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쫑

친구와 연인 그 사이

상호종수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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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종수가 대학에 갔다. 당연하다는 듯 유명한 명문대학을 골라갔단다. 그 대학을 다니는 일반인들에게도 소문이 났다. 유명 농구선수의 아들이 온대. 그 아들도 엄청 농구를 잘하는데 잘생겼대. 자연스럽게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화제의 인물이 되면 그다음 순서는 뻔하다. 그 이름값이 궁금해 찾아와보는 사람들. 정말 잘생긴 얼굴 덕에 오는 사람마다 감탄하고, 이내 그 얼굴로 또 유명세를 치렀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애인 없는 이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용기있는 누군가가 먼저 최종수에게 다가갔다. 대뜸 좋아하니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에 최종수는 별다른 말 없이 전화번호를 넘겨주었다. 그 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데이트라는 것을 하고. 의외로 최종수 쪽에서도 꽤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상대방의 일방적인 연애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연애는 길지 않았다. 2개월 남짓한 기간. 상대방은 그동안 맞춰줘서 고마웠다고. 너는 정말 착하구나. 그래도 나중엔 정말 좋아하는 사람 고백만 받아줘. 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 최종수는... 상대방이 완전히 떠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최종수는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연애에 관심이 없다고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최종수의 성향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뿐이었지.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최종수는 상대방을 정말로 사랑했다. 누구나 꿈꾸는 그런 정열적인 사랑은 아니었더라도, 잘하는 농구까지 미루며 매달리진 않았더라도.

그러나 최종수는 표현하는 법은 잘 몰랐기에 전해지지 않았다. 최종수는 떠나는 상대방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했는데 왜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는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잡지는 않았다. 이제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잡을 빌미가 없었기 때문에.

두 번째 연애는 참 지난했다. 또 다시 누군가가 고백했고 최종수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 전 연애를 발판 삼아 최종수는 많은 것을 물었다. 넌 왜 내가 좋아? 나랑 왜 사귀고 싶었어? 나랑 뭐 하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 네가 싫어하는 건? 전화하는 게 좋아, 카톡 하는 게 좋아? 등.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겠다. 최종수는 말했다.

상대방은 그런 최종수를 보며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하다 기분 좋게 웃으며 물어보는 모든 것을 답해주었다. 최종수는 그것을 잘 기억해두었다 필요할 때면 써먹었다. 가끔 상대방이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려고 하면서.

문제라면, 상대방에게 컨트롤 프릭 기질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최종수를 완벽히 통제하고 싶어 했다. 그 기저에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 유명한 미남을 자기 맘대로 다룰 수 있다는 저열한 과시였다.

상대방은 최종수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화를 냈다. 너 내가 어제 훈련 끝나고 바로 연락하라고 했잖아. 바로 안 했지. 내가 2시까진 전화하자고 했잖아. 먼저 잠들면 어떡해? 내가 이날은 여행 가고 싶다고 했잖아. 훈련 하루 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최종수는 그것을 맞춰주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했다. 정말 2시까지 전화를 하다가 좀 나았던 불면증이 다시 도지기도 했고 훈련이 끝나면 가장 먼저 휴대폰을 찾았고... 정말로 훈련을 하루 빠진 적도 있었다. 워낙 평소의 종수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특별히.

그러나 상대방은 그런 것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많은, 무리한 요구를 했다.

어느날 상대방은 최종수에게 헤어지자 말했다. 정말 헤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최종수를 완벽히 통제하고 싶어 주도권을 휘두르려던 셈이었다. 최종수는 우울한 낯짝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잡을 줄 알았는데, 잡지 않으니 상대방이 당황하며 되려 팔을 잡아 왔다. 언제나처럼 배려 없이 좋을 대로 틀어쥔 팔을 내려다보던 종수는 느릿하게 그 손을 떼어냈다.

너 나 사랑하잖아. 왜 안 잡아? 그리 묻는 것에 종수는 담담히 말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잖아. 헤어지고선 모든 연락처를 다 끊었다. 발악하듯 최종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잠시 퍼졌으나,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굴던 이라 금세 묻혔다. 최종수는 이때 마음을 많이 다쳤다.


그 후로 최종수는 정말 많은 연애를 했다. 모두가 고백을 받은 경우였다. 어떤 이들은 최종수를 트로피 삼고 싶어 했고 어떤 이들은 최종수에게 자신이 가진 환상을 투영했다. 어떤 이들은 최종수가 누구의 고백이든 다 받아준다는 소문에 재미 삼아 다가왔고 어떤 이들은 가볍게 다가와서는, 제 불안한 애착을 들어내며 저를 더 사랑해주길 종용했다.

정말 많은 연애였다. 그것은 최종수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최종수는 그 동안 그 많은 이들에게 제 마음을 한 자락씩 나눠주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소중히 여겨지지 못하고 구겨져 땅바닥에 버려지곤 했기에. 최종수는 뜯겨나간 빈 자리를 내려다보며... 아주 조금 탄식했다.


기상호는 사람을 꽤 좋아한다. 농구를 잘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 등. 호감 가는 면이 있으면 금세 다가가는 편이었다. 그게 성공률이 좋은지는 둘째치고...

