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쫑

선생님

상호종수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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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교 2학년. 기상호는 모의고사를 대차게 말아먹었다. 정확히는 영어만 말아먹었다. 다른 과목들은 해왔던 대로 똑같았는데 영어는 꼬아놓은 지문 몇 개를 착각했던 모양이다. 근데 문제는 말아먹은 게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중학교부터 공부 머리가 좋다며 기대하시며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는 남들 보내는 만큼 안 보내도 만점을 받아오는 제 아들을 뿌듯해하셨는데 모의고사에서 영어 두 번 말아먹은 걸로 자신이 남들만큼 못 해줬다고 비탄에 잠기셨다. 그리고는 더 신경 쓰겠다며 과외선생님을 모셔 오겠다고 하는데 차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걍 실수한 건데 뭘 그렇게 신경 쓰냐고 할 수 없었던 효자 기상호는 얌전히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과외선생님을 모시고 다음 주부터 오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어머니는 제게 얼마나 어렵게 모신 분인지를 설명했다. 대충 들어보니 가르치는 애들이 많아서 정말 운 좋게 모실 수 있었고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아서 과외비가 웬만한 대학생들보다 두 배란다. 그 정도면 과외를 할 게 아니라 그냥 어디 강사로 취직하는 게 낫지 않나? 기상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제 아들을 위해 좋은 선생님을 모셨다고 뿌듯해하는 어머니의 기분을 망칠 생각은 없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과외선생님과의 첫 만남. 기상호는 제 선생 될 사람과 마주하는 순간 생각했다. 와, 사람이 진짜 무섭게 생겼네. 기상호도 첫인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제 앞의 사람은 더 그랬다. 앞머리는 묘하게 길어서 거의 눈을 가리고 있었고 안경은 그 와중에 바짝 올린 뿔테안경이었다. 하관을 보아하니 미남이긴 한데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는지 옷도 은근히 후줄근했다. 그리고 뭔가 사람이 좀 음침한 기운이 있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기상호도 덩치가 큰 편인데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자기도 모르게 그를 살핀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어머니가 팔을 툭 치며 눈치를 준다. 그제야 인사도 안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고개를 숙이자 그가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어머니께 어디서 하면 되는지를 묻는다. 방에서 단 둘이 하면 숨 막힐 것 같은데... 기상호는 급하게 말한다.

"거실에서 해요..."

그가 가만히 저를 쳐다본다. 보통은 방에서 한다고 하던데 기상호는 모르는 사람을 제 방에 들이기 싫었다. 좀 그런가? 뒤늦게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그가 먼저 저를 지나쳐 들어간다. 그 뒤를 가만히 쫓아가서, 이내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하고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준비해둔 문제집을 들고나와 그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불편하지 말라며 방으로 들어갔고, 그러면 남는 것은 둘이다. 잠깐의 침묵. 그는 손을 들어서 자신의 미간을 살살 문지른다. ...피곤한가?

"이름."

"...아, 기상호요."

"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는 학생만 가르쳐. 하다가 못 할 거 같으면 부모님에게 말해서 끊던가 해. 숙제를 안 해오거나 수업에 집중 안 하는 거 신경 안 써. 알았어?"

딱딱한 분위기는 질색인데. 역시 잘 가르치는 쌤들은 다 호랭인가... 기상호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삐죽인다. 아니 뭐... 일단 하는 거 보고 말하면 안 되나? 처음에 불편한 티 너무 내서 그런가? 그냥 성격이 저럴 수도... 어쨌든 아까도 인사를 씹었는데 이번에도 대답을 씹을 수는 없어서 상호는 얌전하게 대답한다.

"네. 알았어요."


저쪽은 싫으면 때려치우라고 했지만 우리 어머니께선 때려도 죄송합니다 하고 받으라고 했으니(실제로 맞으면 대경실색하실거라 서운하진 않았다) 아마 저쪽에서 못 가르치겠습니다. 하기 전까지 둘은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할 사이였다. 그리고 첫날의 걱정이 무색하게 둘은 별 마찰 없이 과외를 이어 나갔다. 일단 첫 번째로 기상호가 좋은 학생인 점 덕이다. 기상호는 안 그래 보이면서 꽤 성실한 타입이었고 미룰 때의 부담감을 더 싫어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다 해치우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요령은 있지만 해야 할 건 하는 타입. 게다가 기상호는 공부도 잘했다. 그냥 실수 몇 번 한 거지, 원래는 꽤 잘했다는 거다.

그리고 선생님도 생각보다 그리 무섭지 않았다. 첫날 놓았던 으름장만 들으면 숙제도 잔뜩 내주고 수업도 막 진행하면서 모른다고 말하면 왜 모르냐고 다그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숙제도 꾸준히 하면 하루에 두 시간 정도 투자하면 충분했고 수업 역시 진도가 급하지 않았으며 기상호가 조심스럽게 모른다고 말하면 이해할 때까지 침착하게 설명해줬다. 게다가 괜히 비싼 선생님이 아닌지 가르치는 게 진짜 기깔나더라고. 애초에 기상호가 이해 안 되게 가르치지도 않고 혹여나 생기면 설명을 너무 잘해서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주 정도 마주하면서 기상호는 깨닫는다. 이 사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구나. 이게 다 근거가 있었다. 기상호라고 매일 수업에 집중할 수 있겠나. 가끔은 잠이 부족해서 졸았고 어떨 때는 수행평가를 신경 쓰다가 숙제를 다 못 할 때도 있었다. 기상호는 드디어 그 호랑이 쌤이 화내거나 꼽주는 걸 보겠구나 하며 각오를 했는데 웬 걸. 못한 숙제는 잠깐 풀 시간을 줬고 졸다가 고개를 까닥거리니 오늘은 수업을 못 하겠다고 그냥 재웠다. 눈치 보여서 괜찮다고 했더니 어차피 그 정신에 공부해봤자 남는 거 없으니 잠이나 자라고 했다.

