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가 되었더니 전남친들이 선수로 있습니다만

상(뱅+쫑)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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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친이 주신 소재로 쓴 글입니다.


기상호 30살. XX공단 프로팀 코치.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말하자면 선수 치곤 28살의 빠른 은퇴를 하고 코칭 스태프 쪽으로 전향한 케이스다. 본인 자체의 기량은 나쁘지 않았으나 워낙 머리가 좋았어야지. 감독도 그렇고 다른 스태프들도 그렇고 지도자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라고 하도 권유를 하니 어쩌면 거기가 내 길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은퇴식을 하고 감독으로 전향했다. 사실 어느 정도 이렇게 될 것을 짐작했던지라 바쁜 프로 생활을 하면서 나름 코칭에 대해 배운 것도 있었고 자격증도 있었다. 뭐... 기상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프로에 있기 어려운 점도 있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시작은 광주의 고등학교. 지상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국에서 열 손가락 꼽아보라면 겨우 뽑는 고등학교에 신참 감독으로 들어갔다. 말씨도 다르고 28살이면 아직 어릴 때다. 기상호도 26살의 이현성을 어리다고 수군거렸으니 이쪽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그래도 교사로 삼을 롤모델이 있었고 머리도 있었다. 사회성은 프로 생활하면 강제로 길러야 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고, 특히 운동부는 어느 정도 군기가 잡혀있으니 다루는 건 쉬웠다.

사람을 키워보니 그것도 참 보람찬 일이다. 가끔 연락하던 고교 시절 감독님에게 조언도 듣고 지나온 프로팀 감독님들에게 조언도 듣고. 아이들을 유심히 지켜보기도 하면서 잘 도닥였다. 기상호가 취임한 지 4개월. 마치 지상고 때처럼 쌍용기에서 우승을 이뤄냈다. 아이들은 펑펑 울면서 기상호를 끌어안았고 기상호 또한 크게 웃었다. 이것도 내 천직이구나. 모두가 기뻐서 우는 사이에서 이 우승에 저 또한 이바지했음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1년이 지나니 다른 곳에서 러브콜이 왔다. 신참 감독이라 계약이 길지도 않았고 이제 저 없이도 굴러가는 꼴이었으며 혹시나 해 다른 감독님들에게 SOS를 치니 마침 감독 일 해보려는 새삥선수 하나 있대서 여기 고등학교 추천해주고 충청도 쪽 가봤다. 이번에도 강호라기엔 많이 부족한 아이들이었다. 강호는 무슨, 실상 예전 지상고와 거의 비슷했다. 그래도 선수는 좀 있어서 다행이었지. 잘 섞여 지내며 아이들을 다독여 1년 뒤 대통령기에 기어코 우승해냈다. 협회장기에선 4강, 쌍용기에선 준우승, 대통령기에선 우승. 이제 기상호의 이름은 꽤 날렸다.

또 러브콜이 온다. 이번엔 코치였다. 프로팀의 코치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아직 프로에선 감독 경험을 못 쌓았으니 나름의 노하우도 전수해주고 감독으로 키울 생각도 있다고 했다. 애들 키우는 재미도 있었는데 선수들 보살피는 재미도 있으려나. 이런 데에 겁이 없는 놈인지라 덥석 잡았다. 친분을 통해 소개 받은 거라 별 생각도 안 했다. 좀 오만함도 있었다. 내가 키워낸 애들이 얼마나 잘 컸는데. 이젠 감독도 아니고 코치니까 뭐. 선수들이야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고. 술 한 잔 주고받으며 덜컥 하겠다는 말 내뱉고선 그다음 날에 바로 사인했다.

계약을 하고서야 선수명단을 받았다. 원래 일 처리가 이러면 안 되는데 친분으로 인한 인수인계가 그 따위다. 신경 안 쓰고 받았다. 가나다순으로 정리된 이름 읽는데 앞에 '박병찬' 있었고 거의 맨 뒤에 '최종수' 있었다. 아뿔싸, 좆됐다... 친분이어도 선수명단 보고 나서 못 하겠다고 무마하는 건 웃긴 일이다. 기상호는 한참 명단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물었다.

"그... 좋은 선수들이 많네요."

