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사랑
상호종수
가이드와 센티넬을 가리지 않고, 높은 등급의 재원은 언제나 환영받기 마련이다. 특히나 높은 등급으로 가면 센티넬보다는 가이드가 좀 더 높은 가치를 가졌다. 센티넬에 비해 가이드는 수가 적었던 탓이다. 거진 2:1의 비율로 그 적은 수 중에서도 높은 등급은 더욱 희귀했으니 각 나라별로 높은 등급의 가이드를 보유하는 것에 안달이 나 있었다. 종종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나타나면 다른 나라에서도 높은 보상으로 귀화를 권유하고 심지어 납치까지 일어나니 그 위상은 알아줄 만 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신예이자 고등부에서부터 이름 높았던 농구천재, 농구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르기 어려웠으나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알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유일한 S급 가이드로 발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문에 나기도 전에 최종수는 국가기관에 모셔져 갔다. 납치에 가까운 행태였고 부드러운 권유의 형태를 띄우고 있었으나 명백한 강요 속에 최종수는 별수 없이 두 손을 들었다.
한국은 워낙 사람이 적다 보니 센티넬과 가이드들도 다른 나라처럼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대하는 의식도 낮았고 심지어 S급 가이드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것을 가만히 받아줄 이유는 없었기에 최종수는 조건을 단다. 어차피 나 없이도 적당히 굴러갔을 테고 남 뒤치다꺼리하다가 인생 그냥 흘려보내기는 싫었으니까. 적어도 농구 선수의 일생에 해를 끼치지는 말라고. 남는 시간은 원하는 대로 그 망할 가이딩이라는 걸 해주겠다고. 그 후 자기 자신을 위한 조건을 이것저것 붙였다. 그러고도 꽤 불만족스러운 결과였으나 인상 안 좋게 박혀서 나중에 곤란해지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결국 최종수는 원하는 조건들을 어떻게든 사수하고 타협한 뒤 계약을 맺었다.
최종수가 가이드로 완전히 전향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농구 선수로 뛰고 싶었고, 또한 사귀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S급 가이드 정도 되면 포옹 정도로도 웬만한 센티넬들은 충분하다고 들었으나 최종수는 애초에 신체접촉을 반기는 이가 아니었고 그런 걸로 애인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거절할 수 있었더라면 아예 거절했을 텐데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구는 통에 별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최종수라도 나라에서 뭐 한다 하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니까...
그리하여, 22세 여름. 최종수는 계약에 의해 센터로 가이딩을 하러 갔고 손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저를 끌어안아 오는 센티넬의 눈동자 속에 어린 갈망을 보고 굳었다. 기어코 얼굴을 내미는 것에는 저도 모르게 팍 밀쳐버렸다. 부득불 계약에 포옹보다 더 한 신체접촉은 넣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이들이 들어와 계약조건인 포옹까지는 이행해주어야 한다는 말에 결국 최종수는 한참이나 상대방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몇십 명이나 했다. 귀한 S급 가이드. 몇 없는 S급 센티넬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엔 위험도가 높은 A급 센티넬들이 줄을 섰다. 최종수는 온종일 가이딩을 해야 했다. 그 모든 센티넬들이 제게 닿자마자 보이는 기묘한 열감이 피곤했다. 계약만 아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모든 일을 겨우 감내하고 그들이 놓아준 것은 밤 10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동안 맞닿은 체온도 다양하여 최종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급하게 차를 몰았다.
"햄! 오늘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왔네요?"
도착한 애인의 자취방에서 최종수는 급하게 기상호를 끌어안는다. 그리 매달리는 것에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기상호는 그를 꾹 안아주며 문을 닫았다. 기상호는 최종수의 상태가 별로인 것에 예민했다. 최종수의 울렁거리는 속을 짐작한 것처럼 살살 달래는 말을 하며 기상호가 뒤로 물러서자 그 품에 파고들면서도 최종수는 신발을 신고 들어왔다. 거대한 남자를 살살 달래서 침대에 끌어앉힌다. 최종수는 기상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며 그의 모든 체향을 잡아먹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기상호는 그런 최종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가 가이드가 된 이후부터 가이드란 무엇인지 일반인이 알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모두 끌어다 살펴보았다. 처음 계약을 했을 때 가라앉은 얼굴로 포옹까지만 하기로 했다고 말한 얼굴을 기억한다. 애인인 저 말고는 누구하고 닿는 것 자체를 반기지 않는 그 성정에 남과 온종일 포옹을 하는 걸 상상하면, 정말... 질투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가기 전에도 가기 싫다고 스트레스 받는 그를 한참 달래줬었는데 이 꼴로 돌아온 걸 보면 그저 화가 났다.