기상호는 최종수에게도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의외로 연락을 하면 답장을 잘 해주는 타입이라 기상호는 최종수와의 연락이 꽤 재미있었다.

최종수는 종종 연애에서 일이 잘 안 풀리면 주위의 친구들에게 해답을 물어보곤 했는데, 어느 날은 그 리스트에 상호가 들어간 적이 있었다. 기상호는 최종수의 연애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흥미가 만땅이었다가 어디 갖다 버리고 싶은 행태들을 듣자 기겁하며 최종수의 편을 들었다. 종수햄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데 감히 그런 취급을 해요? 최종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필요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기상호는 꽤 오랫동안 최종수의 연애 상담을 해주게 되었다.

기상호는 연애는 잘 몰랐지만, 솔직히 이건 연애 상담이라기보단 그냥 상담에 가까웠다. 어떻게 이런 사람만 만나는지. 최종수가 만나는 연인들은 다 어디... 하자가 있거나 그냥 불량품, 아니 폐기물에 가까웠다. 최종수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어디 대나무숲에 올라왔을 건데. 감히!

기상호는 최종수가 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햄은 좀 더 좋은 사람한테, 잔뜩 사랑 받으실 자격이 있어요. 누구나 그래야 하고요. 저는 햄이 행복한 연애를 했음 좋겠어요. 최종수는 그 톡을 보고... 아주 조금 웃었다.


그리하여, 문제가 생겼다. 상호도 대학을 가고 난 뒤 최종수의 연애 상담은 톡에서 현실의 만남으로 옮겨갔다. 기상호와 최종수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박병찬과 성준수보다도 많이 만났다. 만나면 최종수는 항상 맛있는 맛집에 데려가 밥을 사줬고 기상호는 받아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어주었다.

그렇게 만남을 가지게 되면... 상호 같은 쉬운 놈들은 금방 넘어가기 마련이다. 제 앞에선 나름 표정이 바뀌는 최종수가 기껍기도 했고 이렇게 속 얘기를 들어주니 뭐라도 된 사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상호는 그렇게 허술하진 않았다. 친구 사이면 모를까, 연인 사이라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기상호는 아주 조심스럽게 돌다리를 두들겼다. 상담이 아닌 만남을 늘리고, 저도 맛집을 찾아보고, 그저 호의가득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것 같이.

그래서 문제가 무엇이냐. 최종수는 상대방이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랑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기상호의 개수작들은 최종수에게 있어서 그저 친구끼리의 끈끈한 우정 정도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최종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상호는 언제나 선을 지켰고 나름 재밌게 굴었고 제 앞에서 자주 웃으며 대단치 않은 사소한 요구를 하며 마찬가지로 제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최종수가 졸업을 하고, 들어간 프로 구단에 연애 금지 조항이 있는 것을 빌미로 모든 고백을 무마시키기 시작할 때. 기상호는 이때다! 하며 좀 더 다가가려고 했으나 최종수는 옆을 내어주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식하질 못했다.

결국에 최종수는 생각한다. 언제나 마음이 변하거나 애초에 없었던 가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연인을 만드느니 기상호처럼 잘 맞는 친구 하나가 딱 좋다고.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기상호가 알았으면 통곡할 일이었다.


2.

그 후로도 최종수와 기상호는 정말이지, 거의 베스트 프렌드 수준으로 붙어다녔다. 최종수에겐 베스트 프렌드가 맞았고 기상호에게는 짝남의 맘에 들기 위한 개수작질이라는 입장이 달랐으나 겉으로 보면 그랬다. 최종수는 기상호와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전처럼 억지로 시간을 빼지는 않았어도 시간이 남으면 바로 기상호에게 톡을 날렸다.

기상호는? 짝남이 보자면 나가야지. 미리 잡아놓은 약속이 없으면 좋다고 달려나갔다. 기상호는 예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기분을 맞출줄 알았다. 특히나 상대방이 제게 호감이 있다면 더욱 더. 이렇다 싶은 오락거리를 거의 접해보지 못한 최종수를 재미의 늪으로 빠트리는 건 정말 쉬웠다.

사귀고 싶은 것도 사귀고 싶은거지만, 상호의 최고 목표는 최종수가 이제까지 겪은 다사다난한 연애를 모두 잊어버렸으면 했다. 다 잊어버리고, 다시 연애를 하고 싶어지면 그 때 꼭 내가 먼저 고백해야지. 상호는 그렇게 남몰래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개같이 망했다. 최종수는 서서히 그 때의 기억들을 잊어갔으며 착실히 상호와의 추억으로 머리를 채워갔으나... 그건 친구와의 추억이었다. 그래. 친구. 연인과는 다른 것. 연애는 언젠가 헤어짐을 기약하지만 친구는 웬만해서 헤어짐을 기약하지 않는다.

기상호는 여전히 최고의 친구였고 기상호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재밌었기에 최종수는 급기야 기상호에게 말한다.

"나는... 네가 제일 마음이 편해. 앞으로 연애는 관심없고 영원히 친구하자."

기상호는 그 날 집으로 가서 눈물을 짰다. 아니에요 햄. 저는 햄이랑 친구로 끝내고 싶지 않다고요. 제가 이제까지 햄이 부르면 뛰어갔던 건 죄다 햄에게 잘보이고 싶어서라고요. 물론 제가 햄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어도 햄은 좋은 사람이니까 같이 놀고 웃었겠지만 일단 제 마음은 Love 였다고요!