"그쵸? 저희가 원래 강한 팀은 아닌데 이번에 운 좋게 좋은 선수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코치님이 도와주시면 우승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해맑게 말하는 사람에게... 전남친들이 있어서 계약을 무르고 싶다는 말은 못했다. 담담하게 말했어도 못 할 말이다. 기상호는 서류로 얼굴을 가리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하하... 웃으며 그냥 잘 부탁한다고 악수나 했다.


직접 농구를 포기한 것은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주요 원인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프로로 뛰는 사람 중에 전남친들이 있다는 것. 박병찬과 최종수가 기상호의 전남친들이다. 전애인이라고 해도 좋게 헤어지면 문제가 없다. 더럽게 헤어졌다. 100% 기상호의 과실이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떠난 건 아니어도 떠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내심 안심했다. 술 마시기 전에 명단부터 달라고 해야 했었는데... 본격적인 프로 계약은 처음이라 너무 날치기로 했다.

100% 기상호 과실은 무엇이냐. 몇 년의 짝사랑 시절을 건너 겨우 박병찬이랑 사귄 것 까진 좋았다. 근데 박병찬이 매일 걱정하던 게 있었는데 바로 기상호의 술버릇이다. 술만 먹으면 사람 분간을 잘하지 못했다.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사람 분간을 못했다. 제 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를 잘 못 알아봤다는 거다. 그래서 기상호는 나름 술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날은 기상호가 속한 구단이 승리한 날이었고 너무 기뻐서 한계까지 처마셨다.

자고 일어나니 자기 집인데 옆에 누가 있었다. 병찬햄이 나 데려다줬나? 하고 돌아보니 최종수다. 발도 못 빼게 온 몸이 얼룩덜룩하고 침대 밑엔 콘돔이 바로 못 셀 정도로 묶여서 떨어져 있었다. 기상호는 개 좆됐다고 생각했고 언제나처럼 병찬이 아침에 놀러 왔다가 그 꼴을 다 봤다. 박병찬은 그날 기상호 앞에선 안 하려고 했던 욕을 걸쭉하게 내뱉으며 대가리 몇 대 쳤고 기상호는 무력하게 처맞으며 죄송하다고 빌었다. 처맞으면서도 준수햄한테 배웠나 싶을 만큼 욕을 잘한다 싶더라. 기어코 둘은 헤어졌다. 박병찬은 다신 연락할 생각 말라며 갔고 기상호는 진짜 연락 안 했다. 또 화나게 할까 봐. 병찬 성격에 어차피 차단할 게 뻔하기도 했다.

그래서 최종수랑은 어떻게 됐느냐. 오해할 건 없었다. 기상호도 생각이 났다. 최종수를 박병찬이라고 착각하고 덮쳤다. 최종수도 나 박병찬 아니야 미친새끼야. 하면서 말렸는데 술에 취해서 못 알아들었다. 다만 박병찬과의 연애는 비밀연애여서, 최종수는 박병찬 불러대는 개새끼한테 마음이 있다고 그냥 얌전히 깔려줬다. 하... 최종수 잘못은 아니었다. 알았으면 그 성격에 대가리 후려쳐서라도 말렸을 테니까.

최종수한테 미안하다고 빌고 헤어졌는데 문제가 있었다. 최종수랑 왜 같이 잤겠나. 최종수가 왜 술 취한 기상호 옆에 있었겠나... 같은 구단이었다. 최종수랑 줄기차게 만났다. 실수라고 했지만 최종수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았고 최종수도 이제 기상호가 애인 없는 거 알았으니 천천히 다가왔다. 구단에 있으면서 이 사람도 참 좋은 사람이다 싶었기에 기상호는... 뭐 별수 있나. 그냥 홀라당 넘어갔다.

그럼 최종수와 기상호 사이의 기상호 100% 과실은 무엇이냐? 5년 짝사랑하고 사귀었는데 그게 한 번에 잊혀지지가 않았다. 고의가 아닌 자신의 잘못 탓에 미련도 덕지덕지 남았다. 최종수도 그걸 알았다. 그래도 기다려주려고 노력했는데 기상호가 존나게 못 잊으니까 최종수의 인내심도 바닥 났다. 기상호도 문제가 있었다. 못 잊을 거면 최종수를 포기해야 했는데 최종수도 자주 보고 자기한테 잘 대해주는 거 보고 홀라당 넘어가서 마음을 줬다. 개미친새끼답게 최종수도 포기를 못하겠었다. 기어코 최종수는 으르렁거리며 기상호에게 헤어짐을 선고했다. 개미친새끼여도 마지막 남은 염치는 있어서 잡지는 못했다.