그런 게 쌓이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이 겁대가리가 없어진다. 물론 선생님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는 건 무서웠지만 가볍게 다가가는 건 할만해졌다. 그래서 기상호가 한 겁대가리 없는 짓의 처음은 언제나처럼 거실 테이블에 앉으려던 선생님의 손을 잡는 거였다. 선생님은 의아한 얼굴로 기상호를 쳐다봤고 기상호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어무이가 좀 들어가서 하라고 해가꼬... "

아니? 사실 어머니는 거실에서 하니까 안심되고 가끔 챙겨주기도 편하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모르겠지만 이건 기상호가 마음을 여는 신호였다. 꼴에 그걸 말하기가 부끄러워 빙 둘러 말했는데 선생님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과외는 기상호의 방에서 했다. 여태 어색함이 남아있던 선생님을 방 안에 들이니까 어쩐지 기상호는 마음의 벽이 더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기상호는 조금 더 기어올랐다. 수업을 하다가 뜬금없이 실없는 소리를 한다던가, 문제를 풀면서 시시콜콜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 그랬다. 생각보다 더 말랑한 선생님은 그것들에 모두 반응해주었다. 헛소리들은 대부분 집중하라며 일축했지만 제 얘기하는 건 가만히 들어줘서, 기상호는 어느 순간부터 그날 있었던 일이나 과외를 하지 않을 때 생겼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말했다. 아주 가끔은 작게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기상호는 그 얼굴이 생각보다 더 부드러워 또 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자주 마주치다 보면 상대방의 안색도 구분이 된다. 어느 날은 선생님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기상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쌤, 오늘 어디 아파요?"

"아니.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신경 쓰지 마."

"우째 신경을 안 쓴대요. 쌤 완전 죽을라카는데."

"안 죽어."

"...쌤, 어차피 오늘 복습이잖아요. 푸는 동안에 잠깐 자요."

선생님은 고개를 들어 기상호를 봤다. 기상호는 걱정하는 티가 나는 얼굴로 마주한다. 눈썹을 늘어트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는 거다. 같잖아 하는 얼굴이 선하지만 어지간히 피곤했던 건지 결국 선생님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상호는 혹시나 해 방문을 잠갔고 선생님은 그대로 제 침대에 누웠다. 안경을 벗어 침대 옆에 두는 것을 확인한다. 그대로 선생님은 눈을 감았고 기상호는 고개를 숙여 지정해준 문단을 풀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은 파트라서 푸는 건 빨랐다. 원래라면 숙제로 내준 단어 시험을 봐야 하는데 선생님은 어느새 깊게 잠든 건지 고른 숨을 내뱉으며 누워있었다. 기상호는 조심스럽게 기어 제 침대 옆에 앉는다. 마침 고개가 방 안쪽을 향하고 있어서 얼굴이 보였다. 다크서클이 역력한 얼굴은 조금 찌푸려져 있어서, 기상호는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님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얼굴을 똑바로 본 순간부터 생각한 거지만 선생님은 얼굴이 진짜 예뻤다. 잘생기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고. 제일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예쁘다였다. 선이 얇은 것도 아니고 모든 요소 하나하나는 진짜 잘생겼는데 모아놓으면 그저 예뻤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제 앞에서 자고 있으니까... 기상호는 어쩐지 그게 너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첫 만남 때는 상상도 못 했는데. 생긴 건 예민하게 생겨놓고 남의 집에서 남의 침대 위에 무방비하게 자는 게...

미쳤나? 기상호는 제 머릿속에서 떠오른 문장에 경악하며 입을 막는다. 단어 선택 무슨 일이야 진짜. 이게 무슨 뭔... 뭔데... 기상호는 뒤늦게서야 이 모든 장면이 가끔 심심할 때 보는 애니에서 나오는 두근두근 이벤트와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집에 놀러 온 상대방. 그러다가 졸려서 제 침대에서 잠을 자고 그걸 내려다보는 나... 물론 선생님은 일하러 온 거고 둘은 소꿉친구 내지 썸을 타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시작부터 틀렸지만 하여튼 결괏값은 비슷했다. 그러면 보통 이후엔... 기상호는 다시 제 입을 막는다.

상호는 한참 속으로 온갖 생각을 했고, 이어 한 행동은 단순했다. 휴대폰을 꺼냈고 깊게 잠든 선생님의 얼굴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났는데도 선생님은 깨지 않은 듯 평화로웠다. 맘 같아선 과외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재우고 싶었는데 반드시 한 시간이 지나면 깨워달라고 신신당부하던 게 생각이 났다. 재워봤자 별로 좋아할 성격도 아닌 것 같아서 상호는 선생님의 어깨를 쥐고 천천히 흔들어본다.

"쌤요. 쌤. 한 시간 됐어요."

눈꺼풀이 잘게 떨리다가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아직은 멍한 검은색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처럼 상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상호는 어쩐지 그 시선을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님은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상호는 벗어둔 안경을 집어 내밀었다. 몸부림 없이 조용히 잤음에도 부스스한 머리가 눈에 보인다. 삐친 머리가 보여서, 상호는 손을 뻗어 그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듬었다.

그러고나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선생님을 깨닫는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속이 뜨끔거렸다. 나 지금 뭐한 거지... 어색하게 손을 내리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생님을 따라 다시 책상에 앉았다. 잠이 덜 깬 눈이면서도 제가 푼 문제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에 괜히 힐끔거리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상호야."

"...네, 네?"