하지만 기상호는 친구하자며 저를 부드럽게 쳐다보는 최종수의 얼굴이 너무나도 편해보였기에 도저히 말을 못했다. 저렇게 평화로운 얼굴에다가 대고 이제까지 내가 잘 해준 건 죄다 개수작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연애같은 건 이제 질리신다는데 거따대고 연애해요! 할만큼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 진짜 사랑했는데... 기상호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최종수를 포기해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사건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최종수에 대한 기상호의 Love는 천천히 깎아나가고 기상호에 대한 최종수의 Like는 점점 커져갈 때. 기상호가 먼저 최종수에게 카톡을 했다.

[햄햄. 저 오늘 먼 일 있었게요?]

[무슨 일 있었는데?]

[준향대 핫보이 기상호! 오늘 고백 받았다 아닙니까~]

이 때 최종수는 편히 쉬려고 쇼파에 앉아있었는데 벌떡 일어나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이게 무슨 톡이냐? 기상호가 되도 않는 질투작전을 쓴 건 아니었다. 기상호는 도최쿨미 성준수나 예쁘장하게 생긴 박병찬만큼은 아니어도 꽤 괜찮게 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성격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 길을 물어보면 친절히 대답해줄줄 알았고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에겐 그만큼 마음을 돌려주기도 한다.

게다가 원래 사람은 너무 잘생긴 사람보단 적당히 생겼지만 완전 미남까진 아닌 훈남에게 끌리기 십상이다. 자연히 기상호는 고백을 많이 받았다. 이번에 최종수에게 보낸 것은, 이제 사람들이 영 믿어주지 않으니 친한 최종수에게 저 이래뵈도 멋진 남자~ 하는 평범한 으쓱거림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종수는 그 말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 사실 친구도 안 변하는 건 아니지. 이규도 여친이 생기더니 머리를 점점 길렀고 수민이도 연락이 뜸해졌다. 연애를 하면 사람들이 바뀐다. 헤어지고서도 멀어진 거리를 좁히는 것은 운에 따른 것이라 수민이가 여친이랑 헤어지고서도 여전히 연락은 뜸했다. 

근데 내 베스트 프렌드 기상호까지 연애를 하면... 그럼 난 누구랑 놀아? 최종수는 급하게 카톡을 날렸다.

[왜?]

[아니 햄... 왜라뇨ㅠ]

[사겨?]

[아녀.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가지구.]

 최종수는 이 때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어떻게 나한테 안 말해줄 수 있는거지... 우리 친하다며. 이런 건 친한 친구에게 상담하는 거 아냐?

한 편으론 다른 식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여기서 네가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물론 최종수와 기상호가 메가베스트프렌드였어도 연인은 다른 카테고리다. 최종수와 친하게 지낸다고 연애를 못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최종수는 기상호에게 애인이 생기는 게 싫었다. 애인 생기면 이제 나랑 안 놀아줄 거 아니야. 애인이 생기면 더 많은 시간을 걔한테 쏟을 거 아냐. 연락도 뜸해질거고 나랑 밥도 같이 잘 안 먹고...

최종수는 여기까지 생각 한 뒤에 침착하게 자기 마음을 정리해보려고 했다. 최종수가 생각해도 이 마음은 좀 그랬다. 친구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집착하는 관계가 아니다. 특히 기상호는 자신에게 선을 잘 지켜줬으니 최종수 또한 그래야했다.

그래서 최종수는 1주일간 고민을 해봤는데, 저는 기상호에게 독점욕이 생긴 것 같았다.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3일 전에 기상호한테 시간 있냐고 카톡을 보냈는데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개 서운했기 때문에 확신이 들었다. 그 와중에 애인이 생기면 더 자주 그럴 것 아닌가. 최종수는 그게 정말 싫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느냐? 그건 또 답이 없었다... 애초에 최종수와 이렇게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기상호가 처음이었다. 나름 친했던 것을 따지자면 이규가 있었으나 이규는 자신을 적당히 챙겨주면서 자기 할 일도 하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타입이었지 기상호처럼 이렇게 성큼 다가오는 타입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규는 마당발이었으나 기상호는 약속을 잡고 자주 만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상호랑 더 놀 수 있었던 건데...

하... 서로에게 최선인, 상호 독점적인 관계. 최종수의 머리 속에 생각나는 거라곤 연인 뿐이었지만 이걸 또 기상호랑 하고 싶지 않았다. 우정도 변하는데 사랑은 더 쉽게 변한다. 그 동안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상호는 그러지 않을거라고 믿고 싶었으나 그것은 확신이 되지 못한다.

최종수는 제 마음을 정의내리면서도 1주일이나 더 고민을 했다. 이 것을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지. 애인이 되기는 싫지만 애인에게 밀려나는 것도 싫었다. 최종수는 결국 기상호에게 만남을 제안했고 기상호는 좋다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 햄"

"네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

"네?!!?!!?!"

여기서 기상호는 뒤집어졌다. 새삼스러운 말을 굳이 강조하면 거기에 뜻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종수는 튀어오르는 기상호를 꾹 눌러 다시 앉혔다.

"들어."

"넵."