기상호도 솔직히 자기가 개등신머저리새끼라고 생각은 했다. 술에 취했다지만 애인 놔두고 남이랑 잔 것도 미친 새끼고 그렇게 차인 전애인 못 잊어서 새로 사귄 애인 맘고생 시킨 것도 개자식이다. 농구를 포기할 이유는 안 되었지만 프로를 떠났을 때 맘 편해진 이유는 됐다. 근데 이제 그 전남친들을 선수로 다시 만나야 했다. 이래서 인생을 꼼꼼히 살아야 하는 건데... 하지만 벌써 일은 일어났다. 씨발... 상호는 사회인으로서 약속을 이행해야 했다.

그래서 출근 첫날. 선배 코치가 기상호 이름 알려주니까 다들 이름 알더라고 말해주는 거 듣고 그냥 죽고 싶었다. ㅋㅋ. ㅅㅂ... 신임 코치 왔다고 선수들 모다놓고 인사시켜주더라. 그 사이에 서 있는 전남친들 쪽은 쳐다도 못 보고 허공이나 봤다. 새로 오신 기상호 코치님입니다. 다들 박수 쳐줬다. 와중에 선수들과 잘 지내라며 악수 한 번씩 하라길래 그런 거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싶었는데 차마 그렇게는 못 말하고 하하... 웃으며 그냥 선수들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둘이 한 쪽에 몰려있길래 최대한 피하고 싶어서 반대쪽부터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인사 계속하다 보면 미루고 미룬 숙제가 다가온다. 박병찬 앞에 선 기상호는 차마 고개를 못 들고 그의 가슴팍만 빤히 쳐다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코치님."

기상호는 알았다. 박병찬이 진짜 이 악물고 말했다는 거. 악수를 해야 하나 싶어 덜덜 떠는 손 애매하게 내밀었는데 박병찬이 잡아채듯 악수했다. 악수? 였나. 악력 체크였을 수도. 얼얼한 손 티 안 내고 느릿하게 넘어갔다. 인사 몇 번 더 하면 최종수다. 최종수는 예전부터 감정 숨기는 건 더럽게 못했다. 지금도 걍 죽여버리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선수 앞에서 눈을 깔수는 없으니까 흐린 눈으로 최종수 고개 너머나 봤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

최종수는 답도 안 해줬다. 더러운 거 만진다는 듯이 손 살짝 잡고 휘적거리고 놔줬다. 기상호는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어쨌든 고비는 넘겨서 그다음 선수들에겐 그럭저럭 웃어줄 수 있었다.

인사 다 끝나면 바로 인수인계다. 선수들 놔두고 프로팀 코치들 뭐 하고 사는지 배웠다. 고등학교랑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확히는 세세한 정도가. 선수들 훈련 사이클 같은 거 다 체크하고 몸 컨디션 체크하는 법도 배우고 지금 팀에서 유효하게 쓰는 전술 같은 것도 배웠다. 일주일 정도는 인수인계 하느라 바빠서 선수들하고 마주하지도 못했는데 차라리 그게 다행이다 싶었다.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게 구라는 아니었는지 감독은 기상호를 옆에서 데리고 다니며 사람보는 방법 같은 걸 가르쳐줬다. 그건 기상호도 할 줄 아는 거지만 얌전히 들었다. 그리고서는 갓 들어온 신인 선수 몇 명 맡길테니 한 번 봐달라고 했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코치도 도울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뭐, 신참코치한테 냅다 팀의 귀한 몸을 맡겨줄리는 없지. 기상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맡겨준 선수들 중점으로 봐줬다. 장점이나 단점같은 거 파악하고 문제점 지적 후에 어떻게 고치면 될지 같은 걸 샅샅히 찾았다. 선수 하나 붙잡고 거의 뭐 발표를 했다. 하고나선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지도 체크했다. 기상호가 전담 마크하니 점점 실력이 늘었다. 전남친들이고 뭐고 잘 자라는 어린 선수-기상호랑 박병찬만큼도 나이 차이 안 났지만 여튼-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남의 재능을 꽃피워내는 것 역시 보람찬 일이다. 언제쯤 주전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긴장하던 이가 점점 기대를 가지는 걸 보니 좋았다. 이현성 감독님이 무슨 맛으로 저흴 키웠는지 알겠더라. 몇 달 지나고서는 자주 연습경기에도 불리는 걸 보면서 기상호는 뿌듯했다. 내 사람 키우는 재능 끝내주네~ 싶었다.

