럼 겁먹지 않았다. 상호에게 깨어지지 않은 다정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가만히 안아준다. 병찬도 상호도 기대하고 있었다. 이 기대감을 종수에게도 줄 수 있기를.


병찬이 없는 종수가 파견되는 곳은 뻔하다. 제 능력 하나 제대로 못 다뤄서 스스로 상처 입는 센티넬이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다. 종수의 취급은 폭탄이다. 해치워야 할 것이 몰려있는 곳에 던져놓으면 모든 것을 도륙 내고 파편만이 남는 폭탄. 종수는 언제나처럼 헬기 위에서 뛰어내렸고, 우글거리는 것들 위로 몸을 던졌다. 계산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망가졌다. 종수의 몸도.

땅에 처박히듯 구른다. 주변의 것들은 이미 초토화 되어있었다. 종수가 손을 앞으로 뻗으면 날카로운 흐름이 남은 모든 것을 찢는다. 그 흐름이 뻗은 팔을 지나가며 살을 난자한다. 종수는 무감하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번 그런 짓을 반복하면 남는 것은 별로 없다. 그거 하나하나 잡는 것 까지 끝내면 종수는 천천히 제가 떨어졌던 근처로 돌아간다. 자기 자신의 몸도 부숴버리니 센터의 모두가 다는 위치추적기 따위도 없어 임무를 끝마치면 떨어진 자리 근처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데리러 올 것이다. 무전기 역시 부서지는 통에 종수는 그냥 기다린다. 이 시간이 가장 싫었다. 생각에 빠져들기 쉬우니까. 종수는 의식적으로 상호와 병찬과 함께 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마음을 안정시켜야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지었던 표정은 억지로 지운다. 상호가 환히 웃는 모습, 장난스럽게 히죽이는 병찬의 얼굴. 그런 것들을 생각해내다 보면 종수는 그저 웃었다. 그들이 저와 같은 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로도 충분했다. 병찬은 보나 마나 상호에게로 갔을 테니까. 상처를 준 건 저이니 병찬에게 길게 화를 내진 않겠지. 종수는 몸을 더 웅크린다.

한참 그러고 있으면 차 소리가 들렸다. ...차? 크리처가 자주 출몰하는 덕에 이 구역 근처에 차를 몰 곳은 없는데. 종수를 데리러 오는 것도 항상 헬기였다. 이상한 일에 종수가 고개를 든다. 저 앞에서 달려오는 오토바이가 보였다. 헬멧을 쓴 둘이 종수의 근처로 온다. 종수는 멍하게 깜박거리며 그 둘을 올려다보았다.

둘은 허겁지겁 내려 종수에게 다가왔다. 종수는 경계하지 않았다. 헬멧을 쓰고 있어도 누군지 알았다. 빨간 헬멧을 쓴 병찬이 종수의 목에 걸린 자폭장치를 움켜쥔다. 종수는 멍하게 상호를 쳐다보았다. 상호는 종수의 손을 잡아준다. 이 모든 것이 이상한데, 그것에 저항할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종수는 가만히 있었다. 병찬이 몇 번 자폭장치에 힘을 주자 그것이 반응한다. 죽는 건 안 무서운데, 가까이 있으면 큰일 날 것이 뻔해 종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같이 죽자고 왔어? 손 떼!"

"괜찮아 종수야. 가만히 있어... 내가 할 수 있어."

종수가 기겁하며 병찬을 치려고 했으나 금세 저지된다. 종수의 두 손을 상호가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헬멧을 벗고 저를 가만히 쳐다보는 상호의 눈길에 종수는 결국 순종한다.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랐으나 종수 역시 둘이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으니까. 그래서 이러려고 한다면...