"목말라서 그런데 물 한 잔 가져다줄래."

잠긴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 상호는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물 한 잔 떠 놓은 뒤 바로 들어가지 않고 식탁에 앉아 잠깐 정신을 정돈한다. 이게 다 애니 때문이다... 아니었으면 그냥 과외선생님이랑 엄청 친해졌나보다 하면 되는데 애니에 별로 찌들지도 않은 뇌가 생각이 제멋대로 널뛰었다. 정신 차려 기상호! 이거 선생님께도 실례야! 하지만 쉽사리 진정되지가 않아서 기상호는 결국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다가 잔에 넣었다. 이런 거라도 해야 나름 변명이 될 거 같아서...

차가운 얼음물 들고 들어가니 이미 채점이 끝난 듯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한 번 더 권할까 하다가 만다. 대신 천천히 다가가 볼에 얼음물을 조심히 댄다. 예상대로 깨어있었는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저를 올려다보는 것에 웃는다.

"쌤 어제 뭐 했어요?"

"...과제."

"쌤도 결국 대학생이네요."

"그럼 내가 고등학생이냐."

다시 옆에 앉는다. 실없는 장난에 실없는 소리 좀 했더니 좀 진정됐다. 평소보다 더 잘 받아주는 게 좀 기쁘기도 했고. 어쨌든 더 쉴 생각은 없는지 미리 꺼내놓은 교재에 시선을 주는 것을 확인하고 저도 샤프를 들었다.

"상호야."

"네?"

"지우라곤 안 할 테니 너만 봐."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상호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2.

그래서 기상호는 어떻게 했는가? 진짜 자기만 봤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보게 될까봐 컴퓨터로 옮겨놓고 자기만 아는 구석 경로에 꼭꼭 숨겨놓은 뒤 해당 파일을 숨겨놓기까지 했다.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모른 척해줄 테니까 눈치껏 지우라는 말일 수도 있었는데 기상호는 곧이곧대로 들었다. 정말 자기만 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선생님은 별 다른 말이 없었고, 혹시나 해 긴장했지만 어머니 역시 별 말이 없으셨다. 며칠 후 과외 날에도 선생님은 여전한 태도로 기상호를 대했다. 실없는 소리를 하면 적당히 들어주다가 가끔 웃으면서 멀쩡하게 수업을 했다는 소리다.

상호는 생각한다. 한 번만 봐주는 걸까? 아니면, 이 정도는 괜찮은 걸까? 멀쩡한 사람이라면 괜히 지금의 평화를 흔들지 않았을 텐데 기상호는 흔들어보고 싶었다. 그때의 발언이 마지막 기회인 건지 아니면 저에게 내민 특별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상호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걸 알았다. 그야 당연하지. 과외선생님하고 친해지고 싶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건 그렇다 쳐. 수업하기 싫어서 재울 수도 있지. 근데 누가 자는 거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고 애니 상황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어? 남자 선생님이어서 망정이지 여자 선생님이었으면 무슨 오해를 받아도 안 이상했다. 아니, 남자 선생님이어도 온갖 오해를 받아도 안 이상했다.

상호는 이미 자신이 선을 넘어버린 걸 알았다. 그럼에도 거기서 쫓겨난 건지, 여전히 서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6월의 모의평가는 결과가 좋았다. 실상 실수를 하지 않았을 때와 점수가 똑같았지만 어쨌든 과외를 받고 나서의 결과이니 어머니는 선생님 덕이라며 선생님의 팔을 붙잡고 연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선생님은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하며 웃고 있었으나 거진 10분 동안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점점 지쳐가는 게 보였다. 안 그래도 다크서클이 진한 게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상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결국 선생님이 자신에게 살려달라는 듯이 시선을 보내는 것에 슬쩍 다가가 선생님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엄마, 내 공부해야 된다. 들어가도 되제?"

"내 정신 좀 보래이. 얼른 들어가라. 내 좀 이따 간식 가져다주께."

"됐다. 엄마가 그러는 동안 내가 방에 챙겨놨다. 문 잠가놓을 기다."

"머스마 성질도 급해가지고..."

꿍얼거리는 말을 못 들은 체 하며 선생님의 팔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오니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는다. 했던 말대로 어머니가 선생님 드린다고 챙겨놓은 간식 쟁반은 이미 들고 들어왔기 때문에 상호는 문을 잠갔다. 선생님의 시선이 짧게 문손잡이에 닿는다. 상호는 그 시선을 쫓아간다.

"쌤. 저..."

"알아. 네 어머님이 다 말씀해주셨잖아."

"그쵸?"

선생님과 상호는 약속을 하나 했다. 모의평가에서 틀린 문제가 없으면 그다음 날 과외는 쉬고 같이 영화나 한 편 보자는 약속. 상호가 먼저 내민 약속이었다. 선생님은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 그러라고 했고 상호는 당당히 만점을 받았다. 물론 당연히 놀러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영화는 상호 방에 있는 노트북으로 볼 예정이었다. 문을 잠근 이유는 그것이었다. 공부 잘 하고 있나 슬쩍 들어온 어머니에게 영화를 보면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되니까.

그래서 상호는 신난 얼굴로 세팅을 했다. 소파는 없지만 한국인답게 침대 밑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적당한 의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서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 앞에 챙겨둔 간식을 놓으면 준비는 끝이었다. 준비한 영화는 과외 시간에 딱 맞추어 1시간 반 짜리였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였다. 뭐 흔하게 처음엔 갈등 좀 가졌던 두 사람이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서로 웃고 사랑에 빠지고. 그러다가 결국 주변 사람의 축하를 받는 거. 다만 로맨스 요소보다는 코미디 요소가 더 많아서 가볍게 보기 좋다는 추천을 받았던. 사실 상호는 이 영화를 한 번 봤다. 선생님과 볼만한 영화인지를 따져보기 위해서. 적당히 재밌기도 하고 코미디치고는 그리 시끄럽지도 않아서 좋았다. 그래서 상호는 이 영화를 틀었다.