기상호가 일을 생각보다 훨씬 잘해내니 맡는 선수들도 급이 올랐다. 이건 좀 재미없었다. 이미 잘하는 선수들이야 기상호가 아니더라도 잘 받아먹는데. 기상호는 아직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를 돌보는 걸 좋아했다. 근데 뭐 어떡하나. 까라면 까야지. 어쨌든 기상호는 일을 열심히 했다.

전담 코치가 있다고 해도 일단 코치들은 선수들을 모두 유심히 보는 게 당연하다. 기상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눈이 좋았다. 어느 날은 병찬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아 훈련 메뉴 몇 개를 변경했고 어느날은 최종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메뉴 몇 개를 빼고 빠른 휴식을 하도록 전담 코치에게 권유했다. 기상호의 그런 일은 그 둘에게만 향하는 특별이 아니었다. 그냥 코치로서 일을 열심히 한거지. 물론 사심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전남친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최종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주 눈길이 갔다. 그야 헤어질 때도 박병찬 못 놓는 주제에 저도 못 놓는 꼴 보고 혹시나 하고 질질 끌다가 겨우 결심해서 끊었으니까. 그러고서도 그냥 모른 척 할 걸 그랬을까 좀 후회했다. 프로 그만 뒀다길래 이제 볼 일 없겠구나 싶어서 쓰린 맘 달래며 슛연습이나 뒤지게 했더니, 저새끼는 우리 있는 거 모르고 들어왔나?(그렇다) 아님 뭐 나랑 존나 별 거 아니라서 신경도 안 쓰나? 잘못해놓고 왜 고개를 빳빳이 들지? 보기 싫게 눈 마주치면 왜 냅다 바닥이나 보냐고. 최종수는 자신이 너무 구질거리는 것 같아 홧병이 날 것 같았다.

박병찬이라고 속이 멀쩡한 것은 아니다. 박병찬도 기상호를 사랑하니까 사귀었지. 지 침대에서 남이랑 뒹군 꼴 발견했을 때야 열이 뻗쳐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몇 대 때렸지만 좀 가라앉고 나니 기상호가 엉엉 울며 자초지종 설명하면 들어줄 용의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 용서해줄 마음도 있었다. 근데 기상호는 말을 안 했고 며칠 뒤에 보니 최종수랑 사귄다고 소문이 퍼지더라. 씨발... 이게 환승인가 싶었다. 그 뒤로 인간을 못 믿겠어서 썸 분위기가 나던말던 죽어도 연인을 사귀진 않았다. 이 구단에서 최종수 마주쳤을 때도 좀 좆같았는데 헤어졌대서 솔직히 속으로 좀 통쾌했다. 그래놓고 프로 그만뒀다고 해서 먼저 연락할지말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제 자기한테 별 맘 없을까봐 두려워서 결국 연락 못 했다. 근데 여기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보니까 눈치는 보는 것 같은데 진짜 왜 온거야. 미쳤나 싶었다. 이제 다 옛날일 취급하고 싶었나보지. 저는 지 땜에 평생 애인도 못 사귀게 생겼는데.

그리고 기상호는... 걍 죽고 싶었다. 자기한테 선 긋고 진짜 코치로만 대하며 경우에 따라 차갑게 구는 박병찬을 보니까 괜히 좀 서운하고 서러웠는데 솔직히 자기 같아도 저럴 것 같아서 티는 안 내려고 하면서 최대한 마음 덜어내고 대했다. 최종수는... 자주 시선은 마주했지만 병찬에 대한 마음 때문에 헤어졌는데 이런 상황에 말 거는 건 진짜 개새끼 같아서 말을 못 걸었다. 그래도 이정도면 버틸만 한 것 같기도... 그냥 꾸준히 할 일 하자. 관계 개선은 애진작에 포기했다. 그냥... 돈이나 벌고 실력 좀 키우고... 그러다 어디 또 스카웃 될 수도 있고. 기상호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될 인생이었으면 아마 이렇게까지 구제불능 십새끼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상호를 개자식으로 만든 이유야 많겠지만 그 중 최고의 어시스트를 뽑자면 당연히 술이었다. 술 처먹고 그 지랄이 났으니까! 그래서 그 뒤로 상호는 자기 주량 이상 처먹는 짓은 안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회생활하면서 그게 되나? 심지어 상호는 신입인데? 이번 구단 감독님은 술로 우정을 다지시는 분이었다. 처음 친분 들먹이며 술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래서 상호는 마셨다.