이어 자폭장치가 발동된다. 병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병찬의 능력은 흐름을 조정하는 것. 흐름은 힘의 이동. 열이나 속도 따위도 모두 힘의 일종이다. 병찬은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 기어코 종수의 목에 있던 장치가 터진다. 그 순간 병찬은 터져 나오는 모든 힘을 흘려낸다. 짧은 찰나였고, 결국 다루지 못한 일부의 힘이 병찬의 한 손과 종수의 목덜미를 반쯤 찢어놓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종수는 눈을 깜빡이며 병찬을 올려다보았고 병찬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종수를 내려다보았다. 상호는 급하게 종수를 눕히고 옷을 벗긴다. 피가 철철 나는 목덜미에 소독약을 뿌리고 급하게 천을 둘렀다. 병찬의 손도 그런 처치를 한 뒤 상호는 종수의 위에 엎드린다. 가이딩을 하면 상처가 빨리 낫는다. 상호는 가장 효율 좋은 가이딩을 알았다. 종수는 그제야 둘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빨리 해결해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수는 어질거리는 것을 참고 상체를 세워 상호에게 입을 맞춘다.


셋의 처음이 크리쳐 시쳇더미 한 가운데 라는 것은 좀 웃긴 일이지만... 어쨌든 병찬의 손도 종수의 목덜미도 많이 괜찮아졌다. 적어도 피는 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다. 어느 정도 회복한 셋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급하게 위험지역에서 나온 셋은 근처의 병원에 들러 추가적인 처치를 마쳤고 금 한 무더기를 내놓은 뒤 그대로 뛰쳐나와 하늘을 날았다. 능력을 쓰면서 가이딩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셋 다 웃으면서 하늘을 난다. 목적지는 따로 없었다. 센터가 있는 이 나라만 아니면 됐으니까. 병찬이 받았던 돈도 종수가 받았던 돈도 모두 빼내어 이곳저곳 숨겨둔 지 오래다. 어디를 가서도 이 나라보단 잘 살 것이다. 적어도 셋이 있는 한.

"하하! 종수야. 너 이제 백수야. 네 돈 내가 다 빼서 내 걸로 넣었거든."

"그럼 니가 나 먹여 살려야지."

"아 어쩌지~ 우리 종수가 형이라고 불러주면 그러고 싶을지도~?"

"개소리하지 마. 누가 형이라고 부르면 친하냐고 꼽줘놓고."

"우리 친하잖아!"

"햄들 그만 싸워요!"

"싸우는 거 아냐."

"맞아~ 우리 항상 이렇게 놀았어."

즐거운 웃음소리가 섞인다.

"종수햄은 안 무서워요?"

"뭐가."

"이제 저희 셋이서 알아서 살아야 해요."

"어."

"말도 안 통할 테고 불법 입국자? 같은 거라 경찰한테 쫓길지도 몰라요."

"탈영병보다는 불법 입국자가 낫겠는데."

"나랑 종수가 있잖아. 걔들보다 우리가 더 셀 걸?"

"아! 사람 다치게 하면 안 된다니까!"

"다치게 안 해도 돼~"

"박병찬이 알아서 하겠지."

한참 하늘을 날아다니니 자연스레 한기가 느껴진다. 킁, 상호가 코를 훌쩍이자 손만 잡고 있던 둘이 다가와 상호를 꼭 껴안아 준다. 와중에 병찬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핀다고 여념이 없다. 이제 셋의 밑에는 바다만 펼쳐져 있었다. 상호가 없다면 바다를 다 건널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상호가 있으니까 걱정이 없었다. 가끔 병찬이 크게 내려와 바다 바로 위를 날기도 했다. 상호는 웃으며 손을 바닷물에 잠깐 담가보기도 했다.

땅을 밟는다. 완전한 이국땅. 혹시나 들킬까 인적이 없는 곳을 고르고 골랐다. 내려앉아 천천히 포장된 도로를 걷는다. 아마 평생 도망자 신세일 것이 뻔했는데, 그럼에도 셋은 기분이 좋았다. 종수도 병찬도 이제 원할 때에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능력을 실컷 써도 옆에는 상호가 있었다.

전세계 몇 없는 S급 센티넬 둘과 매칭률이 100%에 가까운 가이드다. 누가 우리를 막을까? 마냥 행복하진 않아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뒷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셋 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새로운 일상을 가꿔 나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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