선생님은 초반에는 과자를 조금 집어먹으면서 가만히 영화에 집중하는 것 같더니, 이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다크서클이 짙더라니 아마 피곤한 것이 분명했다. 대학생 형이 있는 친구가 말해줬던 것을 기억한다. 이때 한창 대학생들이 기말기간이라 시험이나 과제 등으로 바쁘다고. 점점 선생님의 눈꺼풀이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영화는 이제 30분이 지나갔다. 선생님이 침대에 좀 더 몸을 기댄다.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고...

"상호야."

"...네, 네?"

"영화 안 봐?"

작게 웃는 소리. 선생님이 침대에 고개를 기댄다. 상호는 영화에 시선을 꽂는다. 영화에선 남자 주인공이 일하고 있는 여자 주인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탓에 영화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참 의미 없이 노트북의 화면만 보고 있다 문득 고른 숨소리를 깨달으면 다시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은 눈을 감고 침대에 완전히 기대어 자고 있었다. 매트리스에 눌린 볼이 선명하게 보인다. 상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어 영화를 멈춘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선생님을 가만히 쳐다봤다. 상호는 아주 천천히 선생님에게 몸을 붙였다. 손을 올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조심히 만져보고 이내 머리를 슬쩍 밀어본다. 제 어깨에 선생님의 머리를 기대게 만들었다. 별 다른 반항 없이 닿아오는 머리가 무겁다. 자세가 불편할까 봐 조금 고쳤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상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영화를 재생시켰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상호는 이렇게 자는 선생님을 보면서... 선생님이 좀 더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기대어놓았긴 했지만 바로 옆에 침대가 있는데 이왕 잘 거라면 침대 위에서 편히 자는 게 좋잖아. 하지만 선생님은 상호보다도 체격이 컸다. 낑낑거리며 침대에 올려놓으면 깰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서 상호는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영화가 끝나는 시간까지 쭉. 선생님은 그 동안 가끔 뒤척이기도 했으나 계속 상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상호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과외 시간은 이제 10여분 정도가 남았다. 선생님은 언제나 모든 시간을 쓰고 갈 준비를 했으니까 그걸 생각해보면 조금 더 이러고 있어도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상호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돌린다. 이번에도 선을 넘어보고자 했다. 상호는 선생님의 늘어진 손을 깍지 껴 잡는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고, 드러난 선생님의 볼에 느릿하게 입을 맞춘다.

상호는 잠든 사람의 반응을 안다. 선생님의 손을 잡는 순간 움찔거리던 짧은 반응을 느꼈다. 숨소리도 아까보다 조금 불규칙해졌다. 그 모든 것을 앎에도 상호는 입을 맞춘다. 부드러운 피부 결이 느껴졌다. 향수를 뿌리지 않는 선생님이건만 은은하게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바디워시나 샴푸 향인 걸까? 상호는 한참이나 입을 대고 있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선생님은 여전히 상호에게 기대어있었다.

상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놓았고 10분이 더 지난 뒤에 여상한 목소리로 선생님을 부른다.

"쌤, 쌤요. 영화 끝났는데요."

동시에 어깨를 잡고 작게 흔들어주면 선생님의 눈이 뜨인다. 아직 졸음에 잠긴 눈동자가 데굴 굴러 상호를 올려다봤다. 책망하는 기색도 없었으며 상호를 밀어내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 조차도. 그 순간 상호는 확신한다. 어쩔 수 없어서 상황을 넘어가고 싶은, 아직 어린아이니까. 라며 내밀어지는 관용이 아니다. 상호는 다시금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은 여전히 내치지 않았고 거절의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손을 빼낸다. 작은 하품, 이내 옷매무새를 다듬는 것에 상호는 얌전히 노트북을 덮고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선다. 그리고 선생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빼내어진 손이 그대로 올라와 상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공부 열심히 해."

"네, 네..."


언제나처럼 잠이 들기 위해 침대에 눕는다. 동시에 휴대폰을 켜 카톡으로 들어간다. 채팅방 목록에는 여러 채팅들이 올라와 있으나 상호는 익숙하게 메시지가 2만 떠 있는 카톡방으로 들어갔다. 최종수 선생님. 이라고 적힌 카톡방으로 들어가면 상호가 뭐하냐고 묻는 것에 공부 중이라고 답한 게 보였다.

[쌤. 저 숙제도 다하고 복습도 다 했어요.]

[(신난 강아지 이모티콘)]

그렇게 보내놓고 폰 게임 하나를 킨다. 적당히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답장이 왔다. 바로 눌러서 카톡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 자.]

[쌤은 뭐해요?]

[곧 자려고 누워있어.]

[쌤. 쌤. 저 9월에도 만점 받으면 영화봐요.]

[왜, 또 재우고 구경하려고?]

상호는 이게 좋았다. 선생님은 상호가 벌인 짓을 모르는 체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상호는 실실 웃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이번엔 손잡고 봐도 돼요?]

[까분다.]

[안 돼요?]

[그러던가.]