일어났을 때 낯선 천장인 것 까지야 그러려니지. 근데 양 옆에 사람이 있고 그게 박병찬 최종수였을 때, 그리고 아무리봐도 함 뜬 흔적이 있는 걸 확인하곤 슬쩍 일어나 창문을 열어봤다. 혹시 떨어지면 죽을 수 있나 싶어서. 아닌 거 같아서 노골적인 흔적들 최대한 치운 뒤 급하게 몸 씻고 튀려고 했다. 근데 둘이 진짜 곤히 잠든데다가 지도앱 켜보니까 훈련장에서도 좀 멀어서 지금 안 일어나면 좀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헤어진 전남친들과 3P상황 받아들이고 늦지 말라며 깨워주기 VS 나발이고 당장 도망가기. 압도적으로 후자가 끌렸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찔려서 결국 기상호는 숨 흡 참고 둘을 깨웠다.

"병찬햄, 종수햄. 일어나보세요... 햄들..."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해도 둘 다 워낙 예민한 사람들이라 금방 깼다. 상황파악을 하는 듯 멍한 얼굴들이 상황파악 끝났는지 경악으로 물드는 걸 보고 기상호는 다시 죽고 싶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빨리 준비 안 하시면 늦으실지도 몰라요... 고작 이 한마디 내뱉고 튀었다. 최소한의... 뭐시기는 했겠지 싶었다. 어차피 돈 많은 사람들이니 기억 안나는 모텔비나 택시비는 신경 안 쓰고 도망갔다.

둘은 다행히 늦진 않았다. 멀끔한 얼굴로 와서 평소대로 훈련했다. 근데 둘 다 정신 좀 놓은 것 같아서 훈련 메뉴 한두 개 빼달라고 슬쩍 건의했다. 기상호의 말은 이제 다들 좀 믿어주는 편이라 그래줄 것이다. 기억상 진짜 존나게 오래해서 아무리 박병찬과 최종수라도 꽤 피곤할 것이 분명했다. 씨발... 심장마비는 안 오나... 기상호는 저승사자가 행차하길 간절히 바랐다.

없는 일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 기대는 선수들 씻으러 가는 거 확인하면서 슬슬 집 갈 준비하는 기상호 어깨를 양 쪽에서 잡아오는 순간 깨졌다. 기상호는 차마 뒤도 못 돌아봤는데 친히 둘이서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주며 옆에 섰다. 농구한다고 악력도 센 사람들이 어깨를 틀어쥐는데 이 상태로 팔을 뽑으려고 그러나 싶었다. 덜덜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니까 둘이 같이 말을 걸어온다.

"상호야."

"기상호."

"ㄴ,넵."

"우리 할 말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

"...넵..."


왜 술집에서 보자고 한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산만한 남정네 셋이서 삼겹살에 소주나오는 고깃집 테이블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았다. 병찬이 고기를 시켰고 종수가 술을 시켰다. 잔 세 개 나눠가지고 따라주기에 기상호는 손 덜덜 떨면서 받아마셨다. 병찬이 고기를 구워 내밀면 그것도 받아먹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면 이제 두려움이 슬슬 가라앉고 부은 간땡이가 고개를 든다. 솔직히 처음엔 끌려가서 전처럼 대가리 처맞고 경멸 좀 받고 할 줄 알았는데 전남친 둘이서 자꾸 기상호를 먹이고 있었다. 최종수는 기상호가 좋아하는 반찬 골라서 밀어주더라. 기상호는 영문을 모르고 계속 받아먹었다.

계속 처먹고 있을 수는 없어서 한참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저, 어제 기억 나세요?"