"나한테 이렇게까지 엄청 잘해주는 사람은 없었거든."

"네."

"그래서 너한테 계속 그런 취급 받고 싶어."

"네."

"근데 네가 애인이 생기면 내가 순위가 밀려나잖아."

"그...렇죠?"

"근데 난 그러기 싫어."

"네."

"그래서 널 독점하면 좋겠어."

"...네?"

"근데 그게 연인이긴 싫어. 너도 많이 봤겠지만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건 엄청 잘 변해."

"네..."

"대신 너도 날 독점하게 해줄테니까 우리 서로 제일 중요한 관계를 맺자."

평소의 기상호라면 저런 말을 듣고 그러면 우리는 울트라메가캡짱골져스베스트프렌드가 되는 거군요 따위의 말을 했겠지만 지금의 기상호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최종수에 대한 Love를 죽여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는 입장에서 그 발언은 정말 폭탄과 같았다. 종수햄이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한다니!!! 근데 나랑 연인이 되긴 싫대...

기상호는, 솔직히 진짜 많이 생각했다. 그래 종수햄이 여기까지 말해줬는데 내가 정말 좋은 친구가 되려면 여기서 그러자고 해야겠지... 근데...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나... 그렇게나 제가 좋으시면...

"종수햄."

"어."

"저 종수햄 엄청 좋아해요."

"알아."

"사귀고 싶어요."

"어?"

여기서 최종수는 다시 한 번 배신감이 쩌는 눈으로 기상호를 노려봤다. 기상호로선 처음이지만 이미 주둥이의 리미트가 풀린 상호를 막을 순 없었다.

상호는 거진 고백을 빙자한 구구절절문을 썼다. 처음에 최종수에게 다가간 것은 기필코 개수작이 아니었다는 점. 그러나 언제부턴가 저를 보고 안심하는 모습을 보며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고 느꼈다는 것. 저 또한 최종수에게 최고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것. 제가 언젠가부터 결국 사랑하고 있다고 깨달은 것. 나중엔 사랑하는 만큼 좀 더 헌신적으로 굴었다는 점. 최종수가 연애를 질색하길래 결국 마음을 접고 친구로 남으려고 했다는 점.

그것을 최종수는 가만히 들어주었고, 기상호가 말을 끝내고 저질러버렸다... 라는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손만 꿈지럭거리자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니 말 다 알겠는데. 우리가 사귀게 되면 또 언젠가 식을 거 아니야."

"아니에요 햄! 저 이제까지 사귄 사람들 다 그쪽에서 식어서 제가 차였어요. 전 안 그랬어요!"

"난 그랬는데."

"저는 아니에요. 함만 믿어주세요!"

최종수는 생각했다. 기상호랑 사귀는 거... 나쁘지 않다. 뭐 애초에 최종수가 사람을 골라 사귀었나. 고백을 하니까 사귀었지. 게다가 기상호가 저를 사랑한다고 느낀 순간을 듣고 그 뒤의 행동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지극정성이라, 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제가 연애에 질렸다는 점 말곤 없었다.

그것을 감안해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기상호의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되는 건 정말 괜찮은 일이었다. 확실히 너라면 지금까지 만난 연인들 중에선 가장 오래가겠지만... 최종수는 이제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최종수는 손을 내밀어 기상호의 손을 받아들고 꾹 쥐었다.

"그럼 너 여기서 약속해."

"네? 뭐를요?"

"내가 너랑 사귄다고 쳐."

"네!!"

"근데 중간에 니가 마음이 변했어. 사랑이 식었다고 쳐."

"네."

"그럼 미안하다느니 개수작부리지 말고 바로 말해."

"네."

"그리고 우리 다시 친구해."

"네."

"만약 니가 사랑이 식고 나니 나를 보기 껄끄럽다거나 했던 말 못 지켜서 민망하다거나 하는 같잖은 이유로 날 피하거나 잠수를 타면..."

기상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진짜 죽여버린다......"

"햄, 햄... 눈이 무서워요... 절대 안 그럴테니까... 살려주세요..."


3.

기상호와 최종수가 사귄다. 그 사실은 둘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대부분 아는 일이었다. 최종수는 기상호를 연인으로 대하기로 했으니 그에 맞춰 티를 냈기 때문이다. 카톡의 상태 메세지에 디데이가 올라갔고, 프로필 사진에는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셀카가 올라왔다. 둘은 커플링을 맞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대단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저 기상호가 조금 더 최종수에게 다가갔고 최종수는 그런 기상호를 한 번도 밀어내지 않았다. 스킨쉽의 농도가 바뀐 것을 제외하자면 두 사람은 사귀기 전과 비슷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최종수는 기상호를 믿었다. 믿었기에 시작한 연애였다. 그럼에도 최종수는 사랑이란 것을 믿지 못했다. 최종수는 자주 불안함을 느꼈다.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기만적인 것이라, 그 감정에 취해 판단한 것들은 감정이 식고 제대로 살펴보면 오판인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고, 먼저 떠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게 네 사랑에서 비롯된 오판이면 어떻게 해. 최종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오랜 연애기간에 많은 정신을 갉아먹힌 최종수가 벗어나지 못한 그늘이었다.