그래도 결국 일반인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서, 기상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거렸다. 지금 재우면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하더라. 대학이 다르니 머무는 곳도 거리가 있다. 기상호는 그 거리를 셈하면서 제 품의 이를 달래 떼어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기에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간단히 먹이고 씻고 나면 벌써 1시가 가깝다.
내일 아침 훈련은 그냥 빼먹고 저랑 있어 주세요. 그런 말을 하면 최종수는 순순히 응한다. 원래라면 그래도 가야 된다고 할 사람이니 받은 스트레스가 짐작이 갔다. 여전히 제 품에 파고드는 이를 가만히 끌어안는다.
최종수가 쉬는 날은 명확한 일수를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표시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나름 여유롭다고 무조건 불려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침부터 연락이 오는 것은 쌓아놓은 위험수치 센티넬들을 처리할 때 뿐이고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폭주로 인한 사태 진압에 불려가는 것이었다. 탓에 최종수는 별일 없는 줄 알고 급하게 잡은 데이트를 할 때에도 난데없이 연락을 받고 가야 했다. 그것이 싫어 아예 핸드폰을 놓고 나갔더니 사람이 찾아와서 지금 당장 가야 한다 붙잡는 것에 기상호는 그 꼴을 보고 화를 냈다.
"아니! 사람이 쉬는 날 명확히 해야지. 우리 종수햄이 뭔 부르면 부른다고 후딱 가야 하는 노예도 아니고 뭡니까!"
기상호는 그날 체면이고 뭐고 최종수를 끌어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농구만 해도 부족할 시간에 억지로 일을 시킨다. 신체접촉도 싫어하는데 억지로 하게 만들고 이제는 쉬는 날도 제대로 보장 안 해주고 자기들 필요하면 시간 상관 안 하고 부른다.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최종수를 알아보았고 기상호가 모르는 척 억울함을 연기하고 질러댄 것들은 그대로 SNS에 떠돌아다녔다.
누군가는 가이드니까 당연하지 않냐고 달았지만 누구라도 제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껄끄럽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이와 신체접촉 하는 걸 반기는 편은 아니니까. 기상호가 그렇게 대거리를 해댄 덕에 최종수는 주말 하루를 보장받았다. 최종수는 그날에 무조건 기상호를 만났고 기상호는 자연스럽게 제 주말의 하루를 최종수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버틸 만 한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변수가 생겼다. 기상호가 센티넬로 판정 받은 것이다. 최종수가 한참 바빠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을 때 기상호가 폭주했다. 경기가 아니고 훈련이어서, 최종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센터로 달려갔다. 도착해 어디 있는지를 찾으니 방금 다른 가이드가 폭주를 가라앉히기 위해 가이딩 중이라는 말을 듣고 제가 직접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조금 놀란 눈을 하던 센터직원은 어딘가로 연락하는 것 같더니 가야 하는 곳을 알려주었다.
확인하니 3층이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도 않고 급하게 계단을 달려 올라가 가이딩실 문을 여니 괴로워하며 제 머리를 부여잡는 기상호가 보여서, 최종수는 익숙하게 문을 잠그고 옷을 벗으며 다가갔다. 이미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을 보며 그 어깨를 내리 누르니 시선이 얼굴에 닿는다. 아까까지 흐렸던 초점이 똑바로 맞춰진다. 저를 알아보는 것 같은 얼굴에 굳어있던 최종수의 얼굴이 풀린다.
"기상호. 나야. 이리 와."
우악스러운 손이 최종수를 끌어당긴다. 최종수는 기상호의 눈에 피어오른 열감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제게 달려드는 것에 반항하지 않고 최종수는 눈을 감았다.
기상호, X급 센티넬. X급은 등급 판정 불가를 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능력이 전투 특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선별기준은 전투 특화들을 기준으로 이루어졌기에 비전투능력들은 다들 X급을 받았다. 하지만 전투와 비전투를 가리지 않고 센티넬들은 센터 소속이 된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국가에도, 센티넬 본인에게도. 언제 어디서 능력을 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센터 소속이 아니라면 필요할 때에 가이딩을 받지 못할 수 있다. 탓에 센티넬들은 다들 센터 소속이 되는 게 기본이었다.
기상호는 분석 능력이었다. 기상호는 법에 따라 센터 소속이 되기로 했다. 아마 법이 없었어도 센터 소속이 되었을 것이다. 한 번 폭주를 겪은 기상호는 후유증이 남았다. 시력이 매우 안 좋아진 것이다. 뇌 관련 능력자들이 그랬다. 폭주를 겪으면 뇌가 망가졌다. 망가진 것이 뇌 자체가 아니라 거기 연결된 눈이라서 차라리 다행인가 싶었는데, 시력이 안 좋아지니 남 제대로 쳐다봐야 하는 스포츠는 텄다. 그래서 기상호는 미련 없이 센터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최종수는 어떻게 되었느냐. 망했다. 애인은 센티넬 발현 되더니 갑자기 센터로 가버렸고 최종수는 혼자 남았다. 다 놓고 따라가기엔 좀 그랬다. 기상호를 정말 사랑한 건 맞는데, 농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최종수는 언제나 농구와 기상호를 같이 가지는 삶만 생각했지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삶은 생각도 못 했다. 와중에 기상호는 들어가면서 최종수한테 편지를 남겼는데,
[형이 그만두고 싶으면 제가 뭐라고 말리겠어요.