지옥같은 침묵. 둘 다 기억이 난다는 것을 비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내는 걸 보며 기상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기상호도 생각났다. 또 술에 취한 저를 어쩌나 하다가 병찬이랑 종수가 같이 일어나서 데려다주려고 했고, 결국 모텔에 집어넣는 걸로 합의를 했는데 술 취해서 눈에 뵈는 것 없는 미친새끼가 둘 다 너무 좋다고 들러붙었다. 병찬은 그냥 두고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미련 철철 남았던 종수가 박병찬 흘끔 보더니 너 먼저 들어가라고 하는 꼴 보고 열 뻗쳐서 셋이서 했다. 미인 둘이서 제 밑에 누워 우니까 좋다고 헤벌쭉 했던 제 꼴 생생히 기억나서 걍 죽고 싶었다. 아니 근데 중간에 정신 반쯤 나간 둘이서 키스하는 거 지켜보는 건 개 꼴렸는데. 기상호는 급하게 자기 대가리 한 대 쳤다.

갑작스러운 기행에 깜짝 놀란 눈으로 보는 둘을 볼 낯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근데 그게 기억 나면 대체 왜 끌고 온거지? 기상호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둘을 흘끔거렸다. 그 와중에도 종수는 술을 따라주다가 기상호 좋아하는 반찬 떨어지니까 리필 부탁하고 병찬은 계속 고기를 구워서 앞접시에 덜어줬다. 이게 뭐지? 잘 먹여놓고 처잘 때 찌를 생각인가? 처먹고 뒤진 귀신은 때깔도 곱다?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도 상호는 잘 받아먹었다. 기어코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병찬이다.

"상호야."

"넵."

"얘한테 뭐 자초지종 들었어. 너 고의 아닌 거 알았고. 물론 그렇다고 다 용서되는 건 아닌 거 알지?"

"넵... 당연하죠..."

"어쨌든 우리 둘이 대화를 좀 해봤는데 말이야."

"네."

"너 아직 우리 둘한테 미련있잖아."

"... ... ...ㄱ, 글...쵸?"

"한 명 고르면 나머지 한 명이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어. 어쩔래?"

기상호는 눈을 끔벅였다. 에? 내가 들은 거 맞아? 진짜? 이렇게 자비로운 처사를 내린다고? 기상호는 자신의 행동을 미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거진 적선과 같아보이는 이 기회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병찬햄도 종수햄도 내 생각보다 나를 엄청 사랑했던걸까...? 이, 이렇게까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으나... 기상호도 이제 어른이다. 아니 뭐 어른은 진작이었고 개짓거리 한 것도 어른 시절이긴 했는데 하여튼 전보다 대가리가 조금은 멀쩡했다는 뜻이다. 입맛을 다시고 있다가 그냥 제 목덜미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엄, 기회 주신 거 진짜 감사해요. 제가 저지른 일 아는데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 엄청 신경써주신 결과인 거 알아요... 근데... 저 솔직히 아직 결정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저 같은 쓰레기는 두 분 다 깔끔하게 잊고 새 출발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한테 대기엔 너무 아까운 분들이잖아요."

말 잘 했다 기상호! 솔직히 이 능력 출중하며 끝내주는 미남 둘을 저같은 쓰레기 하나에 메어놓는 것도 국가적 손실이었다. 사랑은 하지... 근데 기상호는 자기가 적어도 이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사랑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 거 알았다. 아직까지 둘 다 너무 좋았다. 박병찬은 다정하면서도 애같은 점이 좋았고 최종수는 섬세하면서도 생각보다 저를 많이, 제 자신보다 더 저를 사랑해주는 것이 좋았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데 용기있으면서 욕심까지 많으면 보통 악역이더라고. 둘한테 악역애인은 진짜 안 어울렸다.

그래서 기상호는 조금 허탈하게 웃으면서 술 한 잔 더 마시고 고기 한 점 더 먹었다. 둘의 얼굴을 살피니 병찬은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고 종수는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보다가 가만히 있는 병찬이 쥐고 있던 집게 가져가서 이제 상호 지가 굽는다. 중간중간 술잔도 채워줬다. 병찬은 채워주는 대로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던 와중 종수가 똑바르게 쳐다보며 말한다.

"난 너 아님 안 돼."

"엇..."

"박병찬 못 잊는 거 용서해줄게. 셋이 사귀어도 돼. 나랑 다시 사귀자."

종수의 폭탄 발언에 상호도 병찬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상호는... 솔직히 그게 뭔 소리예요 햄. 싶었지만 한 편으론 그렇게까지 자길 좋아한다는 게 좀 기분이 좋았다. 종수햄은 정말 언제나 나한테 져줬지. 지금도 제가 자길 포기하려니까 잡고 싶어서 져주려는 게 뻔했다. 종수햄... 상호 눈깔이 멜로 눈깔 된다.