기상호는 그 불안을 아주 기민하게 눈치챘다. 종종 시선이 제게서 멀어지고 숨이 조금 느려질 때. 기상호는 자연스럽게 최종수의 손을 잡고선 조금 높은 그 시선을 제게 맞춘다. 그러면 최종수는 제 눈을 한참이나 쳐다보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파악하는 것에 능한 기상호라고 해도 상대방을 모두 다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만나온 최종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기상호는 최종수가 마음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연애라는 것을 시작하자마자 최종수는 다시 그 늪에 빠졌다. 고작 관계의 이름이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을 뿐인데도 최종수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제까지 최종수가 겪어온 사랑이 모두 그런 탓이다. 하나같이 최종수에게 사랑의 증명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희생을 요구하고. 기상호는 제가 다가가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체념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뒤에는 더 이상 연인같은 스킨쉽을 하지 않았다.


최종수는 상처받는 것이 익숙했다. 이것이 평범한 연애라면 최종수는 진작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언젠가 다가올 끝을 얌전히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최종수를 안달나게 하는 것은, 이번의 관계로 기상호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최종수는 답지 않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기상호가 최종수를 맞춰주고 신경썼는데, 이제는 최종수가 기상호보다 더 신경을 썼다. 연락의 빈도가 크게 늘었고 요구가 크게 줄었다. 기상호의 의향을 묻는 질문이 늘었고 기상호의 기분을 묻는 질문이 늘었다.

기상호는 예상치 못한 최종수의 그늘에, 솔직히 크게 당황했다. 연인이 되기를 허락 받을 때만 하더라도 최종수는 기상호가 헛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이 말했는데 이제는 제 심기 하나라도 거스를까 걱정하듯 눈치를 보니 저 또한 당황스러운 것이다. 그래도 기상호는 그 이유를 알았다.

기상호는 조금 더 많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생각해요? 최종수는 느릿하게 답했다. 너랑 있어서 좋아. 기상호는 최종수의 손을 깍지껴잡고 눈을 맞췄다. 말해주세요. 최종수는 그 눈을 한참이나 마주하고, 이내 일렁임을 내보인다. 네가 언제 변할지 두려워... 기상호는 그제서야 최종수를 끌어안고 조곤조곤 말한다. 변하지 않을거예요.

기상호가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 많아졌다. 다음에도 여기 와요. 다음엔 어딜가요. 다음에는 그거해요. 다음엔 더 좋은 걸 해요. 최종수는 그런 약속을 들을 때마다 무언가를 셈하는 듯 허공을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하자고 했어. 라고 말했다.

종수햄은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좀 더 많은 질문을 했다. 최종수는 여전히 한 번 정도 제 속을 숨겼고, 그것을 들키면 힘들게 더듬더듬 뱉었다.

어느 날은 침대에 누워있는 최종수를 가만히 껴안고, 눈을 감은 얼굴을 쳐다보며 머리를 만지작거려주고 있었는데 느릿하게 눈을 뜬 최종수의 시선이 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말해주세요."

최종수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나쁜 꿈을 꾼 사람처럼 안색이 나빴고, 문득 잡은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 손을 부드럽게 문질러주며 뻣뻣해진 몸을 풀어주자 뒤늦게서야 겨우 숨을 내쉰 최종수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너랑 사귀지 말 걸 그랬어."

"왜요?"

"지금 이러는 행동들이 널 피곤하게 할 거 잖아."

"안 그래요."

"너는, 내가 널 사랑하게 해선 안 됐어..."

기상호는 힘을 주어 그를 꾹 끌어안았다. 차마 면목이 없는 듯 저를 마주 안아오지도 않던 최종수는 사랑한다는 말을 10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조심스럽게 저를 끌어안았다. 얌전히 안기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기상호는 생각했다. 확실히 저는 그를 사랑하게 해서는 안 됐다고. 제 사랑에 눈이 멀어 어떻게 될지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고. 하지만 일은 벌어졌다. 이제와서 헤어지자고 하면? 그것은 최종수를 위한 일이 될 수 없다. 또 다시 최종수의 그늘을 짙게 만들고 가장 아끼던 자신마저 놓게 만들 뿐이지. 기상호는 최종수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최종수와 기상호가 사귄지 반 년. 여전히 서로에게 질문이 많았고 최종수의 속내는 기상호와의 오랜 눈맞춤만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최종수는 생각한다. 기상호의 눈빛은 여전하여 그의 말대로 변하지 않았음을. 하지만 이 반 년이라는 시간은, 이제까지 최종수가 겪어왔던 사랑의 유통기한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언젠가, 이때는, 다음은, 내일은. 그런 말로 미루어오던 끝이 더 이상 예상할 수 없는 것에 가닿는다. 네가 변할거라 예상할 수 있는 시간동안 너는 변하지 않았다. 그럼 최종수는 기상호의 불변을 믿어야하는가. 

최종수는 제 앞에 앉아 여전히 제 눈을 들여다보는 색소 옅은 홍채를 마주한다. 처음의 만남 때는 이 집요한 눈빛이 짜증난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이제 이 눈동자가 제게 진실을 뱉으라 요구하길 바란다. 긴 시간 동안 최종수는 이 눈빛에 천천히 길들여졌다.