근데 저 때문에 그만뒀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형이 계속 농구 하는 거 보고 싶어요.
근데 저 때문에 그만뒀다고 들으면 죽고 싶을 것 같아요.]
따위의 말이 적혀져 있어서 차마 그만두지도 못했다. 아마 안 남겼으면 한동안 고민하다가 못 놓았지 싶은데 남기니까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최종수는 농구를 계속했다. 여유 시간에는 안 불러도 센터로 갔다. 귀하신 S급 가이드가 센터에 오래 붙어있으니 센터는 좋아했다. 알 바 아니고 최종수는 계속 기상호를 찾았다.
기상호는 최종수가 찾아가면 여상한 낯으로 아직 일하는 중이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최종수는 기다렸다. 그 망할 일 끝나는 거. 어쨌든 기본 머리는 워낙 좋은 녀석이라 일반인들과 같이 서류 작업을 한다던데 일손이 없어서 항상 바쁘단다. 그래도 최종수는 기다렸다. 기어코 만나면 최종수는 익숙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제게 곧게 꽂히는 다정한 얼굴을 보며 최종수는 안심을 느꼈다. 그래, 전투 특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전투 특화면 어디 위험한데도 투입 된다는데 얜 그래도 내 곁에 있어주잖아. 최종수는 솔직히 납득이 안 됐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납득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평화가 깨지는 것은 길지 않았다.
평소처럼 기상호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가이딩만 제대로 해주면 저가 어디 있든 센터는 신경 쓰지 않았기에 최종수는 아예 기상호가 근무하는 층의 휴게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농구 중계를 보고 있으면 퇴근 시간이었고 이어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흘려보낸 뒤 익숙한 얼굴이 보이면 최종수는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을 적당히 피하면서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종수를 본 기상호의 얼굴이 이상했다. 언제나처럼 반기는 얼굴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피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최종수는 그 얼굴을 보며 급하게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기상호가 최종수의 손을 피했다.
"...뭐하냐?"
"그, 햄. 죄송해요. 제가 아직 가이딩을 안 받아서..."
"내가 가이드잖아? 나 말고 누구한테 가이딩 받고 다녔어?"
"정해놓진 않았지만... 햄한테 받고 싶진 않아요."
"왜?"
"...음. 그냥..."
따져묻고 싶었는데 그때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여서 결국 말을 못했다. 최종수는 항상 기상호가 정말 하기 싫은 건 못 시켰다. 그래서 그냥, 닿지도 못하고. 한참 쳐다보다가 걔가 사라지는 거 가만히 쳐다만 봤다. 돌아온 상호가 눈치를 보면서 포옹까지만 했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최종수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센터에 방문한 최종수는 기상호의 가이딩 표를 확인했다. 이제까지 기상호와 닿으면서 단 한 번도 가이딩 되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냥 능력을 안 쓰는 건가 싶었는데 기상호가 받은 가이딩 목록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정보가 적혀져 있었다. 심지어 매일매일 받았다. 한 사람에게. 애먼 데다가 가이딩을 받고 와서 최종수가 가이딩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였다. 최종수는 그 사실을 알고 열이 뻗쳐서 어쩔 줄 모르다가 기어코 그날 기상호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고 나왔다.
기어코 단 둘이 되었을 때, 기상호의 눈에 서린 열감과 함께 저를 향하는 절망감에 최종수는 숨을 멈춘다.
"왜 그런 표정이야?"
"..."
"나한테 가이딩 받는 게 그렇게 싫어?"
"햄, 그러니까..."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내가 가이딩 해준다고 하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토해내듯 말하는 것에 기상호의 눈가가 작게 떨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면서도 최종수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센티넬과 가이드 이전에 우린 연인이었고 이제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로맨틱하다고 말하는 센티넬과 가이드가 되었는데.
"나는 네가 센티넬인 걸 알자마자 네 모든 가이딩은 내가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왜 나랑만 안 해?"
"...햄이랑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유를 말하라고!!"