짦은 텀을 두고 답장이 도착한다. 상호는 속이 간질거렸다. 상호는 이제 자라고 보내는 카톡에 이불 덮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폰을 덮는다. 이렇게 좀 더 다가가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선생님은 아직 애한테는 너그러워서 다 받아주는 타입일 수도 있겠다. 과연 이 허락은 어떤 뜻일까. 그 기색을 보면 상호가 다가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러면 왜? 어리니까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아서?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것들을 받아주는 성격이라?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상호는 눈을 깜박인다. 이 허락이, 관용이, 다정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길 바란다. 상호는 이제 제가 어떤 마음인지를 알 것 같았다. 무섭기만 하던 선생님이 종종 보이던 친절과 배려가 꼭 저만을 위한 것 같아 반해버렸다. 그러고서 만약에 그렇지 않을까 봐, 누구에게나 주는 것일까 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저에게만 그 친절과 다정이 쏟아지기를 바랐다. 상호는 이제 그 바람이 허황된 것인지, 그저 어리숙한 자신이 멋대로 희망을 가지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뒤로 상호는 종종 가벼운 수작을 부렸다. 공부를 하면서 무언가를 묻는 척, 혹은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척 조금 더 붙었던 것이나 집에 오는 선생님을 맞이하는 척 다가가 은근슬쩍 팔짱을 끼는 것이 그랬다. 선생님은 꼭 그런 상호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 아무것도 아닌 양 제 할 일을 했다. 밀어내지 않는 것에 상호는 계속 수작을 부렸다.

시간이 지나고 9월 모의평가를 친다. 며칠 지나 받은 성적표에는 만점이 적혀있었다. 상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을 찍어 선생님에게 보냈다. 평소처럼 마저 수업을 듣고 나서 카톡을 확인하면 축하해. 라는 답장이 와있었다. 이다음 과외는 금요일에 있었다.

[쌤~ 금욜에 저 다음에 과외 있어요?]

[한 명 있어.]

[걔 먼저 하면 안 돼요?]

[왜.]

[저 이번엔 영화관에서 영화보고 싶어요.]

1이 사라졌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다. 상호는 가만히 보다가 짐을 챙겨서 일어난다.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이 반을 빠져나간 뒤였다. 희찬이가 다가와 점수를 묻는 것에 알려주니 부럽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 진동이 울리는 것에 폰을 다시 들어본다.

[그래.]

상호는 기뻐하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낸다. 그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희찬이 말했다.

"쌍호, 뭐 그리 신났는데?"

"으응- 영화 보기로 했다."

"누구랑?"

"쌤이랑."

"쌤? 쌤 누구?"

"과외쌤 있다."

"여자가?"

"아니?"

"에이..."

희찬이 실망하는 소리를 내는 것에 상호가 쳐다본다. 반응의 이유를 묻는 눈빛에 희찬이 작게 웃으며 답한다.

"아주 그냥 헤벌쭉한 게 썸이라도 타는 줄 알았다. 내는 그런데 편견 없으니까..."

"맞다."

"걱정... 뭐?"

"맞다고. 정확히는 내 혼자 치대는 거지만."

좋다고 실실 웃으며 어떤 영화를 볼지 이야기를 나누는 상호를 보고 희찬이 미친놈인가 싶은 시선을 보낸다. 그러다가 카톡을 들여다보니 정말 상호의 말마따나 상호의 일방 공세나 다름없는 것 보여서 희찬이는 그냥 얘가 또 뭐에 꽂혔나보다 싶어 넘겼다.



3.

교복을 입고 약속한 장소로 나가니 저 멀리 서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상호는 여기서 한 번 걸음을 멈춘다. 항상 집 안에서 마주한 선생님은 남의 집에 입고 가기엔 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선을 지키면서 조금 후줄근하면서 편한 옷을 입고 왔었다. 그 상태로 안경도 쓰고 머리도 은근히 길어서 눈을 가리고. 보면 후드에 캡 모자에... 가리려고 노력을 한 느낌이 났다. 그렇다고 잘생긴 게 숨겨지진 않지만 어쨌든 한 눈에 반할만치 맵시 있지도 않았는데 지금 저 멀리 서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웬일로 안경은 쓰지도 않았고 머리는 자른 건지 조금 짧아져 눈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안경도 쓰지 않은 상태로 검은색의 얇은 정장 재킷을 입고 안에 하얀 티를 받쳐 입은 뒤 슬랙스를 입은 선생님은? 진짜 끝장나게 깔쌈했다... 멋을 부린 것 같으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은 옷인데 그 잘난 얼굴이 여지없이 드러나니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상호는 반쯤 넋이 나가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다 먼저 발견하고서야 다시 발을 뗄 수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너무 멋지게 입고 나오셔서 쌤 아닌 줄 알았어요."

"자꾸 까분다."

잉잉... 상호가 우는 척을 하니 픽 웃은 선생님이 휴대폰을 꺼내어 예매 시간을 확인한다. 30분 정도 남아서 둘은 들어가서 먹을 팝콘을 샀다. 선생님은 상호에게 콜라를 하나 사주더니 자긴 생수 한 병을 샀다. 상호는 어쩐지 그 점도 너무 어른같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상영관 근처 의자에 앉아서 재잘거렸다.

"쌤 맨날 후줄근하게 오셔서 오늘도 그럴 줄 알았어요."

"왜, 실망했어?"

"에엥, 그럴 리가요. 쌤 오늘 진짜 멋진데."

"그래야지."

"쌤 오늘 일케 과외한 거예요?"

"아니, 왜?"

"아니이... 그야 이 전에 과외 있다고 하셨으니까, 걔도 지금 쌤 봤을까 봐 그렇죠."

상호는 뇌를 빼놓고 말하면서도 구석에 몰린 이성으로 자기 꼴이 좀 웃긴다고 생각했다. 만화에서도 이런 애들 많이 나왔잖아. 어른한테 한 눈에 반해가지고 되지도 않는 플러팅을 날리는. 비슷한 나이이면서도 그 꼴을 보며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그러고 있었다. 이제 이해가 됐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통제가 안 됐다. 이런 말을 하면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 표정이 너무 좋았다. 당장 제 말에 반응해주기 위해 짧게 시선을 주는 것 조차도 좋았고...