"종수햄."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네가 알아차린 탓이다. 네 눈빛은 여전하여 최종수는 가끔 저 눈이 완전히 감기고 다시는 뜨여지지 않는, 적어도 저를 더이상 마주하지 않는 상상을 그만뒀다. 

"상호야."

"네."

"나는 네가 어제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어."

"아니었어요."

"맞아, 아니었어..."

최종수가 끝까지 기상호를 믿었음에도 그의 사랑만큼은 믿지 못했던 이유를 떠올린다. 기상호라는 인간은, 한 번도 제 기대대로 굴러가준 적이 없었다. 틀에 박힌 데이트를 할 때 조차 그의 애인은 색다른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저를 이끌었으니. 친구로서는 그것이 기꺼워 마음껏 제 빈약한 상상력으로 이것저것 기대를 했는데.

연인이 되면 바라는 것이 많아지지 않는다. 연인이 되고나서 기대에 부흥하려 노력하는 것은 죄다 그가 영원히 나를 사랑하길, 나에게 특별을 주길, 나에게 저 자신을 떼어주길 바라게 되는 것의 파생일 뿐이다. 기상호는 항상 기대대로 되어주지 않았으니 최종수는 그것을 바라는 것이 꽤 두려웠다.

아, 하지만 저의 예지는 모든 것이 빗나갔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곳에서 저는 의미없는 불안으로 네 사랑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만 두어야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 겁쟁이가 살고 싶으면 도망쳐야했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이제 너랑 친구로는 못 지내."

"네, 형."

그리하여 최종수는 결국 제 남은 마음을 모조리 뜯어다 기상호에게 쏟아붓는다. 그 마음조차 소중히 여겨지지 못하면 최종수는 이제 커다란 구덩이만을 품고 살아가겠지. 그래도 별 수 없었다. 겁쟁이는 도망이라도 가야했다. 차마 헤어지자거나 그만두자는 말을 하지 못해 도망친 곳은 사랑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자.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제 연인이 절대로 오지 않을거라 단언한 완벽한 죽음을 직전까지 깨닫지 못하게.

최종수는 아주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제 연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저 자신을 위해서. 제 만족을 위해, 상대방의 무엇이라도 빼앗기 위해.

최종수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싼다. 기상호의 몸을 길다란 팔이 소중히 끌어안는다. 최종수의 불안은 여전했다. 그러나 최종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불안마저도 너로 인한 것이니 그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언젠가 나랑 헤어진다고 쳐."

"안 그럴거예요."

"그러면 나를 꼭 죽여야해."

다시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도록. 뒷말은 연인들의 숨결 사이에서 흩어진다.


상호는 세수를 하고 거울 안의 저를 쳐다보았다. 어제는 신경써서 일찍 잤고, 9시간이나 푹 자고 일어났다. 덕에 혈색이 좋은 건 물론이고, 나름 관리한 피부도 오늘따라 짱짱한 기분이 들었다. 내 오늘 이정도면 종수햄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애인으로는 보이지 않을라나. 상호는 기분 좋게 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잘생겨보이는 각도를 찾다가 작게 웃었다. 종수가 이 꼴을 본다면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면서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 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햄 보고 싶다. 약속시간까지 넉넉하게 남았으면서도 마음이 조급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는다. 원래 아침은 건너뛰던가 라면, 아니면 적당히 계란과 김치로만 떼웠었는데 그 꼴을 들은 종수는 그것이 영 신경 쓰였는지 격주로 반찬을 사 상호의 자취방 냉장고에 반찬을 쟁여놓았다. 먹은 꼴을 보고 꾸준히 챙겨먹으라 잔소리를 하며 상태가 안 좋은 반찬들을 모아 버리는 종수를 말리길 몇 번, 상호는 미안함과 자신을 챙겨주는 종수의 다정함이 고마워 항상 아침을 챙겨먹기 시작했다. 와중에 제가 좋아하는 반찬만 사두는 이 배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고작 혼자 밥을 먹는데도 마음이 근질거렸다.


약속시간까지 넉넉히 3시간. 약속 장소 근처의 뷰티샵에서 세팅을 받을 예정이니 슬슬 준비를 해야했다. 종수는 상호가 편하게 있을 때를 가장 좋아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꾸미는 상호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 상호는 오늘 단단히 꾸미기로 했다. 옷장에서 꺼낸 것은 종수가 전에 어울릴 것 같다고 사준 베이지색 코트. 안에는 검은 목티를 받쳐입고 아이보리색 면바지를 매치했다. 흰 색이 나으려나? 거울 앞에서 조금 고민하다가 흰 색 면바지를 대보곤 바지를 바꿔 입었다. 어제 저녁에도 한참을 고민했는데 결국 흰 색이었다.

미용실에서 제 담당 미용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꾸미는 걸 보니 애인 만나러 가요? 그리 묻기에 환히 웃으며 네! 라고 대답했다. 오늘 사귄지 1년 째거든요. 멋지게 보이고 싶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그리 살갑게 말하자 어머, 진짜요? 실장님 불러야하는 거 아닌지 몰라. 라며 꺄르르 웃으신다.