최종수가 언성을 높이자 놀란 눈이 따라붙는다. 이 와중에도 계속 가이딩이 되고 있었다. 능력을 안 쓰긴 개뿔. 가이딩은 가이드에게도 영향을 준다. 손만 잡으면 제 앞의 사람이 얼마큼 위태로운 상태인지 가늠이 갔다. 일을 하면서도 능력을 쓰는 게 뻔했다. 매일매일 가이딩을 받는데도 이 정도라면 기상호가 받았을 가이딩은.
거기까지 생각한 최종수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속절없이 뻗어나간 생각이 원치 않았던 답에 닿는다. 기상호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아는데, 순간 상처를 입어버린 마음이 저 역시 상처를 입히려 모진 말을 내뱉었다.
"다른 새끼한테 가이딩 받으면서 걔가 좋아지기라도 했어?"
말을 뱉어버리면 남는 것은 상처 받은 두 사람이라. 기상호는 그런 최종수를 멍하게 쳐다보았고 최종수는 그런 기상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기상호가 힘을 주어 제 손을 빼낸다. 최종수는 그 손을 잡지 못했다. 가이딩은 끝났다. 최종수에겐 당장 기상호를 잡을 빌미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반대로 기상호는 굳어버린 최종수를 두고 떠날 빌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기상호는 떠나지 않았다. 상처 받은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저를 마주하는 얼굴을 보며 최종수는 한 발자국 다가가 어리광을 피우듯이 품을 파고들었다. 기상호는 팔을 들어 최종수를 끌어안는다.
"형도 알잖아요. 가이딩을 받으면 별수 없이 상대 가이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좋아하게 돼요."
"알아. 아니까, 더더욱 나한테 받았어야지."
"아뇨. 그래서 더 받기 싫었어요."
"왜?"
"나는 이미 형을 사랑하는데, 형하고 닿으면서 느낀 감정은 제가 이제까지 형에게 느꼈던 것과 다른 거예요."
그게 너무 역겨워서... 최종수가 고개를 든다. 담담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기상호를 마주한다. 최종수는 제게 감긴 팔이 더욱 강하게 얽혀오는 것을 느낀다.
"그 마음이 꼭, 제가 센티넬이라서 별수 없이 생기는... 가짜인 것 같았어요. 그런 걸 형한테 주고 싶진 않았어요."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최종수는 기상호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다. 센티넬들이 자연스레 내보이던 열감들. 그것에 제가 거부감을 느끼는 걸 알면서도 다가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감정을 혐오하며 닿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이들도 있었다. 기상호는 후자 였던 거다. 그래서, 그런 강제적인 감정으로 저를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라고.
좆같은 새끼. 최종수는 일그러지듯 웃었다. 언제나 헌신적이고 다정한 듯 굴면서도 기상호는 가끔 예상치 못한 것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최종수를 시험하곤 했다. 기상호는 최종수를 너무 잘 알아서, 어떻게 굴어야 제 뜻대로 움직여주는지를 알았다. 처음부터 그런 말을 했더라면 최종수는, 기상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싫어서 기꺼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했을 것이다. 기상호는 효과적으로 그러지 않기를 종용했다. 그것은 기상호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최종수는 그것을 알았다.
최종수는 헛웃음을 한 번 흘린다. 하지만 최종수 역시도 기상호가 내민 답이 좋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최종수는 기상호가 하고 싶은 건 그냥 했다. 최종수는 이제 정답을 알았다. 기상호가 제 품에 파고들듯 다가오는 것을 내버려 두며 최종수는 말했다.
"그 가짜마저 날 향했어야지. 네가 느낀 모든 사랑은 내 것이어야 해. 그게 별수 없는 본능이라도."
"그럴까요."
"그래."
그 사랑의 기저에 깔린 것이 저열한 생존의 욕구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감히 사랑의 이름을 붙이자면 그것은 당연히 제 몫이 되어야 한다고. 최종수는 말했고 기상호 역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제게 했던 말들 역시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게 가장 진실된 것만 주고 싶었다는 것은 진심이겠지. 그래도 애인을 두고 다른 이와 가이딩을 하는 것이 좋을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데 다른 이에게 속절없이 열감을 품고 욕망하는 것이 반가울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상호는 조커 카드를 슬쩍 위로 빼놓는 것 마냥 제가 원하는 선택지를 눈에 띄게 내밀어 놓고 최종수의 선택을 종용했다.
최종수는 순순히 그것에 응했다. 저 역시 기상호가 원하지 않았더라면 참아냈겠으나 기상호가 원했다는 것 알고나면 거리낄 것이 없다. 최종수 역시도 진실만을 말했다. 기상호가 주는 사랑이라면 그 기저에 무엇이 깔리든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했다. 자신은 그 사랑을 가질 수 있는 가이드였으니 그것은 마땅히 저를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 연인은 이내 평온을 얻는다. 아까의 분위기가 거짓인 것 마냥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기상호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최종수는 순순히 눈을 감으며 너도 어지간히 미친 새끼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