"화장실 안 다녀와도 돼?"

"저 아직 괜찮아요. 쌤은요?"

"나도. 그럼 슬슬 들어가자."

영화관에서는 나름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벤트가 있기 마련이었다. 사실 상호는 영화관에 오면 대부분 애니 극장판을 즐겨 봤으나 이번에 고른 것은 범죄와 추리 요소가 들어간 스릴러 영화였다. 남은 영화라곤 너무 노골적인 로맨스 영화, 아니면 청불 뿐이었으니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에 가깝다.

들어가면 당연하게 광고가 흘러나온다. 둘은 키가 아주 컸으므로 뒤쪽에 앉았다. 안경을 쓰고 다니던 것을 신경 써 선생님에게 물어봤더니.

"패션 안경인데."

라면서 씩 웃어서 심장에 한 대 맞은 상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바보같이 웃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서 광고를 좀 구경하며 팝콘을 주워 먹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호는 선생님을 계속 흘끔거렸고 선생님은 의자에 푹 기대어 흥미 없는 눈으로 가만히 앞만 쳐다봤다. 빤히 보고 있으면 왜 계속 보냐고 물어줄까? 전처럼 영화는 안 보냐고 해줄까. 상호는 선생님의 일이라면 뭐든지 궁금해서 계속 쳐다봤다. 어쩌면 그 이유조차도 핑계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한참을 쳐다보는데 선생님의 시선은 상호를 돌아볼 생각을 안 했다. 저를 봤으면 싶다가도 그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나쁘지 않아 상호는 계속, 계속 지켜보다가 결국 완전히 암전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을 알릴 때에나 고개를 돌렸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감상 따위를 남기고 싶으니까.

"상호야."

"네?"

"다 봤어?"

선생님은 상호가 하는 것을 모르는 체 하는 법이 없었다. 상호는 그게 꼭 허락인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시선을 돌렸고, 이제는 짓궂은 표정으로 웃으며 저를 마주하는 선생님을 본다. 이미 영화는 시작되어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상호는 당장 앞의 선생님만 쳐다봤다. 상호는 이미 서로의 사이에 있는 팔걸이에 선생님이 팔을 올려놓은 걸 알고 있었다. 상호는 마른침을 삼켰고, 이어 슬며시 선생님의 팔을 껴안듯이 팔짱을 끼었다. 선생님은 바람 빠지듯 웃었고 다시 고개를 돌려 영화 쪽을 쳐다본다. 상호 역시 그랬다.

상호는 가만히 영화에 시선을 주다가 팔짱을 낀 손을 움직여 천천히 선생님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선생님의 손은 어쩐지 손바닥이 위쪽에 있어서, 제가 손을 올리면 아주 쉽게 마주 잡을 수 있었다.


고3이 되고 나서 상호는 조금 더 바빠졌다. 크게 바빠진 건 아니고 공부 시간도, 숙제도 많아졌다. 부모님은 학원을 권유했지만 혼자 공부하는 게 더 잘된다는 말과 함께 여전한 성적으로 그것을 입증하자 더 권유하진 않았다. 과외는 여전히 했다. 이제 학년도 학년이라 전처럼 치대는 일은 적었지만 그래도 상호는 자주 선생님이 봐주는 선을 넘으려 들었고 선생님은 모르는 체 하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정해둔 선은 선명했다. 자연스럽게 옆에 몸을 붙이는 것도, 계속해서 관찰하는 것도, 은근슬쩍 만나자고 들이대는 것도 모두 받아주었지만 손을 잡는 것 이상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기상호가 포옹을 하는 것도 내버려 두었지만 마주 안아주지 않았다. 그런 걸 보다 보면 감이 온다. 이 이상은 절대 받아주지 않으시려는 거구나.

명확히 보이는 선은 굳이 넘지 않았다. 괜히 그것을 넘나들 만큼 대단한 이유도 없었으니까. 이대로도 충분했으므로 상호는 가만히 그 선이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마치고 수시까지 넣으면 한숨 돌린 것이다. 상향 세 개에 안정적으로 두 개. 하향으로 하나를 넣었다. 어쩐지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아서 상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려 부모님이 혹시 모른다며 걱정을 하기에 정시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며 달래주느라 진땀을 뺐다.

말마따나 혹시 모를 일이므로 상호는 여전히 공부를 했다. 과외 선생님이 너무 잘 가르쳐주셔서 계속 배우고 싶다 말한 덕에 과외 역시 계속했다. 듣자 하니 좀 더 매진하기 위해 학원을 끊는다던가, 혼자 릴랙스 하기 위해 과외를 끊은 애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상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흘끔 올려다보았고 선생님은 여전히 문제집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물어볼까 했으나 상호는 물러난다. 이제는 정신 빼놓고 다니면 안 됐다. 선생님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는 온전히 이 시간을 유지하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다. 상호는 정말로 학원보다는 자습을 선호하는 타입이었고 종종 안 풀리는 것에만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으면 됐으니까. 선생님 역시 학생이 자기한테 정신 팔려서 중요한 진로를 망치는 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닐 것 같아서, 상호는 공부에 집중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쌓여간다. 상호는 더 이상 선생님을 구태여 쳐다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야 뭐, 끝나고 실컷 보면 되니까. 그때라면 선생님도 더 이상 어린애로만 보진 않겠지. 어쩌면 조금 더 어른으로 봐줄 수도 있겠고. 그런 상상도 짧게 하고 다시 문제를 푼다.