상호의 눈이 종수에게 꽂히자 병찬은 갈등한다. 아니 시발 저게 무슨 말이야... 연인이란 건 상호독점적인 관계잖아. 한 명이어야 하잖아? 쟨 진짜 쟤가 지좋다고 헤벌레 거리다가도 나 좋다고 히히덕거리는 걸 넘길 수 있나? 근데 그 한 자리에 종수가 들어가는 거 생각하니 죽도록 싫었다. 아예 타인이면 모를까 자기는 기상호랑 결국 아무것도 아닌데 최종수는 애인 타이틀 가지고 둘이서 이것저것 하는 거 상상만 해도 홧병 날 것 같았다. 적어도 쟨 안 돼. 근데 여기서 병찬이 빼면 백프로 저 새끼 넘어간다.

병찬은 긴 고뇌를 마치고 욕지거리를 참으며 꾸역꾸역 말했다.

"... ... 난 용서는 못하고, 셋이 사귀는 것도 싫, 은데. 상호 네가 정 못 고르겠으면... 셋이 사귀어. 대신 월수금은 나, 화목토는 쟤. 이렇게 하는거야. 어? 하다못해 공평하게."

상호는 이 급진적인 대화에 끼지 못했고 종수랑 병찬이라고 갑자기 존나게 급진적이게 변하진 않았지만 일단 머리속에 넣어보려고 노력했다. 둘은 좀 현타도 왔다. 기상호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예쁜 아내 하나 붙잡고 결혼해도 될 좋은 조건의 청년들이 제 앞의 일견 멍청해보이는 어린 코치에게 반한 게 같잖아서... 그 마저도 당당하게 선택 당한 게 아니라 양다리 제안을 했다는 게 좀... 웃겼다. 어이없어서. 근데 어떡해... 코 꿰였는데. 차라리 타인이면 모를까 옆에 앉은 전남친의 전남친이 앞에 앉은 전남친 혼자 독차지하는 건 못 봐주겠다. 이 꼴도 웃겨서 둘은 그냥 울고 싶었다. 급하다고 몸값을 원가보다 더 깎아서 매매했다. 근데 시발 어쩔 수 있나. 안 팔리면 그렇게라도 팔아넘겨야했다. 당장 아쉬운 건 자기들이었으니까.

상황파악이 끝난 기상호는 잠깐 지 머리카락 쥐어잡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햄들. 제가 뭐라고요. 그렇게까지 해야할까요??"

"그럼 니가 한 명만 선택하든가."

"선택 못 하겠으니까 이런 똥차는 버리고 새 차 타시라니까요?"

"그게 됐으면 너랑 쟤랑 나랑 이러고 있겠어?"

"제가 대체 뭐라고요???"

병찬과 종수는 한숨을 쉰다. 진짜 깊은 한숨이었다. 그러게. 라는 답변을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 들리는 것 같아서 기상호는 고기나 마저 뒤접고 잘랐다. 머쓱하게 앞접시에 고기 덜어주려고 했는데 둘이 순간 기상호를 쳐다보길래 뭔가 좆될 것 같아서 그냥 둘 쪽으로 슬 밀어주기만 했다. 한참 침묵을 지키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종수다.

"그래서 싫어, 좋아, 이새끼야."

"아니 뭐 저야 완전 개이득이긴한데 햄들이 너무 개손해다 아니에요?"

"손해 감수하고 만나겠다고."

"아니 왜..."

"상호야."

"네."

"고르거나 거절할 거 아니면 입 닥치고 알겠다고 해."

"넵, 알겠습니다."

셋 다 입맛이 썼다. 그래서 셋은 술을 퍼부었다. 그렇게 정신 좀 셧다운 됐다 깨어나면 여전한 모텔 침대에 세 명이 잤다. 또 질펀한 밤을 보낸 것이다. 기상호는 예쁘게 잠든 미남 두 명을 깨우면서 생각했다. 햄들이 언젠가 나한테 질리면 깔끔하게 헤어져줘야지... 기상호 최고의 삽질 베스트 3이었다. 그야 둘은 이제 기상호 멱살 잡고 살아야하게 생겼으니까. 아마 기상호가 이런 생각하는 거 알았으면 이 새끼의 멱살과 머리채를 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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