전문가의 손길을 받으니 머리가 점점 모양새를 갖춘다. 실력이 좋다는 뷰티샵을 한참 고른 보람이 있었다. 애인이 연상이에요 연하예요? 그리 묻는 것에 연상이라 하니 오늘은 멋있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요? 라고 묻는다. 상호는 그것에 우물쭈물하다가 역시 기념일에는 그러고 싶어요. 라고 답했다. 제가 멋있게 꾸미고 나가면 어떨까? 그래봤자 종수햄에겐 쨉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종수햄은 좋아해줄 거 아니야. 보면서 의외라는 듯 얼굴을 붉혀줄지, 연하 애인의 끼부림에 귀여워해줄지.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뭐든 좋아만 해주면. 기상호는 작게 웃었고 미용사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며 같이 웃었다.


화장까지 제대로 받고 나오자 약속시간이 조금 아슬했다. 그래도 뛰어야 할 정도는 아니니까. 상호는 조금 빠르게 걸으며 약속 장소로 나간다. 우리가 사귄 날은 아무 날도 아니라 이 대낮에 사람이 북적이는 일은 없다. 멀리서부터 검은 인영이 보인다. 새까만 코트, 검은색 목티, 하얀색 면바지. 저 검은색 구두. 저 면바지는 항상 검은 옷만 입는 그가 다른 색을 입어보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촌스러운 색을 추천하고 싶지도 않아 고민하다가 고른 바지였다. 나름 커플 바지~ 같은 핑계를 대면서. 햄도 신경써서 입고 나왔구나. 그런 사람임을 앎에도 그것을 다시금 깨달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올라간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보폭과 발소리를 알았다. 벌써부터 상기되어있는 상호의 얼굴을 마주하는 잘생긴 얼굴. 와, 햄도 꾸몄네. 평소보다 혈색도는 입술과 거뭇하지 않은 눈매, 원래도 눈썹이 진했는데 좀 더 정돈되어 있었으며 적당히 말리기만 했던 머리카락은 조금 윤기가 돌면서 단정하게 가라앉은 상태로 멋을 내고 있었다. 가슴이 더욱 두근거린다. 제 애인이 저를 위해 신경 써 온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상호가 무의식적으로 종수의 얼굴을 살핀다. 아직도 아무 말 없이 저를 살피고 있는 것에 인사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쪼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한데... 뭐라고 말 안 해주나? 괜시리 시선을 한 번 내리다가 흘끔, 얼굴을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종수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꾸미고 왔네."

"그야... 잘 보이고 싶잖아요."

"나도 그래. 멋있다."

와~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마저 잘생겼어. 상호는 부끄러움에 조금 과장을 하며 봤지만 담담히 웃고 있는 눈매가 여전히 부드러워 결국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좋아서 어쩌지? 저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달아오른 얼굴을 한 종수의 얼굴도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얼른 데이트나 하러 가자며 종수의 손을 잡아끈다. 순순히 끌려오는 듯 따라오며 보폭을 맞추는 옆 사람을 느낀다.


1주년 데이트지만 거창한 것은 하지 않았다. 적당한 가게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온 김에 오락실에 들러 재밌어 보이는 게임을 몇 개 같이 했다. 좁은 코인노래방에 껴서 아는 노래를 몇 개 불렀고 -K팝만 불렀다- 종수의 손을 잡아 끌어 스티커 사진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보정할 때에 그림을 그릴 수 있길래 무엇을 쓸까 고민하고 있으니 종수가 먼저 화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쳐진 강아지 귀, 그 옆에 하트. 그리고 나선 자신을 보며 씩 웃는 것에 상호가 크게 웃으며 자신 또한 고양이 귀, 고양이 수염, 그리고 많은 하트를 그려넣었다.

그러곤 한 장만 더 찍자고 말했다. 카운트다운이 되는 동안 상호는 종수의 손을 잡아 제 쪽을 보게 하더니 그대로 고개를 쭉 뻗어 종수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종수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상호의 손을 잡아당기곤 저 또한 상호의 볼에 입을 맞춘다. 이어 상호가 웃었다. 멋진 타이밍으로 찍힌 사진은 둘이 나눠가진다.


저녁은 종수가 잡아놓은 호텔의 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많은 경험이 없는 상호 대신 이것저것 시키는 종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떠난다. 상호는 흘끔 그것을 보다가 장난스럽게 종수의 신발을 툭 건들였다. 애초에 시선이 상호의 얼굴에 있었으니 가만히 제 할 말을 기다리는 종수를 마주보던 상호는 그저 웃는다.

왜 실없이 웃어. 그리 말하면서도 말투에 비꼬는 기색은 전혀 없이 자신도 같이 웃어주는 얼굴을 마주하며 행복을 느꼈다.

"우리 예전엔 데이트 하나도 못 했잖아요."

"그랬지. 나 때문에."

"아! 그게 왜 햄때문이에요."