수시 발표 기간이 가까워질수록 애들은 미쳐갔다. 고3이 제일 미친 놈들이라던데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희찬이도 요즘 들어 헛소리를 조금씩 했다. 물론 기상호의 마음에 남을 미친 놈들 만큼은 아니었고. 그 모든 지랄을 흘려넘기며 상호는 무심히 영어 단어장을 넘긴다.

시험일이 너무 몰려있어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과외를 멈췄다. 그래서 못 본 지가 대충 2주. 다다음 주면 수시 발표. 합격하면? 더 이상 과외를 할 명분은 없겠지. 부모님은 수시 결과를 보고 계속 과외를 할지 말지 정하자고 했고 상호는 알겠다고 했다.

합격해야겠지. 근데 더 볼 명분이 없으면 받아주려나. 이제까지 들여줬던 선은 정말 들여준 것이 맞나. 상호는 거품처럼 늘어나는 생각을 대충 떨궈버리고 다시금 영어단어를 외운다.

수시 발표 날. 상호는 호들갑 떠는 부모님을 뒤에 두고 노트북을 켰다. 오늘은 넣었던 학교 중에 상향 한 개를 뺀 나머지 학교의 발표가 나는 날이다. 그 한 개는 불합격 했으므로 부모님은 굉장히 불안에 떨고 계셨다. 상호는 일단 하향부터 확인했다. 곧이어 화면 정 가운데에 뜬 합격 표시를 보고 부모님은 일단 하나라도 합격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셨고 그것을 확인한 기상호는 착실히 다음 학교들을 확인했다. 안정권 두 개는 떨어졌고, 하나는 합격했고. 남은 건 상향 하나라.

상호는 마른침을 삼킨다. 사람마다 가장 중요한 걸 먼저 확인하는지, 가장 나중에 확인하는지 갈렸으나 상호는 후자였다. 다른 학교들은 몰라도 곧 확인 할 이 학교의 결과는 제게 아주 중요했다. 부모님 역시도 상호의 긴장을 눈치챈 듯 조용히 화면을 응시했다. 상호는 제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만약 이게 실패한다면, 글쎄...

상호가 생각에 잠겨있던 말던 손가락은 딸깍이며 홈페이지를 열고 합격자 확인 링크를 누른다. 익숙하게 수험번호를 치고 확인을 누르면 잠깐의 로딩. 그 동안에도 상호는 생각에 잠겨있었고 이내 화면에 뜨는 합격 표시를 보면 상호의 인지보다 부모님이 먼저 소리를 지르며 상호를 안았다. 상호는 눈을 끔벅이며 정 가운데의 합격 표시를 바라보았고 이어 선생님을 떠올린다. 타이밍 좋게 노트북 구석에서 카톡 메시지가 올라온다. 아직 로그인을 해두지 않아 메시지가 왔다는 것만 알리는 것이었기에 상호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어 제 카톡을 연다. 비번을 치고 들어가면 제일 위에 있는 카톡 방에 익숙한 저장 명이 보인다.

합격 했어?

상호는 제 입술을 꾹 물었다가 천천히, 화면을 꾹꾹 누르며 답한다.

네, 이제 제가 쌤 후배예요.


수능 최저등급까지 깔쌈하게 맞춘 기상호는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애초에 말릴 것도 없었지만. 천천히 준비해도 됐겠지만 좋은 방은 일찍 볼수록 좋은 법. 상호는 애매하게 먼 집 대신 통학을 하겠다고 했고 부모님은 이제까지 혼자서도 척척척 잘해온 아들을 믿었다. 오늘은 집을 보는 날이었는데, 상호는 낯선 대학로 사이에 서 있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환히 웃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선배님!"

"어쭈."

"왜애요~ 이제 선생님은 아니시잖아요."

애교있게 말하며 팔짱을 껴오는 것을 막지 않은 선생님은, 아니 선배님은 픽 웃으면서도 여전히 상호를 밀어내지 않았다. 상호는 그 사실에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자취방을 구하겠다 전했을 때는 상상도 못했지. 설마 선배님이 먼저 같이 집을 봐줄까 물을 줄은.

선배님은 인상답게 꼼꼼해서, 나름 상호도 이것저것 정보를 알아 오긴 했지만 처음이라 조금 어리바리한 상호 대신 집을 체크해주고 상태를 확인해줬다. 1시에 만났는데 집을 어지간히 다 둘러본 뒤에는 7시가 넘었다. 빨리 들어가야 하지 않냐는 말에 상호는 혀 끝으로 제 앞니를 꾹꾹 누르다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쌤 집에 놀러 가도 돼요?"

뻔히 수작이 보이는 말이었다. 그럴만하지. 상호는 선배님 앞에서 자제는 했을지언정 마음을 숨겨본 적은 없으니까. 선배님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가 그새 담담해진다. 바로 안 된다는 답변이 나오지 않는 것에 상호는 이것이 허락으로 이어질 것을 예감했다. 상호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그 상태로 눈을 크게 뜨며 괜히 순한 인상을 만들어 보였다. 그 수작에 선배님이 픽 웃어버리고 만다.

"발랑 까졌어."

"선배님한테만 이러는 걸요."

"그럼 누구한테 또 하게?"

"할 사람 없어요."

아양을 떨면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상호는 다가가서 슬쩍 손을 잡았고... 선배님은 그 손을 마주 꾹 잡아준다. 언제나 가만히 잡혀만 주던 사람이 마주 잡아주는 감각은 상호의 속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택시를 타야 할까, 싶었는데 계약하기로 했던 집에서 그대로 걸어가니 선배님의 집이 그리 멀지는 않았다. 뭐 그렇겠지. 듣기로는 통학을 한다고 했는데 같은 대학에 갈 사람들끼리 집이 멀어봤자 얼마나 멀겠나. 상호는 선배님이 공동현관 앞에서 비번을 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동안 얌전히 뒤를 따랐다.

부모님은 따로 산다지. 그래서 상호는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선배님에게 성큼 다가갔고 뒤를 돌아보던 선배님은 그대로 가까이 붙은 상호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뭘 하고 싶은 건지야 짐작했다지만 이렇게 냅다 다가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너무 가까이 붙은 탓에 서로의 숨이 느껴졌다. 상호는 머리가 팽팽 도는 기분을 경험한다.

"선배님."

"...왜?"

"해도 돼요?"

주어가 없는 말이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이미 행동으로 전해졌다. 선배님은 조금 얼굴을 붉혔고...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감았다. 허락과 다름없는 행동에 상호는 서툴게나마 입을 맞춘다. 입술이 서로 닿고, 살살 부비적거리다가 상호가 먼저 혀를 내어 아직도 다물린 입술을 느릿하게 할짝거렸다. 선배님은 그러는 동안에도 입을 닫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 허리에 팔을 두른다. 흠칫거리는 몸을 느끼며 상호는 고개를 좀 더 틀어 입술을 빈틈없이 맞췄다. 감긴 눈이 흐릿하게 뜨여서 상호의 눈과 마주한다. 그제야 입술이 열려서 상호는 천천히 혀를 내밀었다.

어쨌든 상호는 처음이었으니 선배님께서 우습게 봐도 어쩔 수 없겠거니 생각했는데... 상호는 적당히 주워들은 지식으로 천천히 입 안을 훑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어지간히 못하는데... 선배님은 그냥 굳으셨는데. 상호는 선배님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하나의 가설을 떠올린다.

"...선배님."

"...왜..."

"처음이에요?"

여유롭기만 했던 선배님의 일면을 발견한 상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선배님이 저를 어린애로만 보아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중 하나가 될 법한 연애의 경력도 똑같았던 모양이다. 상호는 입술을 꾹 물고 제 앞에서 시선을 내리 깐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귓가도 다 빨개진 모습이 상호는 너무 좋아서.

"...상호야."

"네."

"안 되겠다. 나... ... ... 너무 부끄러우니까 술 좀 마시자."

"술이요?"

"그래."

"아, 저 아직 술은."

"왜?"

"저 빠른이라..."

발랑까진 상호는 입술은 내밀어놓고선 술은 안 된다는 기이한 사고를 가졌다. 그도 그럴게 주변에선 숫기없고 어리숙한 상호가 술자리에서 뻗을 것만 걱정했기에 그 부분만 신신당부를 했거든. 그리고 상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팍하고 밀린다. 상호는 영문을 모르고 밀려났고 이어 새하얘진 안색으로 저를 쳐다보는 선배님의 얼굴을 마주한다. 경악과 배신감이 점철된 얼굴을 보며 상호는 뒤늦게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 ... ... ... ..."

"선배님, 잠깐..."

"아 씹..."

"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개자식아..."

망연자실한 표정 앞에서 기상호는 머쓱하게 제 뒷덜미를 만지작거린다.

"쌤. 아니... 선배님. 선배님 생일 12월 31일이람서요. 저희 실질적으로 2살 차이다 아니에요?"

"나이 차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아직 애인 게 문제잖아."

"그런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군... 사실 우기려면 더 우길 수 있었겠지만 제 앞의 선배님의 영혼이 약간 털려있는 게 보여서 상호는 얌전히 수긍했다. 선배님은 상호를 앞에 두고 이마를 짚은 채로 한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더니 뒤늦게 상호를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너는 아직 애면 내가 받아줘도 안 해야 할 거 아니야."

"전 선배님이 밀어내서 그렇지 언제나 이러고 싶었는데요."

"...너 진짜 발랑 까졌어."

"선배님한테만 그런다니까요."

상호가 다시 성큼 다가간다. 선배님은 눈가를 찌푸리며 상호를 막으려고 들었고 상호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상태에서 제 쪽으로 쭉 당기며 품으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포옹으로 끝날 놈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기에 상호는 샐쭉 웃으면서 손을 놓고 허리를 꾹 끌어안았다.

"그래서 1년 더 참으시겠다고요?"

"당연한 거 아니야?"

"저는 못 참을 거 같은데..."

"참아."

"선배님, 그러지 말고... 저 진짜 오늘만 기다렸단 말이에요."

"너만 그런 줄 알아?"

오. 이건 좀 셌다. 상호는 괜스레 제 입술을 한 번 더 꾹 물면서 킥킥 웃었다.

"제가 유리하게 굴어도 될까요?"

"...해봐."

"종수햄. 아직 선배님도 아니고 이제 선생님도 아니니까 건방지게 굴고 싶은데요."

"까불게?"

"네. 언제나처럼 받아주시면 안 되나요?"

휘어진 눈동자에 담긴 것은 약간의 장난기, 그리고 노골적인 욕망이라. 선배님은, 종수는 그 눈을 마주하며 혀뿌리가 아릿해질 만큼 들끓는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제가 강하면 강했지 제 앞의 맹랑한 꼬맹이는 그 마음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집에는 단 둘이고, 또...

"항상 저한테는 약하게 구셨잖아요. 이번에도 그래 주세요."

제 허리를 안아오고, 바지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제 피부를 문지르는 손길에 종수는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 상호가 다시 고개를 내민다. 입술이 맞닿고 종수는 이제 쉬이 입을 벌려주었다. 여전히 둘 다 서툴기 짝이 없는데 시선이 서로에게 떨어지지 않는다. 서툰 와중에도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식지를 않는다. 종수도 상호도 그게 기꺼웠다. 종수는 결국 이번에도 침묵한다. 상호는 이럴 때만 소극적인 그의 행동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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