"나도 알아. 내가 자주 우울해하니까 달래준다고 집에만 거의 있었던 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더 이상 안타깝다거나, 마음이 아프지 않는 것은 정말 나쁘지 않은 감각이다. 담담하게 내뱉는 모습이 그것이 지나간 과거일 뿐임을 나타내니 그저 기껍다. 상호는 그리 말하며 미미한 웃음을 짓는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종수는 상호가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것을 좋아했다. 애정에 기반한 관찰을 꺼릴 이유는 없으니까. 저가 말하지 않아도 제 어린 애인은 제가 하는 그 어떤 말도 곡해하지 않고, 오해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주니 싫을 이유가 없다. 봐라. 지금도 예전의 우울한 이야기를 해도 제 기색을 읽고 기분 좋게 둥글어진 웃음이 귀엽기만 했다. 객관적으로는 그도 지금은 꽤 잘생긴 얼굴인데. 그 점을 말해주면 부끄러워하면서 다음에도 이러고 올까요? 라며 물어 올 것이 선하다. 하지만 종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편한 상태로 바보 같이 웃는 얼굴이라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밥을 먹고 나와선 손을 잡고 근처의 공원을 천천히 돌았다. 많은 말들을 주고 받았지만 여전히 할 말이 많았다. 서로가 없는 시간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남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만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주고 받는 것에도 작게 웃음이 터지고 행복함이 얼굴에 드러난다. 옆에서 보면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풋풋한 연인들같이. 주변의 사람들 중 몇이 국가대표 최종수를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둘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몇몇 팬이 다가오면 그저 깔끔히 싸인을 해주고 좋은 말 몇 마디 던진다음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둘은 손을 잡고 있었다. 추운 날이 아니라 손의 열기는 과할 정도였지만 그 뿐이다.

"맞다 햄, 저 햄이 며칠 후에 나가는 경기 티켓 얻었어요. 희차이랑 다은햄도 온다는데 싸인 받아도 돼요?"

"응. 걔들도 밥 사줘야겠네."

"와~ 걔 둘도 출세했다. 국가대표한테 밥 얻어먹고."

"까분다. 보나마나 나 불편해할텐데 네가 잘 해야지."

"아이~ 둘이 성격이 얼마나 좋은데. 보나마나 왜 저랑 사귀냐고 놀리기만 할 걸요?"

"그럼 실수라고 말하고 나도 같이 놀릴까?"

"아, 종수햄은 내 편 들어줘야지!"

"알았어. 네 편 들게."

다시 둘이 웃는다. 진짜 내 편 들어야해요. 알았다니까. 그런 말을 주고 받으며 공원을 계속해서 돈다. 해도 완전 졌고, 이제 슬슬 돌아가야하는데 둘이 지내는 곳은 멀어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아, 햄 보내줘야하는데. 내일도 훈련 있을텐데. 계속 붙잡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걷고 있으니 시간이 벌써 10시가 넘었다. 욕심내지 말자 기상호... 햄은 자기 바쁜 거 미안해서 먼저 헤어지자고 안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어리광부리면 안 돼... 결국 기상호는 마음을 먹고 걸음을 멈춘다. 마침 공원 입구 근처였다.

옆의 가로등 빛이 내려앉은 기다란 속눈썹 안의 검은 눈동자가 빛난다. 예전에 친구로서 저와 즐겁게 놀던 때처럼. 레스토랑에서 분위기에 맞춰 와인 몇 잔 먹은 것 때문에 그런가. 얼굴에 열이 올라 손을 뻗어 깔끔한 눈가를 엄지로 슥 쓸어본다. 긴 속눈썹이 몇 번 깜박거린다. 그 모든 게 참 예뻐서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형은 진짜 잘생기고 예뻐요... 매일 하는 실 없는 소리인데 문득 종수가 시선을 내리며 제 시선을 피하자 상호가 정신을 차렸다.

와... 기상호, 안 그래 보이면서 꼬시기 천재네... 한참 이야기하다가 가로등 밑에서 애인 눈가 만지작거리면서 예쁘다 이러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걸 봤으면 개꼴깞이라고 생각했을거라 상호는 민망함에 저도 고개를 숙였다. 이어 종수가 작게 웃는다. 상호는 감정이나 생각이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으니 뻔히 눈치챈 게 분명했다. 시선을 올리면 어느새 휘어진 눈매가 보여 상호는 그냥 같이 웃었다.

"기상호."

"에이... 정없게 그리 불러요?"

"상호야?"

"네, 종수햄."

"..."

오랜만에 종수가 입을 닫는다. 상호는 이 일이 익숙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해도 될지 모를 때의 버릇이니까. 그래도 요 근래엔 안 그랬는데. 익숙하게 종수의 어깨를 감싸쥐고 가까이 다가가 시선을 맞춘다. 주저하고 있지만 그것이 두려움을 기반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무슨 말을 할라 그르나... 어쩐지 상호는 기대가 되어 제 재촉을 재촉하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보았다.

같이 몇 잔 걸친만큼 저와 비슷하게 상기되어있던 얼굴이 조금 더 빨갛게 달아오른다. 부끄러워하고 있네. 근데 요즘엔 사랑한다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해주는데 뭔 말을 해줄라고 이렇게 뜸을 들이지? 기상호는 조금 더 고개를 들이대 코끝이 닿을만치 얼굴을 가까이했다.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던 종수가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이젠 자신이 고개를 내밀어 상호와 입을 겹친다. 아주 짧았고, 이어 떨어지며 머뭇거리던 말을 내뱉는다.

"...그,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나, 내일 오전에 쉰다고 했는데."

상호는 넋이 나갔다.

예?

...싫어?

아뇨햄너무좋아서지금뇌가잠깐멈춘것같은데저저저저저저지금제가뭐오해하는거아니겠죠그쵸제제가너무나갔...

올거야 말거야?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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